바가바드기타 -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간디가 해설한
간디 해설, 이현주 옮김 / 당대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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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해설, 이현주 옮김, <바가바드기타>-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간디가 해설한.


벌써 몇 주 전에 손대었던 책이다. 방학 시작하고 무기력한 1주일을 넘긴 뒤 영혼의 고갈을 느끼며, 아니 그 보다는 예전서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기에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도 읽지 못한 상태에서 잠시 손에서 놓았었다. 갈구의 심정이 강할 때는 조금 들어오는가 싶더니 이내 고단해졌다. 아직 나의 심성이 차분히 경전을 읽을 때가 아니어서 그랬던가.
그래, 경전은 매일 꼬박꼬박 조금씩 읽고 묵상하는 거야 라는 핑계를 대며 잠시 두었었다. 그러나 뒤닦기를 하지 않고 나온 기분처럼 영 불편했다. 그래서 다시 손에 들었다.

이현주 목사가 옮긴 것이다. 그 전에 간디가 해설한 것이다. 그럼 누가 지은 것이냐고? 경전인데 뭐. 힌두 경전.
이현주는 간디를 언급하면서 "물질에 바탕한 문명이 시들고 새로이 정신(영혼)에 바탕한 문명이 피어나는 21세기를 맞이하여, 간디의 맑고 깊고 아름다운 영혼이 바야흐로 세계를 다시 부추길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여 후기에 썼다. 내가 요즘 이런 책을 즐겨 찾는 이유도 그 때문일까.

바가바드기타를 예전부터 눈여겨 놓았던 건 크리슈나의 가르침이 있는 경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크리슈나가 아주르나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경전은 구성되어 있다. 시바, 브라만, 크리슈나가 인도의 3대 신이다.

경전을 읽고 어떻게 그것을 하나로 요약하겠는가? 그냥 내게 다가온 것만을 잠깐 메모해 둘 뿐이다. 물론 내게 전체적으로 준 가르침은 집착에서 벗어날 것. 여기서 집착이란 사실 이기심이다. 혹은 내 몫에 대한 집착이다. 이걸 버리라는 것이다. 행위의 열매을 기대하지 말고 그냥 신을 위해 일을 하라는 것이다. 신을 위해 일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웃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좋은 말이다. 실천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그래도 이런 책을 읽으면 잠시라도 내 삶을 돌이키게 된다.
어제 읽기를 끝냈던 문익환 평전의 가르침과도 유사하다. 예수도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라고 했다지 않은가. 그리고 그 구절을 문목사님도 좋아했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지금 이 가르침에 목말라 있기에 그런 구절들만이 강조되어 들어오는 것일까.

좋았던 구절들을 옮긴다.
먼저 "세상의 하인으로 살아라. 그 이상의 일은 너의 능력 밖에 있다."

마음의 고요함이 요가이니라.(2장 48절)
집착하는 일 없이 일하되 요가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라. 요가는 행위의 열매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연한 태도를 선물로 받아 행위의 결과를 바라지 않는 현자들은 태어남이라는 사슬에서 풀려나 온갖 재난과 병고로부터 해방된 상태에 들기 때문이로다.(2장 51절)

육신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94쪽- 이건 요번에 강화도에서 만난 성공회 신부 천용욱 신부가 "꼭 먹어야 할 게 아니라면 굳이 먹지 않습니다"라는 말과 상통한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가르침이 반복된다.

이것들을 단단히 틀어잡고서 요기는 오로지 나에게 열중해야 하느니라. 자신의 감각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깨달음에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2장 61절)

그런 즉 그대가 해야만 하는 일을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이룰지어다. 집착하지 않고 행동함으로써 사람은 지고자에 이르니라.(3장 19)

요가를 아는 사람은 행위의 열매를 포기함으로써 영원히 계속되는 평화를 누리거니와 요가에 무지한 자는 이기욕으로 열매에 집착하여 그 사슬에 묶이는도다.(5장 12)

오, 아르주나여, 자기 자신을 남들과 같이 여기는 사람, 모든 사람의 즐거움과 아픔을 자기의 즐거움과 아픔으로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높은 요기라고 일컬어지느니라(6장 32)

마음을 신에게 모으는 것을 뜻하는 명상이 '즈나나'보다 낫다. 그러나 행위의 열매를 포기하는 것이 그 명상보다도 낫다고 말한다.

