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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소리 - 나를 깨우는 우리 문장 120
정민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죽비'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민, <죽비소리>, 마음산책, 2005.
올해 초 서울 갔다가 시백 형을 만났다. 이젠 팔팔했던 그 청춘의 20대는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반갑고, 또 삶의 그 밑뿌리서부터 올라오는 힘을 느낀다. 그건 온전히 순수한 열정으로 청춘을 살아본 사람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에너지다.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다. 정의를 외치던 그 시절과는 다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뿌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표출방식만 다를 뿐이다.
형은 만화를 그린다. 그리고 나는 글을 쓴다. 하긴 형이야 전업으로 그리는 것이고 나는 취미 삼아 쓰는 것이니 그 절박함이 다르다. 그런 만큼 내뿜는 내공도 다르다. 그런 형과의 대화에서 나는 건방을 떨었다. '요새 잘 나간다는 놈들 글 봐도 별 게 아니더라. 상업적 기회를 잘 탓을 뿐, 그 정도는 나도 할 것 같더라.' 뭐 대충 이런 건방을 떨었던 것이다. 그 건방의 이야기 중에 '요새 잘 나가는 놈' 중의 하나로 꼽은 게 정민이다.
솔직히 그랬다. 특히 그의 책 <미쳐야 미친다>는 어려운 경기, 청년 실업이 한창인 요즘, 무엇엔가 철저히 몰두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교훈으로 일관된 책에 불과하다. 심하게 말하면 약간 고급스런 처세술 책에 불과하다고 평하고 싶었다. 그 만큼 요즘 내가 많이 철없어진 것이다. 빨간 띠 매고 검은 띠에게 껍죽댄 그런 모양세였다.
그걸 느끼게 한 게 정민의 다음 책 <죽비소리>다. '나를 깨우는 우리 문장 120'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여기서도 그의 상업성은 돋보였다. 시대 분위기를 잘 읽는다.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무엇인가 용기를 주는 글. 그러면서도 고전에서 끌어내는 멋스러움.
물론 그것을 끌어낼 정도의 한문 실력 등의 내공이 바탕이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긴 하다. 난 그것은 보지 않고 그냥 그를 시류를 잘 읽는 얄팍한 사람 취급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시 보니 그게 아니다. 한 수 위가 아니라 열 수는 위겠다.
한문 실력만이 아니다. 우리말 실력도 한참이나 뛰어나다. 문장을 다루는 기술도 나름의 경지를 갖추고 있다. 단타로 끊어치는 힘, 그의 글이 가진 매력이다. 짧으면서도 울림이 있다. 여기서 나는 분명코 반성을 한다.
그가 골라낸 120 문장도 괜찮다. 좋은 글 뽑아낸 그가 고맙다. 물론 그냥 맹맹한 글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나의 낮은 수준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부턴 좋았던 부분들을 옮긴다. 나의 건방을 반성하면서.
"난초 하나 바위 하나가 별을 따기보다 어렵더군요"
얼마나 정성을 들였으면 별 따기 보다 어렵다고 했을까. 그러나 "그러다가 문득 마음이 환하게 열리면, 컴퓨터의 속도가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신명을 따라잡지 못한다. 몇 날, 혹은 몇 달을 답답하게 꽉 막혀 있던 생각의 봇물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자신도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예술을 한다는 것, 학문을 한다는 것, 인생을 산다는 것은 불현듯 다가오는 그 짧은 격정의 순간을 위한 기다림이기도 하다." 그 짧은 격정의 순간, 나 역시 기다리는 바이다.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툭 터진 허공은 철옹성보다 더 뚫기가 어렵다." 자를 수는 있어도 모으긴 힘들다. 허공과의 싸움은 확산이 아니라 수렴이다. 이것 저것 욕심 벌여 놓기만 하는 나, 수렴이 필요하다.
"나는 공부하며 놀고, 누구는 노래하며 놀며, 누구는 돈을 세며 논다." 각자의 기준과 관심이 다름을 말하고 있다. 각자의 가치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나는 공부하며 논다는 말에서 동질감 혹은 부럼움을 느낀다.
"나는 무엇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될까?" 정말 그렇네. 나는?
"자기를 온전히 잊는 몰두가 없이 이룰 수 없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잊는다는 것은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자체로 좋아서,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 한다는 말이다." "미치지 않고는 안 된다. 적당히 해서는 이룰 수가 없다. 남들 하는 대로 해서는 희망이 없다."
"병법에는 불가기(不可欺), 즉 속일 수 없는 지장(智將)과 불인기(不忍欺), 곧 차마 못 속이는 덕장(德將)가 불감기(不敢欺) 즉 감히 못 속이는 맹장(猛將)으로 지휘관을 나눈다. .....너무도 똘똘해서 속여먹을래야 속일 수가 없었다던 유성룡보다 차마 속이지 못하는 이원익에게 자꾸 정이 간다."
"하나 하나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뜨리는 것은 한 순간이다. 선행을 쌓아 덕망을 갖추기는 쉽지 않지만, 한순간의 실수는 평생 이룬 것을 한꺼번에 무너뜨린다."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내일도 없고 다름도 없다. 다만 오늘과 지금 여기가 있을 뿐이다. 그러자면 손가락질과 질시가 따른다. 뼈에 새기는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그 손가락질, 그 질시를 달게 받을망정 아까운 시간을 허송하는 것만은 견딜 수가 없다. 공부는 이런 마음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 갈 길이 바쁜데, 남의 일에 공연히 기웃거릴 시간이 없다. 목숨 걸고 해도 될까말까한데 느긋하게 되는 대로란 참을 수 없다."
결국 뭐냐? 우리 고전에서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을 골라낸 것인가? 아니 내가 그런 처지여서 그런 구절들만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참 나이 먹어서 이렇게 공부하면 살 줄이야 생각이나 해 봤겠나.
죽비 소리까지는 못 되어도 그래도 행복한 글 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