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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 Gandhi
요게시 차다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길사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요게시 차다, <마하트마 간디>, 한길사, 2001.

850쪽이 넘는 책이다. 그래서 늦어졌던 것만은 아니다. 방학이 시작되었지만 일이 많았다. 긴장은 풀렸는데 일이 많아지자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끌었다. 그러고 보면 새해(2005년)들어 처음 쓰는 책일기인 셈인가?
진작부터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니 동구권의 몰락이니 하는 말이 나온 후부터 남들은 포스트모던을 찾았지만 나는 동양의 그 무엇을 찾으려고 애썼다. 국사선생이어서 그랬는지 처음엔 한국에서 찾을려고도 했지만 5년전부터 시작한 요가가 인도를, 그리고 간디를 다시 내게 모셔다 주었다.
사실 네루의 책은 읽어보았으나, 간디와 관련된 것은 아주 단편적인 소개만을 접했을 뿐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늘 '간디'를 외고 다녔건만, 아니 그래서 더욱 간디를 가까이 하기 어려웠다. 한 번 차분하게 긴 시간을 가지고 연구하고 본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미룰 수도 없었다. 차분하게 긴 시간이라는 게 특별히 따로 마련될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다. 간디의 본 이름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그가 마하트마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요게시 차다는 인간 간디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한겨레 신문 서평란에 소개된 제목처럼 어쩌면 '범인' 간디에서 '성인' 간디까지 다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드러나는 간디의 인간적 한계는 다양하다. 가족 안에서 그리고 때론 정치판에서 보여지는 독선,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정욕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그는 37세에 금욕을 선언하고 일체의 성적 접촉을 자른다. 하지만 그는 70세가 되어서도 그 문제 때문에 고민했던 모양이다.
"내 경우엔 성적인 감각을 극복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투쟁이었지요. 내가 그 투쟁에서 살아남은 것은 기적입니다"라고 했을 정도다. 그리고 때론 "전혀 정열을 정복하지 못했"음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게 솔직한 간디이며 인간으로서의 간디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솔직함과 함께 지독하리만치 브라마차리아(금욕)을 실천한다.
"노예가 자신의 족쇄에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하여 그것을 마치 귀중한 장식품인 양 끌어안으면 노예 소유자의 승리는 완전해집니다. 정욕의 정복은 인간 존재의 가장 고귀한 노력입니다. 정욕을 정복하지 못하면 인간을 자아를 다스릴 희망을 품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자신을 비워야만 신이 그를 소유할 수 있다."
"봉사에 헌신하는 삶을 갈망하는 사람은 반드시 브라마차리아를 준수해야 한다. 또 하나는 자발적으로 늘 가난을 벗삼고 살아야 한다."
"몸은 신의 통제 아래 있을 때는 보석과 같다. 그러나 악마의 통제로 들어가면 쓰레기 구덩이가 된다. 쾌락에 탐닉한다면, 하루 종일 몸을 썩게 만드는 온갖 종류의 음식을 먹는다면, 악취를 풍긴다면.......몸은 지옥보다 나빠진다."
하지만 무엇보다 간디의 힘은 사티아그라하(진리의 힘)이다. 아힘사(비폭력)이라고 알려진 그것이 사실 간디의 삶에서는 핵심이다. 그의 이 사상은 톨스토이, 소로 등에게서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다음은 소로의 말이다.
"시작은 아무리 작아보이더라도 상관없기 때문이다. 한번 제대로 이루어진 일은 영원히 이루어진다."
"고립 가운데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용기와 내적인 힘을 얻었다."
다음부터는 간디의 말이다.
"사티아그라하는 두려움에 작별을 고합니다. 따라서 적을 신뢰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설사 적이 스무 번 거짓을 말하더라도, 사티아그라하는 스물 한 번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암묵적 신뢰가 이 신조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규제에 굴복한다 하더라도 자발적으로 굴복합니다. 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런 굴복이 공동의 복리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모든 생명의 정해진 끝입니다. 병이나 어떤 다른 방법에 의해 죽지 않고 형제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고 해서 내가 그것을 더 슬퍼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내가 나를 공격한 사람에 대한 분노나 증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의 영원한 행복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나를 공격한 사람도 나중에는 완전한 깨끗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용기는 오랜 기간에 걸쳐 깊은 고난을 겪는 것이다. 이것만이 진정으로 용감한 행동이며, 여기에는 신중한 숙고가 앞서게 마련이다."