<바가바드기타>는 이 점을 거듭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한 가지 교훈, '나'라고 하는 생각을 벗어던지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446쪽

우리가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신이 당신의 뜻에 따라서 우리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공을 조금 세웠다고 해서 우쭐거릴 터무니가 없다. 500쪽

정신적으로 카르마를 포기하면 그 사람은 '나'와 '내것'이라는 생각(감각)에서 해방된다. 그리하여 그는 야즈나의 정신으로 오직 남의 이익을 위해서만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남을 섬김으로써 성스런 공덕을 쌓고, 남을 괴롭힘으로써 죄를 초래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자기중심에서 자유로우면 비록 속도는 느려도 틀림없이 목적지에 도달한다....531쪽

스리 크리슈나는 카르마 요가의 탁월함을 설명한다. 누구든지 카르마를 통해 요가를 수련하려는 자는 자기의 모든 카르마를 신에게 바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카르마에 수반되는 다른 것들을 설명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지식에 의하여 풍요로워져야 한다.
지식의 길과 카르마의 길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지식의 길만 오로지 좇는 사람은 가슴이 메말라지고 카르마의 길만을 오로지 좇는 사람은 머리가 멍청해진다.


이 일에 있어서는 늘 그렇듯이 단호한 결심에서 솟구쳐나오는 태도란 하나뿐이니라. 오, 쿠루난다여. 그러나 단호한 결심을 내리지 못한 자들의 태도는 가지각색이요, 도 끝이 없도다.(2장 41절)

어쨌거나 가장 마음에 남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세상의 하인으로 살아라. 그 이상의 일은 너의 능력 밖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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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5
김형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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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수 지음, <문익환 평전> 2004. 실천문학사


하, 벌써 10년이구나. 1994년 1월 18일.
우연이었을까, 포항에서 생활하던 내가 그 때 잠시 서울에 있었다. 충격이었고, 곧바로 한일병원을 찾아갔었다. 그 때의 그 가슴 무너짐,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이었구나.
책을 구입해놓고 읽기 전까지만해도 이 책이 왜 지금 나왔을까 의아해 했다. 그런데 벌써 10년이라. 정말 가까운 시간 같은데

책은 가계에 대한 소개부터 시작된다. 간도로 이주해간 선조들의 이야기, 그곳에서 전개되는 개척과 항일운동, 그리고 윤동주 등의 벗들 이야기. 여기까진 그냥 그랬다. 조금은 미화되고 있다는 괜한 시비와 함께, 그렇게 읽었다.

