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록
김지수 옮김 / 전남대학교출판부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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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생명의 삼보, 정(精)·기(氣)·신(神)

김지수 옮김, <불가록>, 2002, 전남대학교 출판부.



여러 가지로 황당한 점이 있긴 하다. 이런 책이 대학출판부에서 나온 것도 그렇고, 또 옮긴이 김지수라는 사람의 약력도 그렇고, 내용 또한 그렇다.
핵심은 성욕의 절제다. 언제부터인가 도 닦는다면서 이런 부분의 책에도 관심을 가졌었는데, 솔직히 이 책은 너무 단순하다. 성욕 절제를 위해 여러 황당한 설화, 권선징악적 이야기 등이 유치하게 나열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그른 것은 아니다.
다음은 옮긴이의 말이다. “남녀의 결합은 본디 새 생명을 낳아 종족을 보존하라고 부여된 자연스런 본능입니다. 생명만큼 신비스러운 게 없는데, 그 생명을 이루기 위해 결합하는 정자와 난자는 또 얼마나 신비스럽고 소중하겠습니까? 따라서 생명체의 몸에서 정자와 난자를 만드는 데, 생명체의 정수만 뽑혀 동원될 것은 자명합니다. 생명 에너지의 엑기스가 총동원됩니다.”
맞는 말이다. 현대의 성 관념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몸과 마음의 수양을 강조하는 동양적 전통에서 보면 분명 그렇다.
그런데 왜 책 이름이 ‘불가록’인가? 글로 쓸 수 없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번양의 붕태사가 편집한 것을 다시 운간의 사한운이 재판하여 전해오다가 중화민국 초기(1927년)에 인광대사가 이 책의 가치를 알고 불자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위해 널리 보급할 목적으로 펴냈다고 한다. 그 때 펴낼 때의 이름은 <수강보감(壽康寶鑑)>으로 했다고 한다. 성 문제를 건강과 장수의 관점으로 보면서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어쨌든 내가 여기서 챙길 것은 생명 에너지의 신비로운 승화 과정에 대한 것이다. 수행, 수양의 과정에서 볼 것들이다. 도교에서 하는 말이 있다. “정혈을 단련하여 원기로 승화하고(煉精化氣), 원기를 단련하여 정신 광명으로 승화시키며(煉氣化神), 다시 그 정신 광명을 단련하여 우주 태허(太虛)로 되돌아간다(煉神還虛)”라는 명제다.
어려운 과정이지만 실천하고 싶다. 한주훈 선생님도 늘 하시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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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쌀 한 알 -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최성현 지음 / 도솔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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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성현, <좁쌀 한 알 장일순>, 도솔, 2004.




부제가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이다. 그런 만큼 책 안에는 그의 글씨와 그림이 많다. 책을 단 한 권도 남기지 않는 장일순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글씨와 그림은 많이 쓰고 그려줬다. 그나마 그의 흔적이 그렇게라도 남으니 좋다. 글씨라는 것도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삶의 깊은 의미를 쉽게 전달하는 좋은 글귀를 담았으니, 그가 남긴 저서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사상은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정호경 신부가 장일순과의 대화 중에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는 구절, 즉 8만대장경을 가장 짧게 요약한 ‘不求外相 自心返照’(밖에서 찾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보라)‘라는 글씨와 난초 그림, 이런 좋은 작품들이 책에서 계속 등장하고 있기에, 그가 직접 쓴 저서가 없다고 하더라도 전혀 아쉽지 않다.
이 책은 최성현이 2년여를 돌아다니며 장일순과 대화했던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그리고 그 대화 내용에 어울리는 장일순의 글씨, 그림 작품을 알맞게 배치해 놓았다. 넉넉하면서도 흡족한 편집, 그리고 내용. 더 없이 좋은 책이다.

그러나 장일순은 내가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너무 큰 산이다. 그래서 따라 배워야겠다는 생각보다 먼발치서 그저 존경의 마음만을 보내게 된다. 그러려고 읽는 책은 아닐진대.

