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주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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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언가를 강렬히 원하면 그 반대의 것이 온다는 것. 희망을 원하면 절망이 찾아오고 부를 원하면 가난이 닥쳐올지어다. 사랑을 갈구하면 할수록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마주하게 될 지어다. 아이들 앞에 선 아버지 선생님은 영적 의지의 시험대였다. 218" 

 '파사주'를 읽으며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모르겠다,였다. 그 뒤를 가장 자주 쫓아나온 것은 만약 내가 종교가 있었다면,과 이 둘은 정말 길을 떠나고 있는 게 맞나,였다.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듬더듬 읽어나가다보니 최근 읽은 책들 중에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려 읽은 책이 되었다. 사실 다 읽고 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는 감상은 지워지지 않았다. 조금 말을 부풀려서 표현하자면 '파사주'만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읽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작가는 이 책을 어떻게 풀어낼까 궁금해지는 책은 또 없을 것이다. 

하나의말씀
 '신의 군대(61)'. 무려 일곱곳이나 된다는 벽돌집의 조직적인 체계와 사회 여러 계층의 비리가 연결되어 있는 듯한 하나원의 모습은 단순한 사이비같은 종교시설을 넘어 군사정권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종교시설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안에 비밀스러운 공간들이 있고 거기서 사람들은 계약서를 주고 받으며 서로를 접대한다. 해수와 유림의 불분명한 시선과 대화로 그 안에서 벌어지던 불온이 언뜻 들춰지다 감춰진다. 그 둘의 존재마저도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순간 그들의 증언도 함께 점멸한다. 정말 뒤뜰을 지켜보다 보면 사라진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는지, 계단 아래에 있는 것은 연구소인지 수련당인지 혹은 감옥인지(230) 보고도 알 수 없고, 알아도 말할 수 없고, 알려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세상에서 더욱더 생생해지는 것은 " 사람 하나 죽고 사는 게 말씀과 관련 있어, 없어? 사람 하나 다치고 상하는 게 말씀과 관련 있어, 없어? " 을러대던 소리였다. 

가인과 아벨(17)
 (81)*'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카인은 자신의 첫 수확 농작물을 아벨은 자신의 가축 중 가장 처음 난 새끼를 제물로 바쳤다. 자신의 것이 아닌 아벨의 제물만 반겨하자 이를 시기한 카인은 아벨을 불러내 잔인하게 살해하고, 이로인해 카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어 땅에서 버려져 유랑하며 살게 된다. [창세기 4:1-16]'
 가인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해서 명확한 비유와 설명이 나오는데도 해수가 당당히 스스로를 가인이라고 부르는 통에 카인으로 대표되는 '악, 폭력, 탐욕'같은 키워드들이 흐려졌다. 해수가 가인이라면 대체 아이들을 착취하고, 서로를 감시하고 때리며 학대하고, 비리와 향락에 취한 벽돌집 안의 사람들은 무엇일까, 내가 모르는 숨겨진 의미가 더 있을지도 몰라 의심하며 읽었다. 역할은 누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는지에 따라 뒤바뀌는 것이었다. 가인의 불신과 유랑은 해수와 유림으로 인해 긍정으로 바뀐다. 

길을 떠나는 아이들
 어디선가 아이들은 끊임없이 흘러들고, 자라나던 아이들이 소리없이 사라진다. 사라지기 전에 소리를 내려고, 모두가 아벨인 그 공간 안에서 스스로 가인의 이름을 가져온 아이들은 유랑 길에 오른다. 길과 벽돌집이, 과거와 현재가 어지러이 뒤섞이는 동안 그 안에서 믿음도 합쳐지고(122), 생존자(166)는 착취자가 되었다. 아이들의 여정이 현실감없는 환상처럼 보여져 산 자의 탈출인지 이미 죽은 자의 황천길을 따르는 것인지 헷갈렸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방향도 불분명한 길 위에서 해수와 유림은 못마땅히 건네진 사과를 받아든다.(21) 아마 이들은 더이상 깨달을 것이 없기 때문에 이 과실을 먹어보라는 유혹 없이 오히려 마땅치 않다는 듯한 태도로 건네진 것이 아니었을까. 