하지만 내가 살았거나 혹은 관심을 가지고 고민했던 1970년대 이후의 이야기는 달랐다. 아니 어쩌면 그 때부터가 목사님의 사회운동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낙천주의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신앙이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신앙이다. 특히 그의 신앙은 개인이 아니라 가정 전체가 공유하는 신앙이기에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십자가는 치욕이요 패배요 비극이라고 모두 생각할 때 예수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에게서 십자가와 치욕은 영광으로, 패배는 승리로, 비극은 축복으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최악을 최선으로 바꾸는 일,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환원하는 일, 이것이 바로 예수가 인류에게 보여준 것이 아니겠어요?"
-극한의 폭력 앞에서 오만해지는 문익환의 이러한 태도.......시련에 부딛칠수록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도취되는 사람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가정의 분위기였다. 부모님 모두 훌륭한 신앙을 가진 시대의 지도자들이었다. 문목사 나이 72에 방북 이후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 방청석에 겨우 들어올 수 있었던 90나의 그의 어머니가 외쳤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를 향해 가는 심정으로 재판을 받아라, 익환아, 그것을 기억해라"라고 말이다.
이런 신앙이 있었기에 거침이 없었던 것이다. 원효의 무애가처럼, 그에겐 거칠 것이 없었다. 이적단체 고무 찬양죄를 적용하자 오히려 그는 북한을 더욱 고무 찬양해야 통일이 된다며 거칠 것 없이 맞받아 친다. 진실에 서 있는 사람만이 드러낼 수 있는 당당함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없이 겸손하다. 그 스스로가 항상 강조했듯이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목사님이 그랬다. 한없이 겸손함.
"내가 찬양받고 싶다는 것. 그건 밀려오는 바다와 같이 무서운 시험이에요. .....하느님께 돌려야지 생각했지요."
-수도의 길로써는 프로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수도에 전문가란 있을 수 없다. 수도가 직업이어서는 안 된다. 수도자는 완성된 경지에 들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수도자는 언제나 초심자여야 한다. 수도자는 지금 자기가 도달한 경지를 언제나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어린애처럼 새로운 안목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해답을 구하는 자세가 수도자의 자세다.'

그런 겸손은 또한 운동 속에서 헛된 과욕을 부리지 않게도 했다. 아니 이건 겸손이 아니라 목숨을 건 치열한 신앙고백이다. 계속된 단식을 만류하는 지인들에게 그는 "예수님이 내 나이까지 사셨으면 일을 얼마나 많이 하셨겠어? 너무도 엄청나게 일을 많이 하셨을거야. 그러나 그는 돌아가셨거든. 죽어서 큰 일을 하신거야. ....후배들이 잘 해주겠지."
"팔십, 백 살을 살아도 할 일은 남아 있는 법이야."

이제 책을 덮는다. 내 젊은 시절, 그가 없었다면 안그래도 황폐했던 내 영혼이 얼마나 더 황폐해졌을까.
10년 만에 그를 기린다. 영원한 청춘 문익환 목사님.

오늘 정말 잊지 말아야 할 구절을 다시 한 번 반복하며....
"수도자는 언제나 초심자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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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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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그린비, 2007.