가르침은 크다. 하지만 그걸 배울 그릇은 작다. 그래서 문제다. 그래도 항상 담도록 노력은 해야겠다.
가르침의 가장 큰 핵심은 ‘밑으로 기어라’다. 자신을 낮추라는 말이다. 이건 문익환 목사님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문목사님이 성경 구절 중에 가장 좋아했던 대목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라고 한다.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그 분들이 가르침은 바로 그것이다. 밑에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그들을 섬기며 살라는 것이다.
근데 이게 쉽지가 않다. 조그만 주변에서 추켜 줘도 고개가 뻣뻣해진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안달이다.
무엇이 달라서 그런 걸까? 이건 앞에 정호경 신부가 좋아했다는 구절, 거기에 답이 있는 것 같다. 중심이 서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相 즉 외형, 외부, 껍데기, 겉의 화려함, 황금, 학벌, 지위, 금력, 명예 등의 것에 진리는 있지 않고, 바로 내 안에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힌두 철학에서 말하는 시바 신에게로의 귀의와 같다. 자기중심이다. 자기중심이 서 있기에 남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랬기에 한껏 자신을 낮출 수 있었을 것이다. 자기중심이 없는 사람일수록 주변에 휘달리기 쉽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선 금권 앞에 무너진다. 주와 종의 관계도치다. 사람이 相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相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진대,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장일순을 따라 살진 못하겠지만, 최소한 이 가르침 하나라도 항상 염두에 두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물론 그것만이 그의 가르침의 전부는 아니다. 너무 많고 크고 깊어서 엄두가 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고 복잡한 것도 아니다. 아주 단순하다. 버려라, 내려가라. 그것이다. 단지 그걸 실천하기 어려울 뿐이다.
그래도 나를 가다듬기 위해 좋은 대목을 몇 옮긴다.

민중은 삶을 원하지 이론을 원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정당이나 정치 따위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간디와 비노바 바베의 실천 실례에서 배우자. 종교로 우회할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사회변혁의 열정 이외에 영혼 내부의 깊은 자성의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1965년 3년 간의 옥고를 치루고 나와서 김지하에게 한 말)

그의 난초 치기는 박정희 덕에 가능했다고 한다. 물론 어릴 때부터 붓글씨를 혹독하게 공부했으니 그 흐름이 있긴 했겠지만, 어쨌든 박정희를 용서하는 마음을 기르면서 난을 공부했다고 한다.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오른다’고 말하던 사람이 감옥에 갔다 오고는 변했다. ‘물결을 따라 흐를 줄 알게 됐다’라고 말이다. (아내 이인숙의 말)

인물이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그건 결국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인간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보통 인물이라고 하면 기운 세고, 머리 좋고, 권세 있는 사람인데, 알고 보면 그런 인간들 때문에 세상이 허덕여왔습니다. 장선생님이 말하는 제일 좋은 삶이란, ‘자기 새끼 데리고 이웃 사람과 친화하면서 평화롭게 사는 것’말고 무엇이겠습니까?(김종철의 기억)

도 닦기 좋은 곳이 세 군데 있다고 한다. 첫째는 선방이고, 둘째는 감옥이고, 셋째는 병원이라 한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아, 수행 하라는가 보다’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는 게 좋다. 그것을 장일순은 ‘바닥을 기어서 천리를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그만의 언어를 써서 표현했다. 납작 엎드려서 겨울을 나는 보리나 밀처럼 한 세월 자신의 허물을 닦고 가다보면 언젠가는 봄날이 온다는 것이다. 겨울에 모가지를 들면 얼어 죽는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의 종이고자 했다.... 절대 설교를 하려 들지 않았다. “애덕으로 해, 그러면 돼” 애덕, 요컨대 사랑과 덕으로 하라는 거였는데, 장일순이야말로 그랬다. 판관이 되는 법이 없었다. 그냥 동료가 되어 주었다. 한패가 되어 주었다. 장일순과 있다 보면 편안한 가운데 어느새 마음이 밝아지고는 했다.(나는 여기서 ‘판관이 되는 법이 없었다’라는 대목을 아프게 읽는다. ‘애덕’으로. 내가 진실로 많이 갖춰야할 덕목이다)

“농민들 앞에서 기란 말이야. 울쭐대지 말란 말이야. 겸손한 마음으로 기어라. 지도자인 척하지 말라 이 말이야.”

“물론 모순이 있는 일에 협력해서는 안 되지. 그런데 방법적으로는 아주 부드러워야 할 필요가 있어. 부드러운 것만이, 생명이 있는 것만이 딱딱한 땅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거든..... 사회를 변혁하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 상대를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하거든. 무시하고 적대시하면 더욱 강하게 나오려고 하지 않겠어?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면 다르다는 것을 적대 관계로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혁명이라는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라오. ....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어서는 안 되지요.”

