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주는 이야기 - 일과 삶의 주도권을 찾아줄 '완결'의 기술
김민경(앨리슨 김) 지음 / 푸른숲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우리는 흔히 일를 모았다가 한꺼번에 끝내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뇌는 가급적 에너지를 아끼려는 본능이 있어서 '컵 하나 씻으려고 물 틀고 세제 묻히느니, 나중에 그릇이 많이 모였을 때 한 번에 씻는게 훨씬 효율적이야'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하지만 컵 하나를 바로 씻는 사람의 인생에는 '괴로운 대청소'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5초짜리 가벼운 정리만 반복하면서 쾌적한 마음만을 유지할 뿐이다. 99" 

외출 후 바로 씻는 사람, 식사 후 바로 설거지를 하는 사람, 여행 다녀와서 바로 짐 정리하는 사람을 두고 3대 독한 사람 분류라는 말이 있다. 그 중 하나 바로 컵을 닦는 독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책을 보고 불신의 눈을 거둘 수가 없었다. 안그래도 '1년을 3개월 단위로 나눠서 정리한다(29)'는 내용을 읽을 때도 일정표를 일요일부터 일주일 단위로 적었다는데에서 벽을 느꼈는데(주간계획은 월요일부터가 편하니까), 읽으면서 정말 나를 설득할 수 있겠느냐는 의심이 계속되었다. 픽사같은 곳에서 일하니까 가능한 것 아니야? 문화가 달라서 가능한 것 아니야? 딴지를 걸 마음이 가득했다. 쉬운 독자가 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 청킹의 작동 원리는 하나다. 끝이 보이는 단위로 문제를 쪼개면 뇌는 움직인다. 다만 누가 그 단위를 만드느냐가 차이일 뿐이다. 디즈니랜드에서는 전문 설계자가 방문객을 위해 대신 해줬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는 청킹의 설계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만 한다. 33" 

처음엔 새해 결심이 3일만에 끝난다면 3일마다 새롭게 결심하세요!같은 조언처럼 신뢰가 덜 가고, 일상속에서 그리 효과적인 방법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끝/목표로 가는 과정을 쪼개놓는 것으로 청킹을 생각한다면 '5분만 더'도 청킹일까? 궁금해지면서 마음이 열렸다. 조금 더 넓게 적용한다면 아침에 알람을 맞춰놓고 5분만 더 자겠다며 일어나는 시간을 지연시키는 행위, 어둠의 청킹에 이미 익숙해있구나 깨달았다. 어쨌든 아침에 일어난다는 거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일종의 보상을 조금씩 끌어다쓰는 셈이니까. 고도로 발달한 게으름은 정교한 청킹과 다름없는 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공감이 되고 인정이 됐다. 

책을 읽으면서 "완벽을 위해 애쓰지 말라. 113" 우리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으니, 모든 일에 전부를 쏟아내려고 하기보다 중요한 일을 선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언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완벽'에 대한 생각을 바꿔 좀 더 나은 방식으로 달라진 것이 있는데, 책에서도 나온 외국어 학습(41)이다. 완벽한 문법을 사용해야지,하는 순간 공부는 끝난다. 발화도 문장도 사라지고 쏘리, 아이 캔트 스피크 잉글리쉬만 남는다. 그러나 그저 뜻을 전하기만 하겠다는 단순한 목표로 바꾸면 완벽하지 않은 문장이어도 괜찮고, 짧은 단어의 나열이어도 그게 불완전하지만 의미를 전달하는 말이 된다. 이 시도가 반복되면 가끔 운이 좋으면 별다른 문제가 없는 완전한 문장의 형태도 될 수 있다. '완벽한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의미 전달이라는 간단한 목표에 집중하기'를 우연한 기회에 경험하게 되고, 오히려 가진 것에 비해 더 효과적인 소통을 할 수 있게 된 탓에 책의 내용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 

이어서 아주 공감했던 내용이 게임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오랫동안 게임을 하지 않았는데, 기록을 갱신해야 한다는 점, 타인과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는 점, 원하는만큼 좋은 실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압박이 되어 자연스럽게 안하게 되었다. 게임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과제처럼, 일처럼 여겨지는게 싫었다. 경쟁과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혼자 뭔가를 키우거나 스도쿠처럼 풀어나가는 게임을 하게 되니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번에 완벽하게 성공해야 한다는 신기루(116)를 쫓지않고 실패를 연습으로 털어내고 끝이라는 목표에 집중하니 게임을 조금 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좋은 기록을 내고 높은 성적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어찌어찌 그래도 다음 판으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구나를 받아들이게 되었더니 여유가 생겼다. 