웬만해서는 책의 타이틀을 그대로 내 글의 제목으로 삼진 않는다. 자존심이 있지. 그런데 이번엔 그대로 달았다. 고미숙 선배의 내공 한 방에 그대로 내가 쓰러졌기 때문이다. 직접 만나보고 가르침을 받고 싶은 선배다. 무림의 고수. 그건 수유+너머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의 내공에 대해서 한 초식 배워야겠다.
책 분량이 그리 많지도 않다. 가볍다. 그래서 만만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웬걸. 책의 모든 쪽마다 줄을 그으며 읽어야 했다. 접어놓은 곳이 너무 많아 너덜거릴 정도다. 쉬우면서도 ‘알기’가 박힌 책. 내가 원하는 책이다.
공부를 왜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공부가 무엇인지, 공부가 왜 삶을 행복하게 하는지를 질리지 않게 풀어간다. 그의 말 그대로 강요가 아니다. 계몽과 훈육이 아니다. 단지 ‘촉발’이며 ‘전염’일 뿐이다. 그의 공부 태도와 실력도 본받고 싶지만 그가 꾸리는 그 ‘앎의 코뮌’도 너무 너무 부럽다. 내가 꿈꾸는 공부하는 공동체의 본보기다. 서울이라서 가능했던 일일까. 제주에선 그 비슷한 흉내를 문화포럼에서 내긴 하는데, 아무래도 아니다. 문화포럼은 다양하고 역량이 있긴 하지만 ‘알기’가 없다. 폐부를 찌르는 그 긴장이 없다. 밋밋하다. 그래서 내가 적당한 거리를 둘 수밖에. 하긴 그것만으로도 부럽긴 하다.
언젠가 나 역시 고미숙이 말하는 그런 코뮌을 꾸리고 싶다. 우리 역사교사모임이 아마 바탕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 전에 먼저 그런 코뮌을 만들려면 공부부터 해야 한다. 왜? 공부가 전부이니까.
현직교사인 내가 공부를 말하는 건 이유가 달리 있지 않다. 고미숙도 지적하듯 한국의 학교엔 공부가 없다. 다만 성적이 있을 뿐이다. 출세와 돈을 위해, 논술고사를 위해 머리를 쓰는 건 공부가 아니다. 그건 그저 천한 노역일 뿐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연애와 고시 외엔 관심이 없고, 교수들은 수당 적잖이 주는 회의와 프로젝트 외엔 관심이 없다.” 그러니 그런 대학에도 공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미숙은 현재 애들이 하는 공부의 본질을 정확히 집어낸다. 그러면서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까지 깨우쳐 준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출세를 못해서 안달하는지 아니? 다 외로워서 그런 거야. 사람들 ‘속에서’ 폼 나게 살고 싶으니까 돈이나 권력으로 사람들을 계속 자기 옆에 묶어두려고 하는 거야. 헌데, 실제론 출세를 하면 할수록 더더욱 ‘왕따’가 된다는 게 문제란 말이야. 그건 또 왠 줄 아니? 열심히 돈과 권력을 좇아 살다 보니, 친구들의 존재를 홀라당 까먹어 버린 거야.” “호모 쿵푸스가 되면 출세를 위해 안달할 필요가 없어. 돈과 권력 따위는 오히려 걸림돌일 뿐이지. 인생과 우주에 대한 진검승부를 펼칠 수 있는데, 그따위가 무는 소용이 있겠어.” 차원이 다르다. 생활인은 아둥바둥 돈을 좇아가는데, 고미숙은 그 차원을 우주까지 확대한다. 허풍? 그럴 수도 있겠다. 고수가 되기 전까진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논리대로라면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네 德不孤必有隣”라는 공자님의 말씀과 같다. 돈과 권력으로 외로움을 극복하려다가 오히려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된다. 덕으로 공부로 쌓아갈 때 외로움은 사라진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그의 말대로 “먹고 번식하는 일이야, 뭐 박테리아도 하지 않는가. 적어도 공부라고 하면 존재 자체가 특별한 단계에 도달하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파트를 예로 든 것도 적절하다. 그 고품격의 아파트. 하지만 실제 그 아파트에 사람이 지내는 시간은 아주 짧다. 잠 자는 시간 빼면 하루에 얼마 안 된다. 그러하면 럭셔리한 가구를 모셔두는 공간에 불과해진다. 이렇게 우린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가 말하는 진짜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미숙은 홍대용의 글을 인용한다.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 다시 고미숙의 말, “고로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 큰 질문을 가지고 이 책을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1장은 학교 공부에 대한 비판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적과 경쟁, 성공의 신화만이 판치는 정글에 내몰린 채, 끝없이 이지는 철인 5종 경기를 방불케 하는 각종 장애물 넘기를 강요받지 않는가. 방법은 오직 하나. 정글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뿐.”
사실 1장의 핵심 내용이 새로운 건 아니다. 설득력 있게 글을 썼을 뿐. “오로지 경제적 가치 외에는 아무 것도 사유하지 못하는 지적 주체들을 길러내고” 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그의 말대로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그게 진짜 공부인 것이다. 백 번 맞는 소리. 그러니 공부는 “그 자체로 존재의 기쁨이자 능동적 표현”이다.
그러면 어떤 자세라야 하는가.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꾸준히 밀고 가는 恒心과 늘 처음으로 돌아가 배움의 태세를 갖추는 下心, 공부에 필요한 건 오직 이 두 가지뿐이다.”
물론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뒤에서 고미숙이 말하듯이 스승과 도반이 있어야 한다.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 그 속에서 진정한 스승은 도반이 된다. 그래서 그의 표현 그대로 그에게 있어서 연암 박지원은 師友가 된다. 師友라. 내겐 그런 존재가 있나. 다시 또 부럽다.
근데 현실에선 엉터리 공부들이 횡행한다. 다이제스트판 공부. 이건 내공을 쌓지 못한다. 그냥 무늬만을 만들 뿐이다. 앞에선 폼이 날지라도 금세 탄로 난다. 그러면 믿음은 더 떨어진다. 그러니 결국 이건 헛짓. “책을 통해 탐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터넷에 떠다니는 검색 다발일 뿐”인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 이렇게 스스로 질문하지 못하니 겉은 화려해도 속은 빈다. 그 결과 “자립적 활동력을 상실한 채 제도에 길들여진 노예”가 된다.