그의 비폭력 노선에 반대하여 적극적인 저항과 테러를 주장하던 사바르카르에 대해서 그는
"그런 살인이 인도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고 또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무지한 자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반역 행위는 절대 나라에 유익을 줄 수 없다. 그런 살인적 행동들의 결과로 영국인들이 떠난다 한들, 누가 그 다음에 통치를 하겠는가? 유일한 답은 살인자라는 것이다. 인도는 살인자들의 통치에서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살인자들이 흑인이건 백인이건 관계 없다."
"많은 사람들은 영국인들에 대항하여 무기를 사용한다는 생각을 환영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지와 이해 부족을 보여줄 뿐이다. 만일 모든 영국인들을 죽인다면 그들을 죽인 사람들이 인도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 결과 인도는 여전히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영국인들을 죽인 사람들의 새로운 목표물은 이제 인도인 동포가 될 것이다."
"어떤 물건은 그것을 얻은 수단을 통해서만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자연의 법칙이 있다. 폭력에 의해 얻은 것은 폭력으로만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진리에 의해 얻은 것은 진리로만 유지할 수 있다."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도울 수 없다. 진리를 위한 이 투쟁은 오직 자정과 자립으로만 이루어진다. 품성이라는 자본 없이는 불가능하다. 화려한 궁궐도 사람들이 떠나면 폐허로 보이듯이 품성이 결여된 사람은 아무리 물질적 소유가 풍부하더라도 망한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폭력이 짐승의 법이듯이 비폭력은 인간의 법이다. 비폭력이란 고통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악을 행하는 자의 의지에 온순하게 굴복한다는 뜻이 아니라 압제자의 의지에 맞서는 일에 자신의 온 영혼을 바친다는 뜻이다."
"두려움 없는 태도를 맹세한 사람은 절대 힘에 의존하지 않고 늘 영혼의 힘으로 자신을 방어하겠다고 맹세해야 한다. 영혼의 힘이란 사타아그라하를 실천에 옮기도록 훈련받은 사람의 무기로, 곧 진리와 사랑의 힘이다."
"압제자가 통치하는 곳에서는 감옥이 궁궐이 되고 궁궐이 감옥이 됩니다. 정부에 선언하십시오, 당신들은 우리를 교수대에 걸 수 있고 당신들은 우리를 감옥에 보낼 수 있지만 우리로부터 협조를 얻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맥없는 비폭력을 말하진 않았다. 굴종이 아니라 자발적 감싸기인 셈이다. 악마저도 원수마저도 포용해버리는 것이다. 거기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폭력보다도 더 한 용기말이다.
" 겁과 폭력 둘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폭력 쪽을 권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폭력이 폭력보다 무한히 나으며, 용서가 벌보다 남자다운 것이라고 믿는다. 용서는 병사의 아름다운 장식물이지만 벌을 줄 힘이 있을 때 자제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다. 무력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용서는 의미가 없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마라. 힘은 육체적 능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불굴의 의지에서 나온다."
"나는 인도가 약하기 때문에 인도에게 비폭력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도가 자신의 힘과 권능을 의식하면서 비폭력을 실행하기 바란다. 자신의 힘을 께닫는 데는 무기의 훈련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그런 훈련이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살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도에 소멸하지 않는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은 신체적 허약함을 딛고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그는 아힘사를 실천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언제나 겁보다 폭력이 낫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죽기를 두려워하고 저항할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비폭력을 가르칠 수는 없었다.