이런 변화가 도움이 된 것은 의외의 분야였는데, 그동안 살을 빼겠다는 목표를 수없이 많이 세웠고 또 그 이상으로 실패했다. 때로는 별 생각없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전보다 더 살이 쪄서 실패였다. 이번 도전(?)에서는 조금 방식을 바꿨는데 무엇을 먹을지, 얼마나 덜 먹을지, 얼마나 운동을 할지 목표치를 정해두기를 포기했다. 대신 오직 하나 게임하는 시간을 정하기로 했다. '무엇을(비전 54)' 위한 행동을 하는게 아니라 운동하는 동안 게임(즉각적인 보상 60)을 할 수 있도록 했더니 게임하는 동안 운동하는 시간이 금새 지나가 있었다. 그리고 비교적 꾸준히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이 점도 새롭게 바꿔 도전해보고 있는 방식과 연관되어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이 밖에도 '유용한 피드백은 정교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166' 는 내용을 읽으면서 AI를 이용하기 위한 프롬프트를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다르게 나온다는 요즘 '일 잘하는 사람'들의 조언이 떠올랐다.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피드백을 해야 한다는 것,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단계별로 과정을 나눠 개선해나가며 완성해야 한다는 점 등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당연하겠지만, 결국 사람도 AI 프로그램과 똑같이 스스로에게 어떤 명령값을 내리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다르게 나오겠구나 싶었다. 후반부로 가면 더욱 픽사에서의 경험담에 집중된 내용을 만나게 되는 점이 몰랐던 세계, 픽사에서는 어떻게 일을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채워주는 점은 좋았지만 보편의 경험으로 확장하기엔 조금 아쉬운 점도 있었다. 

어떤 말을 해주고싶은지 전부 공감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큰 변화, 놀라운 전환을 얻어가지는 못했지만 책을 읽기 전에 혼자 생각하고 도전해보던 것들에 대해 조금 더 확신을 가지게 되기도 하고 공감과 지지를 얻은 느낌을 받은 점이 좋았다. 다른 독자들도 자신의 상황과 목표에 맞게 책에서 얻어낸 생각과 방식을 적용해보면 좋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컵 하나 씻으려고 물 틀고 세제 묻히는 건 좀 낭비같다. 아무래도 설거지는 모아뒀다가 식기세척기에게 시키는게 내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더 낫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서울 풍류 - 멋스럽고 운치 있게 서울을 감각하는 법
은모든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울 풍류'라니 아, 드디어 이 비서울인이 서울의 맛을 제대로 보겠구나 싶어 기대됐다. 어디 서울사람들만 알고 즐기는 서울의 멋을 좀 훔쳐내볼까 싶었다. 서울사람은 아니어도 어쩔 수 없이 서울을 오가는 입장에서도 모든 계절에 서울이 있었다. 봄의 한강, 여름의 남산, 가을의 광화문, 겨울의 명동을 떠올리는 것이 어렵지 않다. 서울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늘 가던 익숙한 곳만 알고 있는 것 같아 놓치고 있는 서울이 있는 것은 아닌지 더 알아보고 싶었다. 기왕이면 풍류를 아는 소설가의 서울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동대문의 조지아 식당, 홍대의 콜롬비아 식당은 나중에 나도 꼭 찾아가봐야지 따로 적어두었다. 맛에서는 사실 '서울'이라는 특수성을 잘 실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2부 멋과 3부 흥에서도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솔직히 가장 설레이는 마음으로 침을 흘리며 읽었던 것은 1부 맛의 내용이긴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멋과 흥에서 좀 더 서울을 느낄 수 있었달까. 개인적으로 서울을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어서일까, 그 안에서 걷고 움직이는 동안에야 비로소 서울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 면이 있었다. 