“사람들이 비폭력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제들이 투쟁을 통해서 해결되리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현실성이 없는 순진한 생각이라고 나는 본다.”

밥상에 무엇이 올라오느냐는 장일순에게 전혀 문제가 안 됐다. 여러 번 보았다. 밥을 먹기 전에 밥상을 향해 잠시 고개를 숙이던 모습을.

예들 들어 적이라도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빌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얻어야 하는 것은 누굴 이기는 게 아니라 평화로운 삶이기 때문이다.

“자꾸 떨어져도 괜찮다. 떨어져야 배운다. 댓바람에 붙어버리면 좋을 듯싶지만 떨어지며 깊어지고, 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법이다. 남 아픈 줄도 알게 되고....”

隨處作主 立處皆眞(어디서나 제 안의 주인공을 잃지 않으면 어디에 사나 참되리라) 임제선사의 <임제록>에서

조주선사는 ‘사람들은 24시간 부림을 당하지만 나는 그 24시간을 부린다’라는 글을 남겼는데, 어디서나 주인 의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뜻도 되리라. 24시간을 부린다.....

잘 쓸려는 생각을 싹 버린 마음으로 쓰라는 것이었지요. 거기 생각은 하나도 없고 다만 정성만이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요.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생각이 들면 바로 붓을 꺾어야 돼.”

그러나 보복, 증오, 복수는 계속 순환하여 반복될 뿐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보편적인 법칙이다. 화해는 우리가 일체의 권리와 조건들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적대자들 가운데서 우리 자신들을 본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적대자는 무지함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우리 자신들 또한 많은 일들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사랑이 넘치는 자비와 올바른 자각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스코트 헌트가 짓고 김문호가 우리 글로 옮긴 <평화의 미래>에서)

“공모전에 작품 내지 마라. 인간이 주는 상이 무에 그리 대단하냐”
공모전에서 대통령상을 받고 서실을 내면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올 테고, 대학 서예학과에서 교수로 와달라고 굽실거릴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 물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거기서 성장이 멈추기 쉽다. 어떤 계파든 계파에 속하게 될 것이고, 이권 다툼에도 끼게 될 것이다. 제자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다들 그렇듯이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다. 끊임없이 계속해야 하는 뼈아픈 자기 갱신을 팽개치고 명예 속에서 조금씩 썩어가는 것이다.

유홍준이 장일순의 작품을 평가하면서 청나라 때 문인화가 청판교의 글을 인용한 대목.
“무릇 내가 난초를 그리고, 대나무를 그리고, 돌을 그리는 것은 천하의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함이지, 천하의 편안하고 형통한 사람들에게 바치고자 함이 아니다.
凡吾畵蘭畵竹畵石 用以慰天下之勞人 非以供天下之安享人也

책읽기를 마치며: 책의 핵심은 ‘기어라’겠지만 나는 그 이전에 그렇게 길 수 있으려면 어떤 게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相에 휘둘리지 않고 내 안에서 찾는 것이다. 계속되는 ‘자기중심’이다. 남의 눈을 의식해 살면, 주객이 전도된다. 인생이 객을 위해 주가 늘 따라다니는 것밖에 안 된다. 그 객이라는 놈이 괜찮다면 모르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신이요, 헛된 명예요, 남을 괴롭히는 권력일 뿐이다. 그걸 추종하자고? 相에 휘둘리지 말아야겠다. 옳은 길을 찾아 정성을 다해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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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7
이철수 지음 / 삼인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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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철수, <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 삼인, 2004.



이철수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그의 그림을 봤었고, 또 그의 글을 읽었었지만, 책으로 단정히 묶인 것만을 오롯이 본 것은 처음이지 싶다.

우선 맑다. 그러니 그의 글을 읽으면, 아니 그의 판화를 보면 마음이 평화로와진다. 특히 속도 경쟁의 세속 세계에서 그의 메시지를 접할 땐 그 기쁨이 더욱 커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려내는 세계가 뭐 달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건만 선승같은 이미지로 선의 세계로 안내하는 듯한 이미지로 사람을 사로 잡는다.

그래서 인가 나는 그를 보면 지친 영혼들을 달래주는 성직자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이번 책도 그랬다. 편안하고 고요해서 자연스레 '평화'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예전보다는 좀 간지러워지고 있다는 느낌도 조금은 들었다. 단호하면서도 따뜻하기보단, 너무 편하게 작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해졌다. 골기가 많이 빠진 것 같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미덕이, 그의 따스한 관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비워라. 더 큰 기쁨은 비움에 있다. 계속햇서 그는 이것을 말하고 있었다. 겨울에서 시작하여 가을까지 판화에 짧지만 울림 큰 편지를 적어 넣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이런 편지를 쓸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 편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겠다.

