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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쌀 한 알 -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최성현 지음 / 도솔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최성현, <좁쌀 한 알 장일순>, 도솔, 2004.

부제가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이다. 그런 만큼 책 안에는 그의 글씨와 그림이 많다. 책을 단 한 권도 남기지 않는 장일순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글씨와 그림은 많이 쓰고 그려줬다. 그나마 그의 흔적이 그렇게라도 남으니 좋다. 글씨라는 것도 단순한 기교가 아니라 삶의 깊은 의미를 쉽게 전달하는 좋은 글귀를 담았으니, 그가 남긴 저서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사상은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정호경 신부가 장일순과의 대화 중에 자신이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는 구절, 즉 8만대장경을 가장 짧게 요약한 ‘不求外相 自心返照’(밖에서 찾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보라)‘라는 글씨와 난초 그림, 이런 좋은 작품들이 책에서 계속 등장하고 있기에, 그가 직접 쓴 저서가 없다고 하더라도 전혀 아쉽지 않다.
이 책은 최성현이 2년여를 돌아다니며 장일순과 대화했던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그리고 그 대화 내용에 어울리는 장일순의 글씨, 그림 작품을 알맞게 배치해 놓았다. 넉넉하면서도 흡족한 편집, 그리고 내용. 더 없이 좋은 책이다.
그러나 장일순은 내가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너무 큰 산이다. 그래서 따라 배워야겠다는 생각보다 먼발치서 그저 존경의 마음만을 보내게 된다. 그러려고 읽는 책은 아닐진대.
가르침은 크다. 하지만 그걸 배울 그릇은 작다. 그래서 문제다. 그래도 항상 담도록 노력은 해야겠다.
가르침의 가장 큰 핵심은 ‘밑으로 기어라’다. 자신을 낮추라는 말이다. 이건 문익환 목사님의 가르침과도 통한다. 문목사님이 성경 구절 중에 가장 좋아했던 대목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라고 한다.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그 분들이 가르침은 바로 그것이다. 밑에 내려가서 그들과 함께, 그들을 섬기며 살라는 것이다.
근데 이게 쉽지가 않다. 조그만 주변에서 추켜 줘도 고개가 뻣뻣해진다.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안달이다.
무엇이 달라서 그런 걸까? 이건 앞에 정호경 신부가 좋아했다는 구절, 거기에 답이 있는 것 같다. 중심이 서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相 즉 외형, 외부, 껍데기, 겉의 화려함, 황금, 학벌, 지위, 금력, 명예 등의 것에 진리는 있지 않고, 바로 내 안에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힌두 철학에서 말하는 시바 신에게로의 귀의와 같다. 자기중심이다. 자기중심이 서 있기에 남들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랬기에 한껏 자신을 낮출 수 있었을 것이다. 자기중심이 없는 사람일수록 주변에 휘달리기 쉽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선 금권 앞에 무너진다. 주와 종의 관계도치다. 사람이 相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相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진대,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장일순을 따라 살진 못하겠지만, 최소한 이 가르침 하나라도 항상 염두에 두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한다. 물론 그것만이 그의 가르침의 전부는 아니다. 너무 많고 크고 깊어서 엄두가 나지 않을 뿐이다. 그렇다고 복잡한 것도 아니다. 아주 단순하다. 버려라, 내려가라. 그것이다. 단지 그걸 실천하기 어려울 뿐이다.
그래도 나를 가다듬기 위해 좋은 대목을 몇 옮긴다.
민중은 삶을 원하지 이론을 원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정당이나 정치 따위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간디와 비노바 바베의 실천 실례에서 배우자. 종교로 우회할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사회변혁의 열정 이외에 영혼 내부의 깊은 자성의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1965년 3년 간의 옥고를 치루고 나와서 김지하에게 한 말)
그의 난초 치기는 박정희 덕에 가능했다고 한다. 물론 어릴 때부터 붓글씨를 혹독하게 공부했으니 그 흐름이 있긴 했겠지만, 어쨌든 박정희를 용서하는 마음을 기르면서 난을 공부했다고 한다.