이걸 이겨내려면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강도 높은 학습과 토론이 있어야 한다. 학습 없는 토론은 “아주 유치한 수준에서 헛바퀴만 돌 따름이다. 대학에서는 이런 문제가 이미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중략) 지금의 대학생들은 삶과 사회에 대한 물음이 없다.” 얄팍해져서 그렇다. 그러기에 “신체를 육박해 들어오는 절박한 질문이 없다면 그저 값비싼 레저를 즐긴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에 많은 공감을 보낸다.
그럼 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 하긴 요새 내가 우리 학생들 책 읽으라 닦달했더니 그저 해리 포터 수준이다. 한심. 고미숙도 지적한다. “일단 나보다 훨씬 폭넓게, 강렬하게 살았던 분들이 쓴 책” “생명의 역동성이 살아 숨쉬는 책, 생사를 가로지르는 원대한 비전이 담긴 책”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는 책, 한 시대의 통념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한 책, 마주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책”이다.
고미숙이 처음 대학원 다닐 때 선배들에게서 들었던 조언도 음미할 만 하다. 먼저 ‘차이를 구성하라.’ 즉 너 자신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텍스트와 온몸으로 마주해야 한다. 과녁을 향해 달려가는 화살처럼.
다음엔 논리적 일관성이다.
그리고 자기 비움이다. 그가 늦게 서야 맑스를 받아들였던 때의 심경을 쓴 부분은 군더더기 없이 생생하다. “적을 공격할 때는 폐부를 찌르듯 예리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을 폭로할 땐 눈물겹게 애절했으며, 혁명의 파토스를 고양시킬 땐 말할 수 없이 힘찼다.” 그게 맑스의 글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의 철학, 그 한 대목을 소개한 것도 유익했다.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에게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그래서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고. 공부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공부하는 순간, 공부와 공부 사이에 행복이 있는 것이지, 미래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이자 이유, 그래서 그의 표현대로 “공부는 존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기에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라는 기막힌 선동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공부라야 소외가 없다. 노동도 마찬가지다. “노동해방이란 중산층처럼 사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이다. 소외된 노동이 아닌 자유로운 활동을 능동적으로 창안할 수 있는 노동, 그것과 같은 공부, 이건 ‘자율적 존재’가 할 수 있는 공부다. ‘중산층적 안락’을 위해 ‘삶으로부터의 소외’를 겪는다는 건 억울하다. 물질을 누리기보다 섬기는 짓,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삶을 산다는 건 정말 억울하지 않은가. 공부도 마찬가지다. 자본을 위한 공부는 이미 공부가 아니다. 삶의 궁극을 묻는 게 진짜 공부다.
또 최고의 좋은 운세는 “운명을 사랑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그 ‘계몽’과 ‘훈육’을 거부한다. “계몽이 아니라 촉발, 훈육이 아니라 감염” 말은 쉽지 실제는 어렵다. 그래도 이게 정답이다. “성인이란 남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존재가 아니라 남보다 앞서 부지런히 배우는 존재”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공부는 위아래 없이 서로 감염시키며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말대로 “왜 가족 간의 사랑과 화목은 늘 스키장이나 화려한 외출, 해외여행 따위로 표현되는가?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부모 자식 혹은 친척들이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왜 상상조차 하지 않는가?”모르겠다. “가장 싸게 가장 밀도 있게 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스승이란 따로 있지 않다. 스승이란 “가장 열심히 배우는 이다.”
그런 것 말고, 읽어가다 예전에 나도 그리 생각했던 걸, 고미숙이 썼기에 공감하며 옮긴다. “‘섹시하다’는 건 ‘난 너한테 성욕을 느껴’, ‘난 너랑 자고 싶어’ 이런 표현이 아닌가. 대놓고 이렇게 말하면 성희롱이 될 수 있는 말이다. 헌데 모든 매체에서 이 괴상한 낱말을 시도 때도 없이 밥 먹듯 써대고 있다. 게다가 듣는 이들은 수치심은커녕 오히려 최고의 찬사로 받아들인다.(중략) 섹시미의 무한질주? 그럼, 서로가 서로에게 성욕만을 느끼는 시대가 도래할 것인가” 삶은 사라지고 몸만 남는 시대, 성찰이 없어서 그렇다.
몇 가지 덧붙이는 생각. 수유+너머의 중요한 강사 한 분이 정화 스님이라 그런다. 예전에 곁에서 항상 뵐 때 한 초식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어찌하다 그냥 보냈을까. 그 분의 책만 받아 놓고 그냥 있다. 어려운 책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게 때가 있는 법. 인연을 그냥 흘러 보낼 수밖에 없었던 건 내 그릇의 크기가 그만큼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일 터.
또 하나. 수유+너머의 식생활이 채식이라고 한다. 반가움. 더 설명 안 해도 채식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느낌이 닿는다. 토요 서당 때 애들 밥 먹이고 나서 빵 한 조각 주고는 자신의 쟁반을 다시 닦아 먹게 한단다. 좋은 방법이다. 빵으로 닦아 먹는 발우 공양, 시도해 볼 일이다.
그렇게 나는 언제가 언젠가 이룰 '앎의 코뮌'을 꿈꾼다. 그 꿈만으로도 행복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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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3-30 16:55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방외지사 1 - 우리 시대 삶의 고수들
조용헌 지음, 김홍희 사진 / 정신세계원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조용헌, <方外志士1>, 정신세계원, 2006.