"아직 미끄러운 날, 외출하는 제 목에 찬 바람이 들어가지 말라고 아내가 목도리를 둘러주었습니다. 조심하라고 천천히 잘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목도리보다 그 말 몇 마디가 훨씬 따뜻했습니다.
인연 따라 한 지붕 아래 한 이불 속에 살아가는 부부간이란 게 따지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그렇게 살갑게 살피고 챙겨주는 것은 마음이지요. 그 마음을 고맙게 받고 나가면서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18쪽)

"언제난 스쳐가는 바람처럼 여기고, 오고가는 감정을 지나가게 두어야 합니다. 붙잡지 말고 두어야 합니다. 갈 때는 가라하고, 올 때는 오라해야 합니다. 당신은 조용히, 오고가는 마음을 지켜보는 텅 빈 존재가 되어도 좋습니다."(21쪽)

"세상에 좋은 일 많이 해도 좋지요, 그보다 더 좋은 건, 나늘 것 없이 적당히 가난한 살림살이가 아닌가 합니다. ............시대의 숨 가쁜 변화를 쫓아가지 못해 낙오하는 우리들의 자화상 같았습니다. 천천히 내 호흡대로 살아가고 싶었습니다."(25쪽)

"눈.
목욕.
찌개 한 냄비
더운 밥 한 그릇.

그렇게
하루가 저물다.
누가 여기
무얼 더 보태시겠는가?"(35쪽)
- 이 구절은 마치 추사가 운명하기 얼마 전에 썼던 '대평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과 유사한 대목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사람들은 작은 것을 보고 있다.
작은 것들에게 세심한 눈길을 주는 사람들은 세상보다 먼저 자신이 아름답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대개 그랬다.
큰 것을 보는 데는 힘이 필요한가 보다. 그 힘이 욕심 사납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지만, 아이들처럼 순진하고 착하기도 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기쁘게 하기도 하고 힘을 내게 하기도 한다. 작은 것을 보는 데는 그 마음을 얻는 게 필요하겠구나.
키 낮은 마음. 따뜻하고 다정한 그 마음."(41쪽)

"몸은 바지런히 움직이고 마음은 조용하고 평안하시기를....."(57쪽)

"이제 '가난'도 배우고, '기품있는 가난'도 생각해 보아야 할 때가 된 듯합니다. 많이 쓰고 많이 갖추어서 되는 품위도 있지만, 비우고 가벼워져야 얻는 기품도 있는 것 아시지요?
바람이 참 좋은 날입니다."(59쪽)

"비와 바람이 때맞추어 내리고 불어주면 하늘이 도왔다고 기뻐하는 것, 농사지어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먹고 쓰는 것을 지갑에 든 돈으로 다 해결하다 보면, 그 마음이 이해하기 어려운 관념이겠지만, 이제 자연의 순환이 심각한 난조를 지나 재앙의 수준이 되고 있으니 하늘의 표정도 살펴야 할 때가 되었지요?
함부로 낭비하고 사는 삶의 행태를 다시 생각해 볼 때 되었습니다."(81족)

"어머니, 당신의 평생을 제 자양을 삼아 살았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제게 주셨지요. 당신들의 생애는 텅 빈 것이셨지요? 자식들이 당신 생애 수확의 전부셨지요?
아무것도 드리지 못하고 오늘도 지냈습니다.
늦은 밤에 당신의 삶에 깃든 회한과 보잘 것 없는 보람을 생각합니다.
당신을 마음 다해 사랑합니다. 이 마음만 진실입니다.
남은 생애가 따뜻하고 아름다우시라 빌겠습니다. 어머니."(94쪽)

"존재가 깊고 아름다우니 맺힌 봉오리 같고 벌어진 꽃송이 같습니다.
사람이 깊으면 꽃도 같아 보이고 별도 같아 보이고...."(120쪽)

"자주는 아니더라도 몸과 마음을 텅 비우고 조용히 쉬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온갖 화제와 '뉴스'에서도 놓여나고, 쉼 없는 일, 과제, 역할 따위에서도 놓여날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적어도 세상 일로 옆을 돌아볼 수 없이 바삐 돌아치는 것에서는 비켜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끔이 여려우면 잠시라도 그런 깊은 멈춤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하지요."