‘살아 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오른다’고 말하던 사람이 감옥에 갔다 오고는 변했다. ‘물결을 따라 흐를 줄 알게 됐다’라고 말이다. (아내 이인숙의 말)
인물이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그건 결국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인간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보통 인물이라고 하면 기운 세고, 머리 좋고, 권세 있는 사람인데, 알고 보면 그런 인간들 때문에 세상이 허덕여왔습니다. 장선생님이 말하는 제일 좋은 삶이란, ‘자기 새끼 데리고 이웃 사람과 친화하면서 평화롭게 사는 것’말고 무엇이겠습니까?(김종철의 기억)
도 닦기 좋은 곳이 세 군데 있다고 한다. 첫째는 선방이고, 둘째는 감옥이고, 셋째는 병원이라 한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아, 수행 하라는가 보다’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는 게 좋다. 그것을 장일순은 ‘바닥을 기어서 천리를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그만의 언어를 써서 표현했다. 납작 엎드려서 겨울을 나는 보리나 밀처럼 한 세월 자신의 허물을 닦고 가다보면 언젠가는 봄날이 온다는 것이다. 겨울에 모가지를 들면 얼어 죽는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의 종이고자 했다.... 절대 설교를 하려 들지 않았다. “애덕으로 해, 그러면 돼” 애덕, 요컨대 사랑과 덕으로 하라는 거였는데, 장일순이야말로 그랬다. 판관이 되는 법이 없었다. 그냥 동료가 되어 주었다. 한패가 되어 주었다. 장일순과 있다 보면 편안한 가운데 어느새 마음이 밝아지고는 했다.(나는 여기서 ‘판관이 되는 법이 없었다’라는 대목을 아프게 읽는다. ‘애덕’으로. 내가 진실로 많이 갖춰야할 덕목이다)
“농민들 앞에서 기란 말이야. 울쭐대지 말란 말이야. 겸손한 마음으로 기어라. 지도자인 척하지 말라 이 말이야.”
“물론 모순이 있는 일에 협력해서는 안 되지. 그런데 방법적으로는 아주 부드러워야 할 필요가 있어. 부드러운 것만이, 생명이 있는 것만이 딱딱한 땅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거든..... 사회를 변혁하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 상대를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하거든. 무시하고 적대시하면 더욱 강하게 나오려고 하지 않겠어?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면 다르다는 것을 적대 관계로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혁명이라는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라오. ....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어서는 안 되지요.”
“사람들이 비폭력은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제들이 투쟁을 통해서 해결되리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현실성이 없는 순진한 생각이라고 나는 본다.”
밥상에 무엇이 올라오느냐는 장일순에게 전혀 문제가 안 됐다. 여러 번 보았다. 밥을 먹기 전에 밥상을 향해 잠시 고개를 숙이던 모습을.
예들 들어 적이라도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빌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얻어야 하는 것은 누굴 이기는 게 아니라 평화로운 삶이기 때문이다.
“자꾸 떨어져도 괜찮다. 떨어져야 배운다. 댓바람에 붙어버리면 좋을 듯싶지만 떨어지며 깊어지고, 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법이다. 남 아픈 줄도 알게 되고....”
隨處作主 立處皆眞(어디서나 제 안의 주인공을 잃지 않으면 어디에 사나 참되리라) 임제선사의 <임제록>에서
조주선사는 ‘사람들은 24시간 부림을 당하지만 나는 그 24시간을 부린다’라는 글을 남겼는데, 어디서나 주인 의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뜻도 되리라. 24시간을 부린다.....
잘 쓸려는 생각을 싹 버린 마음으로 쓰라는 것이었지요. 거기 생각은 하나도 없고 다만 정성만이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요.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생각이 들면 바로 붓을 꺾어야 돼.”
그러나 보복, 증오, 복수는 계속 순환하여 반복될 뿐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보편적인 법칙이다. 화해는 우리가 일체의 권리와 조건들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적대자들 가운데서 우리 자신들을 본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적대자는 무지함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우리 자신들 또한 많은 일들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사랑이 넘치는 자비와 올바른 자각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스코트 헌트가 짓고 김문호가 우리 글로 옮긴 <평화의 미래>에서)
“공모전에 작품 내지 마라. 인간이 주는 상이 무에 그리 대단하냐”
공모전에서 대통령상을 받고 서실을 내면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올 테고, 대학 서예학과에서 교수로 와달라고 굽실거릴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 물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거기서 성장이 멈추기 쉽다. 어떤 계파든 계파에 속하게 될 것이고, 이권 다툼에도 끼게 될 것이다. 제자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다들 그렇듯이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다. 끊임없이 계속해야 하는 뼈아픈 자기 갱신을 팽개치고 명예 속에서 조금씩 썩어가는 것이다.
유홍준이 장일순의 작품을 평가하면서 청나라 때 문인화가 청판교의 글을 인용한 대목.
“무릇 내가 난초를 그리고, 대나무를 그리고, 돌을 그리는 것은 천하의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함이지, 천하의 편안하고 형통한 사람들에게 바치고자 함이 아니다.
凡吾畵蘭畵竹畵石 用以慰天下之勞人 非以供天下之安享人也
책읽기를 마치며: 책의 핵심은 ‘기어라’겠지만 나는 그 이전에 그렇게 길 수 있으려면 어떤 게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相에 휘둘리지 않고 내 안에서 찾는 것이다. 계속되는 ‘자기중심’이다. 남의 눈을 의식해 살면, 주객이 전도된다. 인생이 객을 위해 주가 늘 따라다니는 것밖에 안 된다. 그 객이라는 놈이 괜찮다면 모르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신이요, 헛된 명예요, 남을 괴롭히는 권력일 뿐이다. 그걸 추종하자고? 相에 휘둘리지 말아야겠다. 옳은 길을 찾아 정성을 다해 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