파사주
 게임(200)이자 통로 그리고 궁합. 파사주라는 단어를 두고 사실 대형 쇼핑몰 같은 공간을 먼저 떠올렸다. 가장 일상적인 접근이 아닐까 싶었는데 이 때문에 '파사주'의 내용을 좀 더 현대적이고 세속적인 배경일 것이라 잘못 짐작했었다. 책에서는 이를 두고 게임으로 풀어냈지만 나중에 읽어보니 사주팔자를 깨뜨린다는 뜻의 破四柱,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운명을 풀어보는 궁합의 의미로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무인 유림과 물인 해수가 만나 함께 자신들의 운명에 저항해 생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관계성을 그대로 상징하는 제목이었다. 읽기 전보다 읽고 난 뒤에 훨씬 제목이 더 마음에 들어왔다. 

 " - 우리 지-지금 어디로 가?
유림이 물었지만 해수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뒤를 돌아봐도 앞쪽과 똑같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고 불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림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건 이 길이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언젠가는 끝이 보일 터널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계속 걷다 보면 환한 빛을 마주하리라는 작은 희망이 유림의 발걸음을 앞으로 이끌었다. 171" 

 어둡고 질척이는 통로를 헤매는 것 같은 소설이었지만 그 안에 희망이 있어 그 희미한 것을 붙들고 같이 헤매며 읽어 내려간 기분이었다. 이 안에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독자라면 아마 좀 더 수월하게 읽고 많은 것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을 여는 소설로 사람 사이의 관계과 운명을, 세상의 굴레와 저항을 음미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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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알로하 하와이 - 스무 번의 하와이, 천천히 느리게 머무는 곳
박성혜 지음 / 푸른향기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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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와이는 어쩐지 쉽게 떠나기 어렵단 인상을 주는 여행지였다. 일단 여행객들이 너무 많이 가서 오버 투어리즘 때문에 관광객 혐오가 생겨나고 있다는 나라나, 경기도 무슨무슨시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한국인들이 많이 가서 외국인지 한국인지 모를 나라나, 한번 입국하려면 손가락 지문이며 자잘한 정보를 다 내놔야 한다는 나라같이 가까운 곳들보다 멀다. 멀다는 것은 곧 비용의 문제를 더한다. 항공료도 더 비싼 것이 당연하고, 물가도 근처 나라들보다 높다. 교통이나 간단한 안내문 같은 것을 이용해서 자유롭게 여행하는 편의성도 확연히 달라진다. 신혼 여행이니 휴양지니 해서 아무리 하와이를 많이 찾는다고 해도 여러모로 조금 멀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여행지인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라 '해피 알로하 하와이'의 표지를 보다가 저긴 좀 멀어, 하다가도 어느새 몽글하고 마음이 들뜬다. 옅고 아름다운 물빛을 띄는 잔잔한 바다와 따뜻한 볕 아래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만 했을 것 같은 야자수, 발 밑에서 곱게 뭉그러질 것 같은 모래사장은 이미 지나가버린 지독했던 여름의 더위도 생생한 활기로 기억 보정을 해 되돌아보게 만든다. 머네, 어렵네 조건을 두드려보던 계산기를 치우고 언젠가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곳이긴 했지, 하고 거기도 모히또를 잘 말아주나 꿈꾸듯 바라게 한다. 

 '해피 알로하 하와이'는 마치 밀당을 하듯 하와이와 여행과 독자 사이를 조율한다. 그만큼 솔직하단 뜻이기도 하다. 표지만으로도 하와이를 떠올리는 마음이 솔톤으로 올라갔다가 입국심사에서 세컨더리룸으로 끌려(?)가고, 세관에 걸리는 내용이 나오자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렇게 하와이를 많이 가고 잘 아는 작가 조차도 긴장하게 만드는 입국절차는 '내 돈 내고 여행을 즐기러' 가겠다는 사람의 마음에 불필요한 긴장과 불안을 주는 걸림돌이긴 했다. 하지만 막상 어딘지 여유로워 보이는 하와이 사람들의 모습이나 오렌지재스민 향기가 바람에 실려 퍼져나간다는 말에 또 마음이 들뜨고, 따뜻한 나라답게 벌레가 많다고 하면 금새 마음이 식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 쯤 되면 우선 책으로 만나는 하와이부터 즐기고 보자,고 생각하게 된다. 

 보기만해도 이 모든 곳을 다녀온 작가가 부러워지는 곳들이 있었다. 오르는 과정은 살벌하다는 코코헤드 트레일의 사진이나, 커다란 바다거북이의 모습이 담긴 사진, 여기저기 누워있는 몽크씰들, 아니라곤 하지만 정말 [쥐라기 공원] 영화에서 본 것 같은 모습의 마노아 폴스의 풍경이 그랬다. 언젠가 하와이에 간다면 꼭 알로하 프라이데이 파이어 워크, 금요일밤을 끼워서 가겠다고 적어두었다. 힐튼 하와이안 빌리지 앞 카하나모쿠 비치에서 단 4분동안 한다는 이 불꽃놀이는 6월부터 9월까지는 저녁 8시, 그 외에는 저녁 7시 45분에 한대서 그걸 놓치고 허탈하고 당황스러워하는 관광객이 되지 않아야지, 힐튼에 있지 못하더라도 꼭 쉐라톤 쿠히오 비치말고 최소한 아웃리거 리프 와이키키 비치 리조트 앞에서 이 짧은 낭만을 누려야지 다짐했다. 이 모든 것이 참 한국인의 여행계획스럽지 않은가 생각하면서. 

