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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ㅣ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그린비, 2007.
웬만해서는 책의 타이틀을 그대로 내 글의 제목으로 삼진 않는다. 자존심이 있지. 그런데 이번엔 그대로 달았다. 고미숙 선배의 내공 한 방에 그대로 내가 쓰러졌기 때문이다. 직접 만나보고 가르침을 받고 싶은 선배다. 무림의 고수. 그건 수유+너머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의 내공에 대해서 한 초식 배워야겠다.
책 분량이 그리 많지도 않다. 가볍다. 그래서 만만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웬걸. 책의 모든 쪽마다 줄을 그으며 읽어야 했다. 접어놓은 곳이 너무 많아 너덜거릴 정도다. 쉬우면서도 ‘알기’가 박힌 책. 내가 원하는 책이다.
공부를 왜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공부가 무엇인지, 공부가 왜 삶을 행복하게 하는지를 질리지 않게 풀어간다. 그의 말 그대로 강요가 아니다. 계몽과 훈육이 아니다. 단지 ‘촉발’이며 ‘전염’일 뿐이다. 그의 공부 태도와 실력도 본받고 싶지만 그가 꾸리는 그 ‘앎의 코뮌’도 너무 너무 부럽다. 내가 꿈꾸는 공부하는 공동체의 본보기다. 서울이라서 가능했던 일일까. 제주에선 그 비슷한 흉내를 문화포럼에서 내긴 하는데, 아무래도 아니다. 문화포럼은 다양하고 역량이 있긴 하지만 ‘알기’가 없다. 폐부를 찌르는 그 긴장이 없다. 밋밋하다. 그래서 내가 적당한 거리를 둘 수밖에. 하긴 그것만으로도 부럽긴 하다.
언젠가 나 역시 고미숙이 말하는 그런 코뮌을 꾸리고 싶다. 우리 역사교사모임이 아마 바탕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 전에 먼저 그런 코뮌을 만들려면 공부부터 해야 한다. 왜? 공부가 전부이니까.
현직교사인 내가 공부를 말하는 건 이유가 달리 있지 않다. 고미숙도 지적하듯 한국의 학교엔 공부가 없다. 다만 성적이 있을 뿐이다. 출세와 돈을 위해, 논술고사를 위해 머리를 쓰는 건 공부가 아니다. 그건 그저 천한 노역일 뿐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연애와 고시 외엔 관심이 없고, 교수들은 수당 적잖이 주는 회의와 프로젝트 외엔 관심이 없다.” 그러니 그런 대학에도 공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미숙은 현재 애들이 하는 공부의 본질을 정확히 집어낸다. 그러면서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까지 깨우쳐 준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출세를 못해서 안달하는지 아니? 다 외로워서 그런 거야. 사람들 ‘속에서’ 폼 나게 살고 싶으니까 돈이나 권력으로 사람들을 계속 자기 옆에 묶어두려고 하는 거야. 헌데, 실제론 출세를 하면 할수록 더더욱 ‘왕따’가 된다는 게 문제란 말이야. 그건 또 왠 줄 아니? 열심히 돈과 권력을 좇아 살다 보니, 친구들의 존재를 홀라당 까먹어 버린 거야.” “호모 쿵푸스가 되면 출세를 위해 안달할 필요가 없어. 돈과 권력 따위는 오히려 걸림돌일 뿐이지. 인생과 우주에 대한 진검승부를 펼칠 수 있는데, 그따위가 무는 소용이 있겠어.” 차원이 다르다. 생활인은 아둥바둥 돈을 좇아가는데, 고미숙은 그 차원을 우주까지 확대한다. 허풍? 그럴 수도 있겠다. 고수가 되기 전까진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논리대로라면 “덕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이웃이 있다네 德不孤必有隣”라는 공자님의 말씀과 같다. 돈과 권력으로 외로움을 극복하려다가 오히려 돈과 권력의 노예가 된다. 덕으로 공부로 쌓아갈 때 외로움은 사라진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그의 말대로 “먹고 번식하는 일이야, 뭐 박테리아도 하지 않는가. 적어도 공부라고 하면 존재 자체가 특별한 단계에 도달하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파트를 예로 든 것도 적절하다. 그 고품격의 아파트. 하지만 실제 그 아파트에 사람이 지내는 시간은 아주 짧다. 잠 자는 시간 빼면 하루에 얼마 안 된다. 그러하면 럭셔리한 가구를 모셔두는 공간에 불과해진다. 이렇게 우린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가 말하는 진짜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미숙은 홍대용의 글을 인용한다. “크게 의심하는 바가 없으면, 큰 깨달음이 없다.” 다시 고미숙의 말, “고로 질문의 크기가 곧 내 삶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 큰 질문을 가지고 이 책을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1장은 학교 공부에 대한 비판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성적과 경쟁, 성공의 신화만이 판치는 정글에 내몰린 채, 끝없이 이지는 철인 5종 경기를 방불케 하는 각종 장애물 넘기를 강요받지 않는가. 방법은 오직 하나. 정글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뿐.”