 1부 맛의 내용 중 재밌는 점 하나는 "매운맛에 대한 애호는 한국인의 유전자에 얼마나 깊숙이 배어 있는 것일까? 60"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이어지는 '굴(70)' 에피소드와 함께 한국인에게는 매운맛 뿐 아니라 나물과 제철음식이 발현되는 때가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는 패스트푸드나 치킨, 피자, 마라 같은 외국계 음식을 좋아하고 자주 먹게 되는데 어느 순간부터 마치 스위치가 켜지듯 한식을 찾게 되는 때가 온다. 속이 편하고, 든든하고. 전에는 그 맛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왜 찾게 되는지 알게 되는 그런 때가, 시기만 조금 다를 뿐 결국은 발현되고 마는 것이다. 

 " 나무와 돌과 바다와 산과 새, 그리고 달. 인간이 하염없이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몇 가지의 응답이 거기에 있었다. 질곡의 현대사를 거쳐오며 더없이 열렬한 응답을 건네준 그들 또한 내게 질문을 건네는 듯했다. 무엇을 바라보고 벗하며 빚어내고 있느냐고. 119"

 서교동에서 열리는 농부시장(121)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꽃망울이 진 매화 가지를 만날 수 있는 곳이라니. 서울은 항상 어딜가나 사람이 많지만 이렇게 꽃을 즐길 수 있는 계절에 한강이나 꽃이 피는 명소로 알려진 곳들은 특히나 더 붐비는 장소가 된다. 꽃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구경하러 온건지 불평할 때도 있지만, 가끔은 그렇게 사람이 너무나 많은데도 모두가 어쩐지 들떠있는 그 분위기가 좋을때도 있다. 보통의 서울 안에선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징글징글하게 여길 때가 더 많은데, 봄과 꽃이 사람들의 얼굴을 웃게 만드는 그 부드러운 분위기가 있다. 그 느낌을 맛보기 위해 다시 봄이 오면 또 돗자리를 하나 둘러메고 한강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게 될 것이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자리를 잡으며, 다소 비싼 꼬치구이 같은 것을 기꺼이 한입 베어물고.

 " 어느 날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점점 더 촘촘해지는 지하철 노선도를 바라보던 그녀는 자신이 내려본 적 있는 역이 고작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한 번도 내려보지 않은 역에 내리는 일은 마치 커다란 모험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222"

 서울 토박이(262)가 아니어서일까? 천천히 헤아려보니 생각보다 많은 역들을 알고 있었다. 책에서 '대모험'을 하는 동안 16킬로미터를 걷게 되었다고 하는데, 동대문에서 광화문과 명동 일대만 잠깐 돌아다녀도 열개의 역 정도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청계천을 따라 '조금' 걷기만해도 만보는 우습게 채우게 된다. 이렇게 서울은 넓고도 좁아서 이리저리 걸어다니느라 시작했던 곳과 전혀 다른 곳에 닿아 가게 된 곳들도 많고, 여기서 일하고 저기서 놀며 곳곳을 누비며 시간을 보내왔다는 증거마냥 꽤나 촘촘히 역들을 다녔다. 그 안에서 충분히 모든 공간을 즐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어보니 제법 서울 방문자다운 행보를 갖췄구나 싶다. 하지만 포트럭파티를 겸한 신년회(260)를 할 수 있는 차 모임을 가진 사람의 풍류에는 여지없이 부러움이 인다.

 서울을 더 알고싶다는 외부의 시선에서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내가 이만큼이나 가깝게 있었나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몰랐던 곳, 특별한 곳을 찾으면 꼭 가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서울 풍류'를 통해 새로움을 발굴하는 것보다 아는 것을 더 잘 즐기는 방향을 잡게 된 것이 의외의 수확이었다. 그리고 그 점이 앞으로 다가올 계절 안의 서울을 더 기다려지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 좋았다. 일상적인 생활인의 익숙함으로 서울을 보는 것 같아 즐기기엔 부족한 면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새로운 시선을 얻게 되었다. "지금 내가 있는 시간과 장소를, 사소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즐기는 것"이라는 이다 작가님의 평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좋구나, 다시 이 도시를 잘 감각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나무의 노래 - 나무는 말하고 그녀는 듣는다
진재운 지음 / 생각의힘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내가 저 길을 다시는 걷지 못하겠구나."
매일 오가던 길이었다. 시간이 없다고 서둘렀고, 신호가 바뀌기 전에 건너려고 뛰기도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아 주변을 제대로 바라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다시 걸을 수 없다고 생각하자 평범했던 길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삶이 겨우 이것이었구나 싶었어요. 무엇을 하겠다고 그렇게 허둥대며 살았을까.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주 조용해졌어요."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오히려 세상의 소음이 멎었다. 극장도, 건물도, 연구도,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멀어졌다. 자신이 이루었다고 믿었던 것들이 죽음 앞에서 한꺼번에 힘을 잃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 뜻밖의 걱정 하나가 남았다. 35" 