"나뭇가지 하나 들고 오랫동안 해본 생각입니다.
초록의 여린 잎 하나
우리 시대의
새로운 깃발이 되어도
좋지 않은가?
숲 속에 그 많은
작은 잎들."(147쪽)

"어김없어서 잎 지는 계절에는 저를 내려 놓을 줄 알고, 추워질 겨울을 준비합니다.......소나무는 늘 푸른 나무라지만 그도 낙엽을 떨구는 것 아시지요? 버리지 않고 새로워질 수는 없는 법이라고 이야기해주는 듯 합니다. 바람이 나무들의 마음 비우기를 짐짓 거드는 것 같기도 하구요."(175쪽)

봐라, 꽃이다. 아니 철수다. 아니 자연이다. 버릴 때 버리는 것. 비울 때 비울 수 있는 것, 나도 철수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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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 Gandhi
요게시 차다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길사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요게시 차다, <마하트마 간디>, 한길사, 2001.



850쪽이 넘는 책이다. 그래서 늦어졌던 것만은 아니다. 방학이 시작되었지만 일이 많았다. 긴장은 풀렸는데 일이 많아지자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끌었다. 그러고 보면 새해(2005년)들어 처음 쓰는 책일기인 셈인가?

진작부터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니 동구권의 몰락이니 하는 말이 나온 후부터 남들은 포스트모던을 찾았지만 나는 동양의 그 무엇을 찾으려고 애썼다. 국사선생이어서 그랬는지 처음엔 한국에서 찾을려고도 했지만 5년전부터 시작한 요가가 인도를, 그리고 간디를 다시 내게 모셔다 주었다.

사실 네루의 책은 읽어보았으나, 간디와 관련된 것은 아주 단편적인 소개만을 접했을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늘 '간디'를 외고 다녔건만, 아니 그래서 더욱 간디를 가까이 하기 어려웠다. 한 번 차분하게 긴 시간을 가지고 연구하고 본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도 없었다. 차분하게 긴 시간이라는 게 특별히 따로 마련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다. 간디의 본 이름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그가 마하트마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요게시 차다는 인간 간디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한겨레 신문 서평란에 소개된 제목처럼 어쩌면 '범인' 간디에서 '성인' 간디까지 다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간디의 인간적 한계는 다양하다. 가족 안에서 그리고 때론 정치판에서 보여지는 독선,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정욕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는 37세에 금욕을 선언하고 일체의 성적 접촉을 자른다. 하지만 그는 70세가 되어서도 그 문제 때문에 고민했던 모양이다.
"내 경우엔 성적인 감각을 극복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투쟁이었지요. 내가 그 투쟁에서 살아남은 것은 기적입니다"라고 했을 정도다. 그리고 때론 "전혀 정열을 정복하지 못했"음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게 솔직한 간디이며 인간으로서의 간디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솔직함과 함께 지독하리만치 브라마차리아(금욕)을 실천한다.
"노예가 자신의 족쇄에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하여 그것을 마치 귀중한 장식품인 양 끌어안으면 노예 소유자의 승리는 완전해집니다. 정욕의 정복은 인간 존재의 가장 고귀한 노력입니다. 정욕을 정복하지 못하면 인간을 자아를 다스릴 희망을 품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자신을 비워야만 신이 그를 소유할 수 있다."
"봉사에 헌신하는 삶을 갈망하는 사람은 반드시 브라마차리아를 준수해야 한다. 또 하나는 자발적으로 늘 가난을 벗삼고 살아야 한다."
"몸은 신의 통제 아래 있을 때는 보석과 같다. 그러나 악마의 통제로 들어가면 쓰레기 구덩이가 된다. 쾌락에 탐닉한다면, 하루 종일 몸을 썩게 만드는 온갖 종류의 음식을 먹는다면, 악취를 풍긴다면.......몸은 지옥보다 나빠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간디의 힘은 사티아그라하(진리의 힘)이다. 아힘사(비폭력)이라고 알려진 그것이 사실 간디의 삶에서는 핵심이다. 그의 이 사상은 톨스토이, 소로 등에게서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다음은 소로의 말이다.
"시작은 아무리 작아보이더라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한번 제대로 이루어진 일은 영원히 이루어진다."
"고립 가운데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용기와 내적인 힘을 얻었다."