 책에서 만난 카페 'pai(배)'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 전 읽었던 [설탕 전쟁]이라는 책에서 본 하와이 이주 노동과 관련된 역사를 떠올리게 했다. 아픈 역사는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해피 알로하 하와이'의 끝부분에도 진주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때 비로소 하와이가 여행지가 아닌 누군가의 삶이 이어져 온 생활터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그 안으로 들어가 잠시나마 그 곳에서의 삶을 나눠받을 수 있기에 여행이 의미있는 체험이 된다는 것도 상기됐다. '하와이'를 두고 추억과 이상, 마음과 정보를 나눌 수 있는 매력으로 가득 차 하와이를 다녀온 사람과 가보고 싶은 사람 모두의 마음에 들만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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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뺏기 - 제5회 살림청소년문학상 대상, 2015 문학나눔 우수문학 도서 선정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92
박하령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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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조하기 위해서는 우선 파괴해야 한다고 누군가 그랬다. 고로 나의 삐뚤어짐은 성장의 전조이다. 과거의 삐뚤어짐이 엇나감이었다면 이제 나의 삐뚤어짐은 존재의 외침에 부응하는 건강한 파격이다. 난 삐뚤어져야 한다! 그게 마땅한 일이다. 107"

 이상하게도 '의자 뺏기'를 읽으면서 전에 봤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을 떠올렸다. 101개의 자리가 순서대로 놓여져 있던 그 세트장. 처음엔 모두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시작할 수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101개의 자리는 점점 줄어들어 갔다. 없어지는 자리와 같이 사라지고 싶지 않아서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을 알리려고 애쓰던 참가자들이 떠올랐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싶을 뿐인 누군가의 절박함을 바라보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래서 생존 경쟁 방식으로 된 티비 프로그램을 일부러 안본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의자 뺏기'를 읽다가 그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전에는 그저 끝끝내 자리를 지켜내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반짝이는 기쁨을 바라보곤 했는데, 이제와서는 자신의 자리가 없었던 사람들이 신경쓰였다.

 처음 은오는 왜 지오가 리포트를 숨긴게 아니라고, 희수의 책상에서 시연이가 뭔가를 빼가는 것을 봤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승미가 무섭더라도, 자신이 본 결정적인 장면을 밝혔다면 상황이 뒤집어질 수 있었을텐데 누구보다 가까운 편이 되어줄 지오를 두고 다른데서 자리를 찾으려고 눈치보는 은오의 모습이 답답했다. 그러다 하나씩 왜 은오와 지오 사이에 거리감이 생겨날 수 밖에 없었는지 알게되면서 은오를 지켜보기 힘들었다.

 언제나 의자를 뺏기거나 양보해야 했던 은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주변이 하나같이 어렵기만 했다. 누구든 은오에게 왜 그래야만 했는지 솔직히 말해주었어야 했다. 은오 곁의 사람들이 자신의 의자만을 좇아 제멋대로 사라져버릴 때마다 안타까웠다. 부산에서 만난 아주머니보다 그 애의 마음을 들여봐주지 못하는 사람들 곁에서 평생을 두고 은오는 앉아본 적 없는 의자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은오가 시달린 것에 비해서 풀어가는 과정은 오히려 짧고 아쉬웠다. 이마만큼의 큰 상처가 겨우 이런 순간들로 풀리고 덮일 수 있을까. 은오가 여전히 어리기 때문에 그만큼 더 빨리 삐뚤어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파괴 속에서 청소년 소설다운 성장의 여지를 남기며 끝을 맺었지만 어딘지 아쉬운 마음이 들어 은오는 정말 이렇게 나아갈 수 있는지, 그래도 괜찮을지 한참을 가만히 생각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언젠가 앉아보고 싶었는데, 나만 앉지 못한 채 서서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순간들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의자 뺏기'안에 나오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의자를 뺏는데에만 익숙해보여서 은오보다도 내가 더 미워했다. 누구 하나만 힘들면 나머지가 편할 수 있다는 말을 어린애에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 말을 어린애가 이해해서도 안됐다.