사실 1장의 핵심 내용이 새로운 건 아니다. 설득력 있게 글을 썼을 뿐. “오로지 경제적 가치 외에는 아무 것도 사유하지 못하는 지적 주체들을 길러내고” 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그의 말대로 “공부는 무엇보다 자유에의 도정이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에서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그게 진짜 공부인 것이다. 백 번 맞는 소리. 그러니 공부는 “그 자체로 존재의 기쁨이자 능동적 표현”이다.
그러면 어떤 자세라야 하는가.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꾸준히 밀고 가는 恒心과 늘 처음으로 돌아가 배움의 태세를 갖추는 下心, 공부에 필요한 건 오직 이 두 가지뿐이다.”
물론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뒤에서 고미숙이 말하듯이 스승과 도반이 있어야 한다. 스승, 도반, 청정한 도량으로 이루어진 '앎의 코뮌'. 그 속에서 진정한 스승은 도반이 된다. 그래서 그의 표현 그대로 그에게 있어서 연암 박지원은 師友가 된다. 師友라. 내겐 그런 존재가 있나. 다시 또 부럽다.
근데 현실에선 엉터리 공부들이 횡행한다. 다이제스트판 공부. 이건 내공을 쌓지 못한다. 그냥 무늬만을 만들 뿐이다. 앞에선 폼이 날지라도 금세 탄로 난다. 그러면 믿음은 더 떨어진다. 그러니 결국 이건 헛짓. “책을 통해 탐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터넷에 떠다니는 검색 다발일 뿐”인 공부는 공부가 아니다. 이렇게 스스로 질문하지 못하니 겉은 화려해도 속은 빈다. 그 결과 “자립적 활동력을 상실한 채 제도에 길들여진 노예”가 된다.
이걸 이겨내려면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강도 높은 학습과 토론이 있어야 한다. 학습 없는 토론은 “아주 유치한 수준에서 헛바퀴만 돌 따름이다. 대학에서는 이런 문제가 이미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중략) 지금의 대학생들은 삶과 사회에 대한 물음이 없다.” 얄팍해져서 그렇다. 그러기에 “신체를 육박해 들어오는 절박한 질문이 없다면 그저 값비싼 레저를 즐긴 것에 불과하다”는 지적에 많은 공감을 보낸다.
그럼 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 하긴 요새 내가 우리 학생들 책 읽으라 닦달했더니 그저 해리 포터 수준이다. 한심. 고미숙도 지적한다. “일단 나보다 훨씬 폭넓게, 강렬하게 살았던 분들이 쓴 책” “생명의 역동성이 살아 숨쉬는 책, 생사를 가로지르는 원대한 비전이 담긴 책”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는 책, 한 시대의 통념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한 책, 마주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책”이다.
고미숙이 처음 대학원 다닐 때 선배들에게서 들었던 조언도 음미할 만 하다. 먼저 ‘차이를 구성하라.’ 즉 너 자신의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텍스트와 온몸으로 마주해야 한다. 과녁을 향해 달려가는 화살처럼.
다음엔 논리적 일관성이다.