다음부터는 간디의 말이다.
"사티아그라하는 두려움에 작별을 고합니다. 따라서 적을 신뢰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설사 적이 스무 번 거짓을 말하더라도, 사티아그라하는 스물 한 번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암묵적 신뢰가 이 신조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규제에 굴복한다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굴복합니다. 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런 굴복이 공동의 복리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모든 생명의 정해진 끝입니다. 병이나 어떤 다른 방법에 의해 죽지 않고 형제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고 해서 내가 그것을 더 슬퍼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내가 나를 공격한 사람에 대한 분노나 증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의 영원한 행복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나를 공격한 사람도 나중에는 완전한 깨끗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용기는 오랜 기간에 걸쳐 깊은 고난을 겪는 것이다. 이것만이 진정으로 용감한 행동이며, 여기에는 신중한 숙고가 앞서게 마련이다."

그의 비폭력 노선에 반대하여 적극적인 저항과 테러를 주장하던 사바르카르에 대해서 그는
"그런 살인이 인도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고 또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무지한 자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반역 행위는 절대 나라에 유익을 줄 수 없다. 그런 살인적 행동들의 결과로 영국인들이 떠난다 한들, 누가 그 다음에 통치를 하겠는가? 유일한 답은 살인자라는 것이다. 인도는 살인자들의 통치에서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살인자들이 흑인이건 백인이건 관계 없다."
"많은 사람들은 영국인들에 대항하여 무기를 사용한다는 생각을 환영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지와 이해 부족을 보여줄 뿐이다. 만일 모든 영국인들을 죽인다면 그들을 죽인 사람들이 인도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 결과 인도는 여전히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영국인들을 죽인 사람들의 새로운 목표물은 이제 인도인 동포가 될 것이다."

"어떤 물건은 그것을 얻은 수단을 통해서만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자연의 법칙이 있다. 폭력에 의해 얻은 것은 폭력으로만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진리에 의해 얻은 것은 진리로만 유지할 수 있다."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도울 수 없다. 진리를 위한 이 투쟁은 오직 자정과 자립으로만 이루어진다. 품성이라는 자본 없이는 불가능하다. 화려한 궁궐도 사람들이 떠나면 폐허로 보이듯이 품성이 결여된 사람은 아무리 물질적 소유가 풍부하더라도 망한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폭력이 짐승의 법이듯이 비폭력은 인간의 법이다. 비폭력이란 고통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악을 행하는 자의 의지에 온순하게 굴복한다는 뜻이 아니라 압제자의 의지에 맞서는 일에 자신의 온 영혼을 바친다는 뜻이다."
"두려움 없는 태도를 맹세한 사람은 절대 힘에 의존하지 않고 늘 영혼의 힘으로 자신을 방어하겠다고 맹세해야 한다. 영혼의 힘이란 사타아그라하를 실천에 옮기도록 훈련받은 사람의 무기로, 곧 진리와 사랑의 힘이다."

"압제자가 통치하는 곳에서는 감옥이 궁궐이 되고 궁궐이 감옥이 됩니다. 정부에 선언하십시오, 당신들은 우리를 교수대에 걸 수 있고 당신들은 우리를 감옥에 보낼 수 있지만 우리로부터 협조를 얻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맥없는 비폭력을 말하진 않았다. 굴종이 아니라 자발적 감싸기인 셈이다. 악마저도 원수마저도 포용해버리는 것이다. 거기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폭력보다도 더 한 용기말이다.
" 겁과 폭력 둘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폭력 쪽을 권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폭력이 폭력보다 무한히 나으며, 용서가 벌보다 남자다운 것이라고 믿는다. 용서는 병사의 아름다운 장식물이지만 벌을 줄 힘이 있을 때 자제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다. 무력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용서는 의미가 없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마라. 힘은 육체적 능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불굴의 의지에서 나온다."
"나는 인도가 약하기 때문에 인도에게 비폭력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도가 자신의 힘과 권능을 의식하면서 비폭력을 실행하기 바란다. 자신의 힘을 께닫는 데는 무기의 훈련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그런 훈련이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살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도에 소멸하지 않는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은 신체적 허약함을 딛고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그는 아힘사를 실천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언제나 겁보다 폭력이 낫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죽기를 두려워하고 저항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비폭력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간디의 실천은 종종 단식으로 나타났다. 종종이 아니라 아주 자주이기도 하다. 전 인생의 긴 시간을 보는 게 아니라 책 읽는 짧은 시간에서 보면 아주 자주 단식이 나온다. 간디는 독립일에도 단식과 물레질과 기도를 했다. 파키스탄(이슬람)과 분리 독립이기에 사실 생살이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의 독립이었다. 그래서 그는 단식을 했던 것이다.
"단식 없이 기도도 없으며, 기도 없이 진정한 단식도 없다. 그럼에도 음식, 심지어 물을 안 먹는 것은 단순한 시작일 뿐이며, 신에게 굴복하는 것 가운데, 최소한 일 뿐"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일반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단식을 정치적 압력의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주변의 정치가들은 간디의 단식을 "정치적 곡예"라고 조롱했지만 간디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보인다.
"그러나 단식의 압력으로는 어떤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 뭔가를 이룬다면 엄청난 비극이 될 것입니다. 영적인 단식이 기대하는 것은 마음의 정화입니다. ...그들은 내가 영혼을 위해 단식을 할 때만틈 행복할 때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단식은 지금까지 나에게 더 높은 수준의 행복을 안겨다주었습니다.