"살고 싶은 대로 한 번 살아보자"
"직장에 얽매여 먹고 사는 문제로 걱정만 하다가 한 세상 끝나는 것인가? 고정관념과 경계선 너머의 삶이란 실현 불가능한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백수의 제왕에서 무림 고수까지 방외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우리 시대 삶의 고수 13인 방외지사들의 이야기에서 진짜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사람들은 항상 꿈을 꾼다. 특히 도회지 사람들, 그리고 샐러리맨들, 그 작은 봉급을 받으면서도 집착은 대단하다. 봉급이 끊기면 사람 구실 못할 것이라는 굉장한 두려움 때문이다. 아니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남과 다른 삶을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도 무시 못한다.

이 책은 평범한 우리 군상들이 꿈으로나 생각해 보는 '방외'의 삶을 소개한다. 아마 짐작컨데 책 장사 잘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만큼 현실 속의 삶이 팍팍하다는 증거다. 벗어나고 싶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벗어나지 못한다. 꿈만 꾼다. 그럴수록 책은 더욱 더 잘 나간다. 절묘하게 그런 심리를 파고든 출판기획이 얄밉다. 요즘 같은 세상엔, 처세술, 역경 극복기, 혹은 이 책과 같은 대리만족형 방외의 이야기가 잘 나갈 건 뻔 하다.
그런 얄팍한 출판 기획에 한편으로 질투도 나고 그러면서도 한 편으론 보통 사람들처럼 이들 방외지사를 보며 부러워 한다.