간디의 실천은 종종 단식으로 나타났다. 종종이 아니라 아주 자주이기도 하다. 전 인생의 긴 시간을 보는 게 아니라 책 읽는 짧은 시간에서 보면 아주 자주 단식이 나온다. 간디는 독립일에도 단식과 물레질과 기도를 했다. 파키스탄(이슬람)과 분리 독립이기에 사실 생살이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의 독립이었다. 그래서 그는 단식을 했던 것이다.
"단식 없이 기도도 없으며, 기도 없이 진정한 단식도 없다. 그럼에도 음식, 심지어 물을 안 먹는 것은 단순한 시작일 뿐이며, 신에게 굴복하는 것 가운데, 최소한 일 뿐"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일반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는 단식을 정치적 압력의 수단으로 보지 않았다. 주변의 정치가들은 간디의 단식을 "정치적 곡예"라고 조롱했지만 간디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보인다.
"그러나 단식의 압력으로는 어떤 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해서 뭔가를 이룬다면 엄청난 비극이 될 것입니다. 영적인 단식이 기대하는 것은 마음의 정화입니다. ...그들은 내가 영혼을 위해 단식을 할 때만틈 행복할 때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단식은 지금까지 나에게 더 높은 수준의 행복을 안겨다주었습니다.
젊은 시절 돈에 대한 견해도 새삼스러울 것 없이 당연한 말이다.
"저는 돈을 버는 것이 저라는 착각을 하지 않습니다. 신이 좋은 데 쓰라고 저에게 돈을 주신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디 그처럼 실천하기가 쉬운가?
그가 몸을 돌보지 않고 너무 바쁘게 일하자 주변에서 만류하는 것은 당연하다. 때론 하루에 1시간 반만을 자면서 일을 하기도 했다. 이런 그를 주변에서 염려하자 간디는
"내일이면 나는 여기 없을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라고 답한다. 매일을 마지막 날 처럼 살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를 성자라고 하는 것일 게다.
간디가 죽고 나서 그에 대한 평가들도 주목할 구석이 있다.
마운트배든 경: 고난에 시달리는 세계가 그의 고귀한 모범을 따름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영감을 얻었길 바란다"
더글러서 맥아더가 아래와 같이 말한 것은 역설이다. 믿기질 않는다. 아니면 속 따로 겉 따로 이거나. 사실 이런 놈들 때문에 나는 처음엔 간디를 서구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영웅으로 생각했었다.
"문명의 진화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힘을 대량으로 사용하는 논쟁적인 쟁점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근본적으로 틀렸을 뿐 아니라 자체 내에 자멸의 씨앗을 담고 있다는 간디의 믿음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맥아더의 이율배반.....
런던의 <타임스>가 한 말도 특이하다.
"인도 아닌 다른 나라, 힌두교 아닌 다른 종교에서는 간디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더욱 요가와 인도에 매력을 느끼는 것인가.
마직막으로 저자는 간디의 암살범을 비중있게 다룬다. 나름의 정당성을 보여준 것이다. 이건 이전의 서술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상당히 설득력을 높였다. 암살범은 힌두 민족주의자 나투람 고드세이다. 저자는 이 암살범의 재판과정을 상세히 소개한다. 5시간에 걸쳐 읽은 93쪽의 진술서에서 암살범 고드세는 간디가 간디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진리와 비폭력의 이름으로 헤아릴 수 없는 재난을 초래한 폭력적 평화주의자"이며 "오직 그만이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의 절대적 재판관이 되어버렸다"고 비판한다. 방청석의 사람들이 감동받아 눈물을 흘릴 정도로, 고드세의 간디에 대한 비판은 당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처럼 간디는 이슬람 옹호자라는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고, 비현실적 몽상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어쨌든 850쪽이 넘는 책을 이제서야 다 읽었다. 긴강이 풀린 시기에 읽어서 버겁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해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다시 영혼의 힘을 생각하게 했다. 아힘사의 올바름과 사티아그라하의 진정한 의미 그런 것을 다시 생각케 해 주었다.
더불어 생각한 것은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도 때론 인간적 약점이 무척 많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더 가까운 간디인가.
"맑스에서 간디로"
언제부터인가 나의 사상적 편력의 변화를 그렇게 발언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