"인간이 나무를 구하는가, 나무가 인간을 구하는가 251" 

여기에 마치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있다. 사람의 마음으로 보면 다 담아내기 어려운 이 사람의 이야기는, 잠시 자신의 존재를 내려놓고 그보다 더 넓은 곳으로- 나와 바깥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어나가야 조금씩 들리는 듯 하다. 어쩌면 당신은 이 이야기를 끝까지 허풍과 거짓이 섞인 환상쯤으로 치부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꿈결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책 속에 담긴 니카라과 숲의 넓고 푸른 풍경만은 진실로 전해질 것이다. 바로 그 숲의 풍경 앞에서 시작해보면 좋겠다. 그게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면 좋겠다. 조금 이상하고,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부분까지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결국 감동하게 되는 이야기였다.  

" 그녀는 숲을 소유하는 사람이라기보다 그곳에 잠시 그림을 그리는 사람처럼 자신을 설명했다. ...중략... 새와 곤충, 바람과 시간이 함께 그리는 그림이었다. 그녀가 떠나면 다른 사람이 그 땅을 돌보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은 나무를 더 심을 수도 있고, 길을 바꿀 수도 있다. 그녀가 그린 그림 위에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질 수도 있다. 204"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지만, 그에 대한 소개가 굉장히 독특해서 관심이 간 것도 있었다. 황실의 후손이라는 혈통, 그를 두고 '공주님'이라 부르는 것이 사실 마땅한 호칭이라는 점도 재밌고, 에이즈의 원인을 규명한 생물학자였다는 점도 놀라웠다. 그런데 그의 삶 6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시작한 나무 심기가 가장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시작된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상의 첫 시작이 되었다고 하니 여러 생각이 오간다. 거기에 온전히 자신이 일구어낸 숲에 대해서도, 성공과 배경마저도 자신의 것은 없다(200, 204)며 잘라낸다. 그저 자신의 할 일을 계속해나가는 것, 오늘의 묘목을 심어나갈 것(237)을 말한다. 벗어나고 내려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 사람들은 남은 시간을 대개 해로 계산한다. 그녀는 달로 셌다. 한 해라는 말에는 아직 많은 날이 남은 듯하지만, 보름달은 한 달에 한 번뿐이다. 한 번 놓치면 다음 달까지 기다려야 한다. 104" 

사실 몇년 전부터 가끔 평범하게 보내는 날이 문득 너무나 좋을때면 나에게 남은 이 보통의 하루가 몇 번이나 될까 헤아려보게 되었다.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다가, 길에 쌓인 낙엽을 밟다가, 부드럽게 뭉그러지는 햇빛을 쬐다가도 갑자기 찾아오는 그 순간을, 어릴 때는 세어볼 생각을 못했는데 언제부턴가 계절의 한 가운데에 있다고 느껴질 때면 이 계절을 이렇게 온전히 보낼 수 있는 때가 얼마나 남았을까 싶어졌다. 더우면 덥다고 불평하며, 황사나, 추위, 혹은 나뭇잎의 푸르름과 단풍, 떨어지는 꽃잎과 눈 사이를 걷고, 햇빛이 부서지는 것을 보고, 계절의 냄새를 맡는 일이 당연한 듯 하면서도 하나하나가 아쉬워졌다. 그래서 시간을 달로 셈하는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지금 보고 느끼고 해야하는 것들이 있다. 마치 다시 없을 것처럼 열심히 살아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의 삶이 그렇다. 

