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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권은 밤에게 ㅣ 작가정신 소설락 小說樂 3
이신조 지음 / 작가정신 / 2012년 9월
평점 :
출판사 '작가정신'에서 소설樂 시리즈 기획으로 꽤 흥미로운 책들을 출간하고 있다. 어쩌다 기회가 닿아서 먼저 나온 '광신자들'과 '아흔아홉'을 모두 읽게 되었고, 또 이렇게 세번째 소설인, '우선권은 밤에게'까지 읽게 되었다. 원래 광신자들-아흔아홉-우선권은 밤에게 순으로 번호가 매겨져있지만, 읽기로는 아흔아홉-광신자들-우선권은 밤에게 순으로 읽게 되었는데 갈수록 더 매력있는 내용의 소설을 만나게 되는 것 같아서 새롭게 '작가정신'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무엇이든지, 나와 취향이 맞아서 믿고 보게 된다는 것은 참 위험하면서도 좋은 일이다. 기대할 것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이고, 타성에 젖을 일도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흔아홉의 경우, 내용이 다소 무거우면서도 화자의 연령이 좀 높게 느껴져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의 외도, 아내의 행방불명 그리고 세 남녀의 소풍길. 그만의 독특했던 설정과 분위기를 읽으면서 마치 살얼음판 같은 느낌이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하게 펼쳐지는 내용에 의외성을 느꼈었다. 광신자들은 그 극단적이면서 어딘지 모르게 일본풍 만화처럼 느껴지는 인물과 사건의 조합이 인상적이었다. 서툰 인물들이 마치 다 불붙지 못하고 떨어져내리는 불꽃처럼 시들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이 '우선권은 밤에게'는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분위기의 책이었다.
이 책 속에 약간은 인위적으로 덧대어 놓은 듯한 환상적인 요소들이 어색하게 느껴진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현실을 살고 있지 않은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나 동화같은 설정을 해놓은 부분이 아주 좋았다. 마치 어른들을 위한 동화처럼 느껴졌다.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 계속되던 때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최근에.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녀가 '자매양장' 여사님들의 안내를 따라 들어간 '나이트룸'에서 온전한 밤을, 편안한 잠을 경험했듯이... 때가 되면 마치 신기루처럼 제 멋대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예고도 없이 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나이트룸을 찾아들어가 잠들게 되면 좋겠다고 꿈꾸게 되는- 그런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지극히 남루하고 초라하지만 현실적인 공간과 환상적이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비현실적인 공간을 한데 이어놓아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을, 책을 읽으며 맞닥뜨리게 된다. 그럼 곧, 독자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도 함께 느슨해진다. 소설 안의 허구를 현실의 증명되지 않은, 비어있는 공간으로 옮겨와 제멋대로 채워넣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이 제 색을 덧입어 한 장 한 장 넘어가게 되면- 비로소 이 책 한권이 내 마음에 드는 책으로 의미를 갖게 된다. 바로 그런 책이었다. 이처럼 이 책에 대해 호평을 하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 어딘가를 건드리는 부분이 있어서이다. 특히 이런 동화적 요소가 가미된 것을 좋아하는데 여기서도 그런 취향이 적용되었다. 호평의 이유에 대해 분명히 밝혀두자면.
처음엔, 너무나 흔한 인물 설정이 아닌가 생각했다. 딱히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도 못했고, 별다른 미래도 계획도 없는 인물이, 구질하다 싶은 일상을 산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미도 보이지 않고, 무슨 일이 생기길 바라지도 않는 그런 평범하고 흔한 인물에 결국 이 책도 루저로 전락한 시대의 청춘들 속풀이나 해주는 책이 되는건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책이 단순 속풀이 책으로 끝나지 않고 힘내라는 말대신 환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했다는 것이 좋았다. 세상 어딘가에는 지친 당신의 몸을 누일 수 있는, 그런 착한 공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읽으면서 하나의 검은 덩어리인 자신을, 때에 따라 무대 위의 연기자처럼 연기하도록 만드는 주인공이 마치 나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두들 자신을 살아내기 보다는, 자신을 연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순간이 종종 있다. 상대와 사람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바꾸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의식하는 순간 지독히 불편해진다. 진짜 나와 가짜 나도 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능란히 연기해내고 나면 또 다시 검은 덩어리일 뿐인 자신으로 돌아오는 허탈과 안도의 순간을 느껴본 적 있는 사람들은 주인공의 행동에 많은 공감을 할 것 같다. 그녀만큼의 자조적인 태도가 아니더라도, 삶의 어느 순간들은 그런 법이다.
나이트룸은 어디로 갔을까? 집의 옛 주인이었던 할아버지와 함께 '자매양장'의 낙희, 난희 여사들과 함께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린 공간의 빈자리를 함께 느끼게 된다. 나이트룸이 없이도, 낙희, 난희 여사들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믿음만 남았어도, 자신의 성이 권씨에서 양씨로, 다시 또 권씨로 바뀌었어도, 낮동안 나는 하나의 검은 덩어리이 뿐이어도, 밤의 세상이 나를 받아주지 않더래도, 삶은 흘러가고, 세상도 나도 서서히 천천히 변하고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