 앉아보고 싶었던 자리, 앉을 자리가 없어서 가만히 서서 다른 사람의 자리를 바라보아야 했던 때를 떠올리며 '의자 뺏기'를 읽는 사람들이 이 결말에서 희망만을 골라 가져갔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뒤돌아보다 다시 앞을 봤을 때 내가 앉을 수 있었던 자리도 있었음을, 때로는 그 의자의 비좁은 자리에 다른 사람과 함께 앉아서 나눌 수도 있었음을, 앉지 못한 의자 대신 새로운 의자를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인생임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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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광선 꿈꾸는돌 43
강석희 지음 / 돌베개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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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모든 비참이 내게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나를 즐겁게 하던 것은 금세 나를 괴롭혔다.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은 나를 쉽사리 중독시켰다. 나는 내게 자주 실망했다.
사실은 매일
아니, 매 순간.
돌이켜 보면, 사랑을 받고 싶었을 뿐이다.
더 많고 더 큰 사랑을. 24" 

청소년도서는 좀 희망차야 하는거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가지고 책을 읽다 다시 표지를 뜯어보았다. 그런다고 읽고 있는 내용이 밝아지거나, 표지 색이 까맣게 바뀌거나, 띠지에 적힌 '성장소설상 수상 작가'라는 문구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모든건 여전하고 바뀌어야 하는 건 내 생각일뿐인데, 처음엔 그랬다. 치기어리고 분절된 투로 제 안의 고집과 상처만 쏟아내는 연주를 보며 마음이 답답해져 왔다. 

" 그런 내 사정을 그 아이들에게 말하는 게 가능했을까? 내가 이해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놓아 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 나는 나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오해는 오해로 남겨 두는 게 차라리 편했다. 56" 

다가오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 이상의 벽을 치는 모습에 사춘기가 쎄게 왔구나 싶었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고 왜 자신이 싫은지 늘어놓은 것들이 진학 실패, 남자친구가 퍼트린 악의적인 소문, 따돌림, 씹뱉과 먹토, 자해여서 마음이 가라 앉았다. 앙상하고 여윈 몸과 마음만 남은 연주가 안타까우면서도 한 번 걸려 넘어진 돌부리를 높은 벽처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모르는 새 불룩 나온 입에 '푸르르' 숨을 내쉬며 입매를 풀어내곤 나도 이제 어른이 다 되었구나, 했다. 

그 시절엔 어제 나랑 화장실 다녀왔던 친구가 오늘 다른애랑 화장실에 가면 마음이 술렁이곤 했다. 눈길이 가던 사람이 다른 곳만 보고 웃어도 심장이 내려앉고, 누가 내 방에 노크없이 들어오기라도 하면 나를 무시해서 내 공간을 침범하는 것처럼 화가 나기도 하던 때였다. 그랬던 시절의 마음을 모두 잊고 섬세하게 벼려진 감성과 예민했던 감각이 지워진 머리로 연주를 재단하려고 했다. 마음을 풀고 눈길을 다듬어 다시 연주를 본다.  

" "쓸데없는 말 하면 벌금 내는 법을 만들어야 돼."
이모는 할아버지의 지인 한 무리가 다녀간 다음 이마를 짚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입을 가리고 잠깐 웃었다. 그런 순간들이 몇 번 있었다. 이모와 나 사이의 비밀이었다. 113" 

하마터면 벌금으로 가진 돈을 다 털릴 뻔 했다. 정신에 힘을 주고 바보같은 소리나 내뱉는 어른이 되지 않고 살아야지, 생각한다. 연주가 그토록 바랐던 까만 돌 '묵묵'과 함께 돌보기를 이야기하는 다해, 정연, 혜영이를 보며 마치 묵묵이 영화 '청바지 돌려입기'의 청바지 같단 생각을 떠올렸다. 같은 것을 공유하기로 한 친구들의 성장과 우정을 다룬 청소년소설이 원작이라는 점에서 오래된 영화이지만 '녹색 광선' 독자들에게 함께 추천해주고 싶었다. 