젊은 시절 돈에 대한 견해도 새삼스러울 것 없이 당연한 말이다.
"저는 돈을 버는 것이 저라는 착각을 하지 않습니다. 신이 좋은 데 쓰라고 저에게 돈을 주신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디 그처럼 실천하기가 쉬운가?

그가 몸을 돌보지 않고 너무 바쁘게 일하자 주변에서 만류하는 것은 당연하다. 때론 하루에 1시간 반만을 자면서 일을 하기도 했다. 이런 그를 주변에서 염려하자 간디는
"내일이면 나는 여기 없을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라고 답한다. 매일을 마지막 날 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를 성자라고 하는 것일 게다.

간디가 죽고 나서 그에 대한 평가들도 주목할 구석이 있다.
마운트배든 경: 고난에 시달리는 세계가 그의 고귀한 모범을 따름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영감을 얻었길 바란다"
더글러서 맥아더가 아래와 같이 말한 것은 역설이다. 믿기질 않는다. 아니면 속 따로 겉 따로 이거나. 사실 이런 놈들 때문에 나는 처음엔 간디를 서구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영웅으로 생각했었다.
"문명의 진화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힘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논쟁적인 쟁점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근본적으로 틀렸을 뿐 아니라 자체 내에 자멸의 씨앗을 담고 있다는 간디의 믿음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맥아더의 이율배반.....
런던의 <타임스>가 한 말도 특이하다.
"인도 아닌 다른 나라, 힌두교 아닌 다른 종교에서는 간디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더욱 요가와 인도에 매력을 느끼는 것인가.

마직막으로 저자는 간디의 암살범을 비중있게 다룬다. 나름의 정당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건 이전의 서술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상당히 설득력을 높였다. 암살범은 힌두 민족주의자 나투람 고드세이다. 저자는 이 암살범의 재판과정을 상세히 소개한다. 5시간에 걸쳐 읽은 93쪽의 진술서에서 암살범 고드세는 간디가 간디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진리와 비폭력의 이름으로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을 초래한 폭력적 평화주의자"이며 "오직 그만이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의 절대적 재판관이 되어버렸다"고 비판한다. 방청석의 사람들이 감동받아 눈물을 흘릴 정도로, 고드세의 간디에 대한 비판은 당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처럼 간디는 이슬람 옹호자라는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고, 비현실적 몽상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어쨌든 850쪽이 넘는 책을 이제서야 다 읽었다. 긴강이 풀린 시기에 읽어서 버겁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다시 영혼의 힘을 생각하게 했다. 아힘사의 올바름과 사티아그라하의 진정한 의미 그런 것을 다시 생각케 해 주었다.
더불어 생각한 것은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도 때론 인간적 약점이 무척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더 가까운 간디인가.
"맑스에서 간디로"
언제부터인가 나의 사상적 편력의 변화를 그렇게 발언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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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푸른숲 비오스(Prun Soop Bios) 1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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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푸른숲, 2003.