물론 언제까지난 꿈만은 아니라라 확신한다. 언젠가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좀 더 깊은 삶의 모습으로 들어갈 생각이다. 이 책에 소개된 이원규 시인처럼 날날이 같은 삶은 아니다. 그렇다고 손성구나 박청화, 이동호, 박사규와는 또 다르다. 그들은 굉장한 내공이 있는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이 감히 넘보지 못할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나의 삶과는 거리가 있다.
평범하면서도 세속의 명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세, 이동호의 능력에는 못 따라가겠지만 그의 자세는 본받을 만 하다.
아마 가장 근접할 수 있는 삶이라면 '20년 공무원 생활 접고 드디어 고향집에 돌아온 사람' 박태후가 그 나마 모델이라면 모델이겠다. 나머지는 기괴하거나 대단한 능력 소유자거나 하기 때문에 그냥 흥미거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뿜어주는 몇몇 메시지들은 끌어앉을 만 하다.
"소급해 보니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과 경쟁하는 것이 싫었다. 남을 이겼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았다. 자연도 모둠살이를 하고, 문명도 모둠살이를 한다. 전자의 모둠살이는 서로 상생하는 작용을 하지만, 후자인 문명의 모둠살이는 서로 간의 경쟁이고 죽임이다. 지금 생각하니까 문명의 속성인 경쟁과 죽임을 싫어했던 것 같다."
평소 나 역시 늘 이렇게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점수를 계산하는 축구가 싫었다. 친구들 중에 유난히도 승부욕을 불태우는 애가 있었는데 나는 공 차는 것 그 자체가 좋았다. 그런 심성이 있었나 보다.

"효가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부모님과 함께 밥 먹는 일이었다."
동감이다. 이걸 실천해야 하는데......최소한 1주일에 한 번 만이라도.

"돈 안드는 귀족 취미는 산책"

손성구가 고대 중문과 82학번이라는 걸 우연히 알게 된 것도 이 책 덕이다.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플 수밖에 없다." 유마거사.

性在何處 性在作用, 성품의 본체가 어디 있는가. 알고 보면 그 본체는 작용에 있다. 아음의 본체를 따로 찾으려 하지 말고,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들과 번뇌망상 속에 본체가 있다는 말.

應無所住而生其心 <금강경>에서 ;상황에 응하면서도 집착이 없는 마음.

칠바라밀의 실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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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소리 - 나를 깨우는 우리 문장 120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죽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민, <죽비소리>, 마음산책, 2005.



올해 초 서울 갔다가 시백 형을 만났다. 이젠 팔팔했던 그 청춘의 20대는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반갑고, 또 삶의 그 밑뿌리서부터 올라오는 힘을 느낀다. 그건 온전히 순수한 열정으로 청춘을 살아본 사람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에너지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다. 정의를 외치던 그 시절과는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표출방식만 다를 뿐이다.
형은 만화를 그린다. 그리고 나는 글을 쓴다. 하긴 형이야 전업으로 그리는 것이고 나는 취미 삼아 쓰는 것이니 그 절박함이 다르다. 그런 만큼 내뿜는 내공도 다르다. 그런 형과의 대화에서 나는 건방을 떨었다. '요새 잘 나간다는 놈들 글 봐도 별 게 아니더라. 상업적 기회를 잘 탓을 뿐, 그 정도는 나도 할 것 같더라.' 뭐 대충 이런 건방을 떨었던 것이다. 그 건방의 이야기 중에 '요새 잘 나가는 놈' 중의 하나로 꼽은 게 정민이다.
솔직히 그랬다. 특히 그의 책 <미쳐야 미친다>는 어려운 경기, 청년 실업이 한창인 요즘, 무엇엔가 철저히 몰두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교훈으로 일관된 책에 불과하다. 심하게 말하면 약간 고급스런 처세술 책에 불과하다고 평하고 싶었다. 그 만큼 요즘 내가 많이 철없어진 것이다. 빨간 띠 매고 검은 띠에게 껍죽댄 그런 모양세였다.
그걸 느끼게 한 게 정민의 다음 책 <죽비소리>다. '나를 깨우는 우리 문장 120'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여기서도 그의 상업성은 돋보였다. 시대 분위기를 잘 읽는다.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무엇인가 용기를 주는 글. 그러면서도 고전에서 끌어내는 멋스러움.
물론 그것을 끌어낼 정도의 한문 실력 등의 내공이 바탕이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긴 하다. 난 그것은 보지 않고 그냥 그를 시류를 잘 읽는 얄팍한 사람 취급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보니 그게 아니다. 한 수 위가 아니라 열 수는 위겠다.
한문 실력만이 아니다. 우리말 실력도 한참이나 뛰어나다. 문장을 다루는 기술도 나름의 경지를 갖추고 있다. 단타로 끊어치는 힘, 그의 글이 가진 매력이다. 짧으면서도 울림이 있다. 여기서 나는 분명코 반성을 한다.
그가 골라낸 120 문장도 괜찮다. 좋은 글 뽑아낸 그가 고맙다. 물론 그냥 맹맹한 글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나의 낮은 수준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부턴 좋았던 부분들을 옮긴다. 나의 건방을 반성하면서.