'녹색 광선'안에 모든 인물들은 다 이유가 있었다. 누구 하나도 예사로 살아가고 있지 않았다. 이모, 할머니라고 붙여진 호칭에도 윤재와 명선 같은 이름이 있었다.여기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도 괜찮은가, 싶을만큼 섭식장애, 가정불화, 장애인 인권, 성소수자 같은 키워드들이 빼곡했다. 하지만 인물들이 소설 속 주인공을 위해 기능하도록 쓰이는 장치가 아니라, 저마다의 무게를 짊어지고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숨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어둠이 길고 갈등은 다양한데, 멈춰있던 관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치유의 과정은 그에 비해 짧게 느껴졌다. 내면으로 침잠해 가라앉는 개인을 일깨워주는 것은 외부의 두드림이었다. 닫힌 이모네 집 문을 윤재야, 하고 부르며 두드리던 할머니의 마음처럼, 타인을 거부하던 연주를 초대한 생활 트래핑 단톡방의 알람처럼, 일반인에게만 열린 세상을 향해 지하철 장애인 이동권을 요구하는 시위처럼 곳곳에 두드림이 있었다. 

모두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행복해지고 싶어서 노력하는 과정에서 끝내 남은 페이지가 없어서 조금은 아쉬웠다. 하지만 인생은 완벽한 행복으로 닫힌 결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 남은 시간들이 여백으로 남겨져 있다는 점이 더 감각을 잃지 않은 성장소설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뜩 엉킨 실이 조심스럽게 하나씩 풀려가는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차분하고 섬세한 눈으로 상처를 보듬는 성장소설을 만나보고 싶다면 '녹색 광선'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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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우면 종말 - 안보윤 산문
안보윤 지음 / 작가정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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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각각의 우주를 돌고 있는 외로운 행성처럼 멀리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존재가 아니라는듯이,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 누군가의 중력을 느끼곤 한다. 혼자 부유하던 마음을 땅에 내려붙여 쉬어가게 만드는 힘은, 이 넓은 세상에서 여전히 누군가가 제 몫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무게감이다. 저마다 빛나는 우리 삶이 혼자이되 세상은 고독하지 않다는 이 신호는 언젠가 내 삶의 힘으로 누군가를 끌어당겨 주고 싶다는 의지가 되어 묵묵히 나만의 궤적을 돌게끔 만든다. 

 별다를 것 없이 평범한 하루와, 아끼는 것들을 모아놓은 작은 주머니, 지금은 연락이 끊긴 인연들, 언젠가 비오는 날 낯선 사람에게 건네주었던 우산, 어제 꾸었던 꿈, 사소하지만 잊을 수 없는 순간 같은 것들을 가만히 헤아렸다. 짧고 잔잔한 글을 읽는 시간들 사이사이 쌓아두기만 하고 돌보지 않았던 일상이 되살아났다. 여름의 치열함이, 한해의 뜨거움도 물러나 조금은 맥이 풀린 시기에 어쩐지 위로가 되어주는 소소함이 '외로우면 종말'에 있었다.  

 '외로우면 종말'이라니, 세상 종말은 이미 예견되어 있다는 것일까 책의 내용이 궁금했었는데, 이 종말은 예상 밖의 외로움에서 비롯되었고, 이 산문집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언제 어느 책장을 펼쳐도 36.5도 즈음의 온기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부드러움과 다정함 속에서 작가는 '"내 밤을 왜 니가 가져?"(174)'라는 당당한 목소리와 주체성이 인상적이었다고 하지만, '외로우면 종말'을 읽던 9월의 어느 밤은 작가가 가져갔음이 분명하다. 이제는 '니 밤을 왜 나를 줘?'하고 답해오려나. 

 책을 읽는 동안 몇개월 전에 미리 예약해둔 부모님의 건강검진 사전질문지를 확인하고, 내시경 준비를 위한 약을 체크하고, 새벽같이 출발해 검진실로 들여보내 드리고 난 참이다. 그 날의 나와 언젠가의 작가가 같은 벽 앞에 서서 어른이 된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겹쳐보일 때도 있었다. 가끔 사소한 것을 모르고 지내왔거나, 중요한 일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벽 앞에 서봤던 마음으로 그들에게 '얘'하고 말을 붙여 한걸음 등을 밀어주는 그런 사람이 나도 되어주고 싶단 생각을 했다.    

 안보윤의 첫 산문집을 읽는 동안 하릴없이 어수선하던 마음이 잠시 머무르며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 칼럼을 제안 받던 식사 자리에서 스스로를 내려누르려다 타인에게마저 무례해졌던 지난 날을 내보이던 작가가, 처음으로 차려내준 '솥밥' 속 짧은 이야기들 틈마다 표고버섯향이 나는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함수는 모를지라도 오히려 계산적이지 못한 대신 선의를 나누고 받을 줄 알아 다행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또 어떤 세상과 사람을 풀어내 줄 것인지 기대해본다. 그가 쓰고 우리가 읽는 동안 세상이 종말로부터 조금 멀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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