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기슭에 선 사람은
데라치 하루나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다 / 2024년 5월
평점 :
오랜만에 일본 소설을 읽었다. 보통 일본 소설을 읽을 때는 주로 사회적 추리를 읽는다.
이 소설 [강기슭에 선 사람은]도 소개글에 끌려 추리 소설인 줄 알았다. 소개글 어디에도 호러나 추리물이라는 말은 없었는데 말이다.
소개 글은 이랬다.
-주인공 기요세는 병원에서 전화를 받는다. 연인 마쓰키가 크게 다쳐 의식불명이라고 했다. 핸드폰도 없어서 주머니 속 키에 적힌 전화번호를 보고 전화했다고 하면서. 둘은 몇 달 전 마쓰키가 어떤 일을 숨긴 것 때문에 다투었고, 그 후 만나지 않았다. 기요세는 마쓰키가 병원 생활에 필요한 물건과 핸드폰을 챙기기 위해 마쓰키의 집에 간다. 그런데 그 집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이 잔뜩 쓰인, 싸움의 원인이 되었던 노트를 발견한다. 노트에는 마쓰키가 숨겨왔던 진실이 빼곡히 적혀 있다. 마쓰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개글을 보고 강한 호기심이 생길만 하지 않은가? 다투기는 했지만 서로는 분명 연인 사이인데 서로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다. 여기까지 읽었을때는 혼수상태인 애인 마쓰키가 어떤 사건에 휘말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소 범죄에 연루 되었거나 그가 범죄를 저질렀거나.
그런데 이야기는 전혀 다른 흐름으로 진행 되었다. 마쓰키가 연인 기요세에게 숨기려 했던 것은 친구에 관한 것이고, 친구가 부끄러워하는 부분이라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마쓰키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었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개인주의가 더 깊이 뿌리 내린 일본도 연인 사이 일지라도 서로의 개인적인 가족사를 굳이 묻지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 점점 세상이 이런 추세로 바뀌고 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잣대로만 상대를 보기 때문에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마쓰키와 그의 친구 이쓰키의 우정에 감동 받지 않을 수 없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저 사람 왜 저러지?' 하고 느낄 때가 많다. 내가 생각하는 상식의 범위대로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라는것이다. 그렇다고 내 기준대로 세상이 움직여 주지도 않고, 내가 그렇게 만들 수도 없다. 특히나 관리자의 입장이라면 정말 힘들 것이다. 때로는 그사람 때문에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기도 하니까. 상대가 특별한 장애가 있다면 아마도 아예 업무에서 배제하던지 그사람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의 일만 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자면 분명 나머지 직원들의 일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경계선 정도의 장애인 경우는 조금만 지도를 하면 꽤 잘 해내기도 한다. 그것도 장애를 가진 직원이 일에 익숙할 때까지 기다려 주자면 힘든 일임에 틀림이 없다.
이 소설은 학교에서, 또는 회사에서 이런 관계들에 대해 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나는 경계선 정도의 장애를 가진 가족을 둔 입장이라 더 몰입해서 소설을 읽었다. 내 아이도 동료들의 많은 배려를 받으며 직장을 다니고 있다. 참 미안하고 고맙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사회라고 말한다. 평등하게.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