" 그러고 보니 나는 실제로 닥치지도 않은 너무 많은 일을 미리 두려워하며 살아왔다. 죽음이 두렵다는 것과 잃을 것을 미리 두려워하는 일은 조금 다르다. 죽음은 한 번 오지만,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은 살아 있는 동안 여러 번 찾아온다. 재산과 이름, 사랑하는 사람, 건강과 젊음, 아직 보지 못한 미래를 잃을까 두려워하며 오늘 누릴 수 있는 자유까지 미리 내어 주기도 한다. 110" 

백 그루의 나무를 심어도 스무 그루밖에 남지 않(63)더라도 꾸준히 나무를 심는 일을 계속해나간 그 굳은 심지에는 존경이라는 말 외에 다른 표현이 필요치 않았다. 열에 두번 밖에 완성되지 않더라도, 때로 그동안 해온 것들이 모두 망가지고 사라진대도, 다른 누가 방해를 해도 그는 자신이 이루고자 한 바를 계속해나가는 묵묵함, 한결같은 의지가 결국 목표를 향한 길을 낸다. 나무가 숲이 되고, 숲은 자연이 되어 그 안에서 다시 생명이 살아가게 되는 변화가 찾아온다. 가끔 우리는 목표로 삼은 일을 향해 나아가다 포기하게 된다. 매일 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하루 빼먹어서, 실력이 곧잘 늘지 않아서,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같은 이유로 실패했다고 여기고 이어가길 멈춘다. '나무의 노래'를 통해 멈추지 않고 계속해나갈 이유를 본다. 매번 첫 발을 떼는 것 같아도 똑바로 걷지 못했더라도 잠시 멈췄더라도, 다음 발을 다시 떼기만 한다면 결국 뭔가를 이루는구나, 그게 멈추고 포기할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나면 그 주변에 또 다른 삶의 자리가 생겼다. 다른 나무가 함께 자라고, 새와 곤충이 깃들며, 그늘 아래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225" 

이상한 일이다. 나무와 대화를 한다는 말, 곰에게 쓴 편지, 환상같은 사건들은 여전히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기인같기도, 괴짜같기도 한데 그가 해온 일들, 땅을 사서 그 땅에 그저 나무를 심어 두었다는 말은 어쩐지 눈물이 난다. 그가 샀다는 니카라과의 땅(48-49)을 그저 사진으로 보기만 했는데도 마치 그 곳이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희망이자 쉼터로 느껴졌다.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나누는 이의 숭고함, 자연의 경이로운 생명력과 회복력에 대한 경탄이 어우러져 감동을 받았는데 이와 비슷한 감동을 전에도 느낀 적이 생각해보니 <나무를 심는 사람>*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수수하고 다채로운 색감의 그림과 함께 되살아나는 자연의 힘이 담긴 내용에 크게 감동을 받았었다. '나무의 노래'를 인상적으로 읽은 독자라면 <나무를 심는 사람>도 함께 접해보면 좋을 것이다. 
꿈같은 이야기를 환상처럼 하는 것을 보며 열심히 찍어놓은 사진을 보지 않고서는 소설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거대한 나무 앞에서 자신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72)고 했는데, 다 이해하지도 따하지도 못할 상대 앞에서 솟구치는 의심과 의문을 스스로 무너뜨려야 하는 동안 비슷한 느낌을 곱씹어야 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라는 명언을 실천하는 삶이라니. 생의 가치를 되짚어보게 만드는 삶에 대한 긍정, 자연을 향한 새로운 감각과 영감을 전해주는 책이다. 머리 속을 비우고 마음을 채우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책을 읽으며 중간중간 짧은 글이 손글씨로 담겨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책의 마지막 부분에 글과 삽화를 함께 담아놓은 부록(267)을 실어놓은 것이 이 책의 백미였다. 이 점도 놓치지 않기를!