"난초 하나 바위 하나가 별을 따기보다 어렵더군요"
얼마나 정성을 들였으면 별 따기 보다 어렵다고 했을까. 그러나 "그러다가 문득 마음이 환하게 열리면, 컴퓨터의 속도가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신명을 따라잡지 못한다. 몇 날, 혹은 몇 달을 답답하게 꽉 막혀 있던 생각의 봇물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자신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예술을 한다는 것, 학문을 한다는 것, 인생을 산다는 것은 불현듯 다가오는 그 짧은 격정의 순간을 위한 기다림이기도 하다." 그 짧은 격정의 순간, 나 역시 기다리는 바이다.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툭 터진 허공은 철옹성보다 더 뚫기가 어렵다." 자를 수는 있어도 모으긴 힘들다. 허공과의 싸움은 확산이 아니라 수렴이다. 이것 저것 욕심 벌여 놓기만 하는 나, 수렴이 필요하다.

"나는 공부하며 놀고, 누구는 노래하며 놀며, 누구는 돈을 세며 논다." 각자의 기준과 관심이 다름을 말하고 있다. 각자의 가치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나는 공부하며 논다는 말에서 동질감 혹은 부럼움을 느낀다.

"나는 무엇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될까?" 정말 그렇네. 나는?

"자기를 온전히 잊는 몰두가 없이 이룰 수 없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잊는다는 것은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자체로 좋아서,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 한다는 말이다." "미치지 않고는 안 된다. 적당히 해서는 이룰 수가 없다. 남들 하는 대로 해서는 희망이 없다."

"병법에는 불가기(不可欺), 즉 속일 수 없는 지장(智將)과 불인기(不忍欺), 곧 차마 못 속이는 덕장(德將)가 불감기(不敢欺) 즉 감히 못 속이는 맹장(猛將)으로 지휘관을 나눈다. .....너무도 똘똘해서 속여먹을래야 속일 수가 없었다던 유성룡보다 차마 속이지 못하는 이원익에게 자꾸 정이 간다."

"하나 하나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뜨리는 것은 한 순간이다. 선행을 쌓아 덕망을 갖추기는 쉽지 않지만, 한순간의 실수는 평생 이룬 것을 한꺼번에 무너뜨린다."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내일도 없고 다름도 없다. 다만 오늘과 지금 여기가 있을 뿐이다. 그러자면 손가락질과 질시가 따른다. 뼈에 새기는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그 손가락질, 그 질시를 달게 받을망정 아까운 시간을 허송하는 것만은 견딜 수가 없다. 공부는 이런 마음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갈 길이 바쁜데, 남의 일에 공연히 기웃거릴 시간이 없다. 목숨 걸고 해도 될까말까한데 느긋하게 되는 대로란 참을 수 없다."

결국 뭐냐? 우리 고전에서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을 골라낸 것인가? 아니 내가 그런 처지여서 그런 구절들만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참 나이 먹어서 이렇게 공부하면 살 줄이야 생각이나 해 봤겠나.
죽비 소리까지는 못 되어도 그래도 행복한 글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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