지난 여름, 방학이 다 끝나갈 무렵 나의 영원한 벗이자 동지인 오금숙이 말했다. "개학하면 바빠질 텐데, 그러기 전에 더 놀자. 서귀포에 있는 수련이나 만나러 갈까?"
이 책과의 인연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서귀포의 수련이는 서귀포에서 요가지도를 하는 요가로 말하자면 나의 선배이자 도반이자 안내자이고, 세속에서 말하자만 잘 아는 후배다. 한때 학생운동도 사회운동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었다고 하는데, 그 뒤 많이 망가진 몸과 마음을 요가를 통해 새로 곧추 세웠다는, 어쩌면 참 고마운 후배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서귀포를 찾아갔다. 수련시간이 아직 다 끝나지 않은 것 같아 동네 분식집에서 떡볶기를 먹고 있었다. 그때 텔레비젼에선 아마 한국의 유승민이라고 하는 탁구선수가 중국선수를 이기고 올림픽 금메달을 따던 그런 흥미진진한 경기가 벌어질 때였지, 아마.
암튼 우린 그 경기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수련이네 요가원으로 들어갔다. 유승민의 탁구경기보다 수련이의 최근 근황을 알고 싶었고, 또 얼굴고 보고 싶었고, 또 좋은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다.

많이 기다렸다고 한다. 나름대로 준비한 음식과 차를 나누며 이러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곤 집으로 가려고 할 때 내밀던 책이 바로 이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와 <혁명가 붓다>다. 돌아와선 바로 주문을 했고, 나의 서재에 꽂혀 있는 많은 책들과 유사하게 한동안 책장을 장식만 하고 있었다.
수련이는 그 어떤 책보다 다시말해 내가 대학원 다니며 허겁지겁 보고 있는 책보다 먼저 이 책부터 보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럴 수야 있나, 하루만 빼 먹어도 대학원 수업 따라가지 못하는 처지에.

그렇게 미뤘다. 그러던 책을 최근에야 잡은 것이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아니다. 기말 리포트 생각하면 골이 쑤신다. 그런데도 어찌 시간을 내었느냐 하면 바로 그 골 쑤시는 걸 줄여보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다.

근데, 수련이가 말한 것 같은 감동은 전혀 오지 않는다. 내공 차이? 놓여진 환경의 차이? 아니면 전생부터 이어오는 근기의 차이?

암튼 어렵다. 내용 이해도 어렵고 기껏 내용을 이해해도 실천할 생각을 하면 까마득하다. 당연하지. 부처의 삶을 어찌 내가 따라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그냥 글자 구경만을 한다면 그것 또한 무의미한 독서이지 않은가.

들어오는 내용은 이거다.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그게 해탈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엑스타시라는 용어도 그 어원으로 보면 '나에게서 벗어난 상태'라는 것이다. 맞는 것 같다. 나에게서 벗어남이라, 나 중심에서 벗어남이라?
어렵다. 이해는 될 듯 하면서도 삶을 그렇게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다. 물론 이타적 삶, 봉사하는 삶 등으로 연결시키면 내가 끼어들 구석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것을 훨씬 넘는 경지다.
그래도 뭐, 내가 갈 수 있는데 까지만 가야지. 오히려 정직하게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노력하는 게 더 옳을 수도 있겠다.

"아힘사(해치지 않음)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수행자는 단지 폭력을 피하는 데 그치지 말고,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행동해야 한다. 나쁜 의지를 가진 감정들을 조금이라도 싹트는 것을 막기 위해 자비에 대한 생각들을 키워나가야 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올바른 말'을 하고,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말만 하는 것, '추론을 거친, 정확한, 분명한, 유익한'말만 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빅쿠는 도둑질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이든 보시로 주는 것에 기뻐하고 개인적인 선호를 드러내지 않아야 하며 최소한의 것만 소유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남들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거룩한 삶은 단지 깨달은 자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닙바나는 빅쿠가 이기적으로 혼자만 간직하는 보답이 아니다. 그들은 민중을 위하여 다수의 복지와 행복을 위하여, 온 세상에 대한 동정심으로 신과 인간들의 선과 안녕을 위하여 담마를 살아야 한다."

붓다, 그가 열반에 들기 전 마지막 말인가 이것은.
"모든 개별적인 것들은 지나갑니다. 부지런히 자신의 해방을 구하십시오."

책 마지막의 시로 글을 마친다.
"바람에 꺼진 불이
쉼을 얻어 규정되지 않듯이,
깨달음을 얻어 자아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쉼을 얻어 규정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형상들을 넘어선 곳으로 갔다.
말의 힘을 넘어선 곳으로 갔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나를 넘어서는 것, 세상 사물에 집착하지 않고 넉넉하게 바라보면서 나를 넘어서는 것, 그것은 내가 세상을 넘어서기 위해 먼저 해야할 일이었다. 나를 넘어서는 것.


아 참. 그리고 수련이는 또 다시 인도로 갔다고 한다. 모든 걸 정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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