*<나무를 심는 사람> 동명의 소설(장 지오노 1953)과 애니메이션 작품(프레데리크 백 1987)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 애니메이션 작업을 한 감독 프레데리크 백 역시 일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은 환경운동가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정신 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 -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는 정신과 의사의 생존 가이드
조애나 치크 지음, 제효영 옮김 / 심심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내가 쓰레기 같아?
근데, 가끔 좀 쓰레기처럼 굴면 안 되는 거야?
그러게, 쓰레기가 될 수도 있지.
안 그런 사람이 있을까? 184" 

영화 <더 드라마>에서 결혼을 앞둔 커플이 친구들과 저녁을 즐기다 자기 인생 최악의 비밀을 하나씩 밝히기로 한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상처주고 거짓말을 한 과거의 잘못을 하나씩 고백하는 그들 사이에선 약간의 경멸, 비밀스러운 눈짓과 웃음이 오간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조금 더 은밀하고 얄팍한 유대가 한겹 더 쌓인다. 안 그런 사람이 있을까,하는 질문에 답이라도 하듯 평범해보이는 선량한 이웃의 모습을 한 영화 속 인물들에게도 쓰레기같은 비밀이 하나씩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가끔 쓰레기가 되며 산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 않게 살려고 노력하며 살지만 그래도 가끔은 쓰레기가 되고 만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꾸만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 같은 순간을, 하루를 보내고 난 뒤에 자책에 빠지곤 하는 우리에게 '정신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은 쓰레기가 될 수도 있지, 해버린다. 그리고 가끔 당신이 쓰레기가 되는 이유는 당신이 분리수거도 안되는 쓰레기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불운하게도 쓰레기통 같은 세상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풀어놓은 비밀이 관계를 망치는 방아쇠가 되지만,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중에도 당신이 하려고 했던 그 나쁜 행동이 반드시 당신이 사이코패스라는 의미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빈번하게 벌어지는 사건들을 접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아, 그것을 자신의 의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어린 시절엔 더욱. 그러니 자신에게도 그런 비밀이 있다해도, 쓰레기통 속의 쓰레기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해도 너무 자책하지 않기로 하자.
사실 나 역시 책의 목차를 보자마자 5장부터 읽었다. 5장의 제목은 <인간쓰레기가 되지 않는 법>이다. 비록 책이 인간쓰레기가 되지 않는 확실하고 명료한 방법을 소개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그렇게 여기지 않는 법을 말해준 것에 가깝지만 그래서 더 좋다. 지금은 그래 뭐 쓰레기면 어때, 하거나 쓰레기가 아니라 쓰레기통 구역을 잠깐 지나고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 뿐이야 생각하기로 해본다. 

" 사는 건 힘든 일이다. 부처가 깨닫고 가르친 고귀한 진리의 첫 번째가 인생은 고통이라는 것이고, 프로이트의 가장 큰 열망은 환자 개개인의 절망을 공통의 불행으로 전환하는 일이었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인류의 진화가 행복하거나 평온한 삶이 아닌 생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18" 
다행히 너무나 평범하고 나약한 우리만이 아니라 대단해보이는 사람들마저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공표해놓았다는 것이다. 나만 힘들거나 특별히 더 나쁜 선택만 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은 모두에게 속해있다. 그러니 때로 나쁘게도, 약하게도, 흔들리며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SNS를 보면 다른 삶들의 하이라이트만 모아놓은 것임을 알고도 비교하게 되곤 하는데, 인류의 모든 걸음은 비하인드를 통해 추진력을 얻었음에 다시 위로를 받게 된다. 