그리고 자기 비움이다. 그가 늦게 서야 맑스를 받아들였던 때의 심경을 쓴 부분은 군더더기 없이 생생하다. “적을 공격할 때는 폐부를 찌르듯 예리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을 폭로할 땐 눈물겹게 애절했으며, 혁명의 파토스를 고양시킬 땐 말할 수 없이 힘찼다.” 그게 맑스의 글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의 철학, 그 한 대목을 소개한 것도 유익했다.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에게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그래서 “누구나 지금, 그 자리에서 함께 행복해야 한다”고. 공부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공부하는 순간, 공부와 공부 사이에 행복이 있는 것이지, 미래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공부 그 자체가 목적이자 이유, 그래서 그의 표현대로 “공부는 존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기에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라는 기막힌 선동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공부라야 소외가 없다. 노동도 마찬가지다. “노동해방이란 중산층처럼 사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이다. 소외된 노동이 아닌 자유로운 활동을 능동적으로 창안할 수 있는 노동, 그것과 같은 공부, 이건 ‘자율적 존재’가 할 수 있는 공부다. ‘중산층적 안락’을 위해 ‘삶으로부터의 소외’를 겪는다는 건 억울하다. 물질을 누리기보다 섬기는 짓,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자본의 노예로 전락한 삶을 산다는 건 정말 억울하지 않은가. 공부도 마찬가지다. 자본을 위한 공부는 이미 공부가 아니다. 삶의 궁극을 묻는 게 진짜 공부다.
또 최고의 좋은 운세는 “운명을 사랑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그 ‘계몽’과 ‘훈육’을 거부한다. “계몽이 아니라 촉발, 훈육이 아니라 감염” 말은 쉽지 실제는 어렵다. 그래도 이게 정답이다. “성인이란 남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존재가 아니라 남보다 앞서 부지런히 배우는 존재”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공부는 위아래 없이 서로 감염시키며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말대로 “왜 가족 간의 사랑과 화목은 늘 스키장이나 화려한 외출, 해외여행 따위로 표현되는가?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부모 자식 혹은 친척들이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왜 상상조차 하지 않는가?”모르겠다. “가장 싸게 가장 밀도 있게 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스승이란 따로 있지 않다. 스승이란 “가장 열심히 배우는 이다.”
그런 것 말고, 읽어가다 예전에 나도 그리 생각했던 걸, 고미숙이 썼기에 공감하며 옮긴다. “‘섹시하다’는 건 ‘난 너한테 성욕을 느껴’, ‘난 너랑 자고 싶어’ 이런 표현이 아닌가. 대놓고 이렇게 말하면 성희롱이 될 수 있는 말이다. 헌데 모든 매체에서 이 괴상한 낱말을 시도 때도 없이 밥 먹듯 써대고 있다. 게다가 듣는 이들은 수치심은커녕 오히려 최고의 찬사로 받아들인다.(중략) 섹시미의 무한질주? 그럼, 서로가 서로에게 성욕만을 느끼는 시대가 도래할 것인가” 삶은 사라지고 몸만 남는 시대, 성찰이 없어서 그렇다.
몇 가지 덧붙이는 생각. 수유+너머의 중요한 강사 한 분이 정화 스님이라 그런다. 예전에 곁에서 항상 뵐 때 한 초식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어찌하다 그냥 보냈을까. 그 분의 책만 받아 놓고 그냥 있다. 어려운 책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게 때가 있는 법. 인연을 그냥 흘러 보낼 수밖에 없었던 건 내 그릇의 크기가 그만큼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일 터.
또 하나. 수유+너머의 식생활이 채식이라고 한다. 반가움. 더 설명 안 해도 채식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느낌이 닿는다. 토요 서당 때 애들 밥 먹이고 나서 빵 한 조각 주고는 자신의 쟁반을 다시 닦아 먹게 한단다. 좋은 방법이다. 빵으로 닦아 먹는 발우 공양, 시도해 볼 일이다.
그렇게 나는 언제가 언젠가 이룰 '앎의 코뮌'을 꿈꾼다. 그 꿈만으로도 행복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