 "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이 불안과 우울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건, 생각을 중시하는 게 당연시되는 환경에서는 괴로움이 지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강한 감정 경보인 두려움, 수치심, 죄책감, 분노, 슬픔, 저조한 기분을 없어져야 할 감정으로 여기며 스스로 자기 몸에 두 번째 화살을 쏜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지 자꾸만 곱씹고, 기분이 나아지는 게 정상이라고 가정하고, 혹시 과거에 저지른 잘못이 이런 나쁜 기분의 원인은 아닌지 찾으려고 하고, 이렇게 안 좋은 기분으로 영원히 살면 어쩌나 294"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은 생각을 했던 부분 중 하나인데 여기서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우리가 반복해서 두번째 화살(237)*을 자기자신에게 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번째 화살은 불교 경전에서 전해지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나쁜 사건은 단 한 번 일어났을 뿐인데 우리는 그 사건을 계속해서 곱씹으며 그 때의 부정적인 감정을 이어간다.
세상은/상대는 한 번 화살을 쐈을 뿐인데 그것에 얽매여있으면 스스로 자신에게 또 다른 화살을 꼽는 것과 다름없다. 이 불필요한 감정에 부림 당하지 않고 멈추고자 하는 것이 두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이다. 이와 싸워 이기거나 회피하거나 매몰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끌려다니지 않아야 함을 말한다. 
다른 하나는 우리는 일이 잘 안풀리거나,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날 때 심지어 아플 때도 반사적으로 자기자신을 살핀다.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상황이 이렇게 되기까지 뭐가 문제였을까 자신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나 때문일까, 나는 왜 이럴까 같은 자책과 점검, 반성을 하려한다. 이 두번째 화살을 자신에게 겨누기 전, 타인이 이런 상황에 처해있다면 어떻게 대해줄 것인지 생각해본다(209).
타인이 실패를 겪거나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자신을 탓하던 생각을 그대로 할 수 있을까?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속으로 생각할지언정 차마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타인에게 보이는 위로와 친절을 같은 상황에 처한 자신에게도 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쉽게 잊는다. 가장 잘 대해주고 아껴줘야 할 자기 자신에게 남보다 못한 대접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또 하나 우리가 머리속에 잘 기억해두어야 할 것은, 완벽함에 대한 추구, 영원한 지속은 없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영원한 것은 없다는 깨달음을 통해 도리어 위안을 얻게 되었다 234"고 했는데, 우리-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이미 그 깨달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 없다. 이미 지드래곤이 말하지 않았던가, 영원한 건 절대 없다고. 케이팝이 오늘도 1승을 했다.
더불어 영원하지 않음은 완벽함에 대한 환상을 단념시킬뿐 아니라, 우울과 불안이 우리를 잠식하는 때마저도 일시적임을 말한다. "우울하고 불안할 때 떠오르는 생각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모두 기분이나 감정을 일시적으로 나타낼 뿐이다. 338" 그러니 그늘 아래에 있을 때 잠시 자리를 피하라고 조언한다. 그늘에서 벗어나고 보면 가득했던 구름들이 걷히는 순간이 온다. 
세상이 혼란하고 험난해질 수록, 나와 다른 사람을 나누고 서로를 탓하고 싶어질수록 연민과 공감을 통한 인간성의 회복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선함과 악함을 구분짓고 싶고 나와 남을 나누고 싶겠지만, 우리는 어느 한 가지 역할만 하며 사는 것이 아니고(146) 우리의 행동은 서로 연결(221)되어 다른 사람들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더욱 위로가 되는 것은 남과 나를 구분짓고 나누는 것보다 타인에 대한 호기심과 연민에서 비롯된 낯선 사람과 나눈 작은 호의 같은 것들이다. 

" 이런 세상에서 스트레스 받고 괴로워하는 건 어디가 망가진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 놓이면 괴로워하도록 만들어졌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생존을 도와주는 경보장치가 작동한 결과다. 세상은 붕괴 직전이고, 모두의 경보가 크고 또렷하게 울려야 시스템이 다시 균형을 찾을 수 있다. 17" 

'정신나간 세상에서 아픈 사람들'을 읽는 것은 삶이 레드레드 신호를 주는 딱 그만큼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거기서 벗어나야 하거나 괴로움에 부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을 천천히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삶은 원래 힘든 것이다. 가끔 힘들고, 남과 같이 살아가야 하는 게 부담스러운 정신나간 세상에서 우리는 때로 아프다. 다만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따르며 사느냐(378)를 스스로 정해 행동하며 살 수 있다. 단순히 세상 탓을 하고 개인에게 위로만 건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이야기하는 책이라 의미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셋째 밤 ㅣ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3
일월명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청난 겁쟁이다. 아직도 가끔 집에 혼자 있는 밤이면 무서워서 불을 켜놓고 잔다. 미신도 잘 믿고 대신 허세도 잘 부린다. 믿는다고 무서워하면 얕잡아보일까봐 안믿고 안 무서운 척 한다. 공포영화, 소설, 만화도 한번 보면 잊어버릴 때까지 무서워서 머리감을때 노래 불러야 하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보고싶어 한다. 가끔 눈을 가려가면서, 보다 말고 멈춰서 귀여운 동물 영상으로 마음을 달래면서도 소름 쫙쫙 돋아가면서도 기어이 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러니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셋째 밤'을 앞에 두고 또 어땠을까? 아니 왜 벌써 셋째밤이냐며 첫째, 둘째밤엔 왜 날 안불렀을까, 솔직히 요즘 진짜 무서운 공포 소설 읽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고 허세를 부리며 호기롭게 자원했다. 

책을 읽기 전 '호러 심청'과 '괴담-방 탈출 카페 제작 중에 생긴 일', '창포꽃을 세 번 접으면' 제목을 가장 인상 깊게 봐뒀기 때문에 기대도 컸다. 예상하기로는 '호러 심청'은 고전 소설인 심청 얘기를 잔혹동화 방식으로 비틀었거나 현대판 생활고를 겪는 소녀 가장의 분투기를 다뤘으리라 싶었다. '괴담...'은 영화 <백룸>이나 <8번 출구>처럼 요즘 유행하는 리미널 스페이스를 이용한 공포물이 아닐까 싶었고, '창포꽃...'은 어렴풋이 사랑 이야기가 얽혀 있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과연 공포물 짬밥 nn년차의 예상은 맞았을까? 

가장 무서웠던 건, '괴담...'이었다. 사람마다 뭘 가장 무서워하는지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귀신을 가장 무서워하는 겁쟁이에게 '괴담...'은 진짜였다. 독백 형식으로 된 전형적인 괴담풀이라 '괴담...' 도입부쯤에는 솔직히 좀 유치하겠네, 생각했다가 점점 무서워져서 의외였다.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구조를 따르는 것 같은데(계속되는 허세) 읽다보면 몰입이 되면서 어디를 향한지 모르는 반성을 하면서 읽었다. 알겠지만 겁쟁이들은 무서우면 일단 잘못을 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야!'였다. 제목부터 강렬한 이 소설은 가장 첫 번째로 '단편들...셋째 밤'을 여는데, 어쩌면 이 소설을 가장 무섭게 여길 사람들이 많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괴담인 것 같으면서도 또 그 아는 맛에 빠져들게 되는 소설이었다. 사람이나 사건을 무서워하는 편이 아닌데도 인상깊게 읽었으니 현실적인 공포를 잘 살리지 않았나 싶다. 또 다른 단편 '우리 안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읽으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창포꽃...'이었는데, 아! 이 단편을 수십년만 빨리 읽었어도 나도 써먹어보는거 였는데 그걸못해봤네 싶어 아쉬웠다.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반드시 잘 기억해두겠다. 그러니 다른 독자들은 이 단편을 읽기 전에 꼭 종이와 펜을 준비해두세요. 요즘은 핸드폰에 적어두면 되려나. 만약 나라면을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어서 N 입장에서 즐거웠다. 성향이 F인지 T인지에 따라 가장 감상이 갈릴 수 있는 단편이 아닐까. 근데 일단 나라면 고소할거임. 당할 확률이 더 많지만. 

SF요소가 있는 단편들도 있었는데, 트럼프가 망쳤다. 이제 은하연방 같은 단어를 보면, 트럼프가 달은 미국 땅*이라며 담당 우주군 유니폼까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게 떠올라 웃음이 터지게 되었다. 연임에 성공한 미국 대통령이 이렇게 제 정신이 아니라는 걸 전세계에 공표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 공포이자 웃지만은 못할 코미디다. 어쨌든 덕분에 마지막 단편인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현실의 달리 방법이 없는 인물에 의해 제압되었다. 

원래 예고를 하는 콘텐츠는 그만큼 기대를 불러 모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감상자를 준비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려워진다. 공포물입니다,하면 얼마나 무서운지 한번 두고 보자 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고, 추리물입니다,하면 범인이 누구인지 트릭이 뭔지 밝혀내겠다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처럼. 그런 기대와 준비에도 충분히 무섭게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셋째 밤' 읽었다. 재밌었다고 말하며 책을 덮을 수 있었는데, 무서웠던만큼 읽는 시간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남은 감상이었다. 공포를 즐길 줄 아는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다. 


*2609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