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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인초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5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평점 :
몇 번을 더 해 읽으면서 이제, 소세키의 글에는 좀 익숙해졌구나 싶었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니 사실 조금은 읽기에 나태해진 면도 있던 것 같다. 가장 느린 호흡으로 중반을 다다르니 마치 히에이잔에 오르다 지친 고노의 심경이 되살아난다. 산에 오르는 것 같이 벅찬 호흡으로 첫 부분을 읽었던 것 같다, 나는.
소세키만의 표현법이라고 해야할지, 대체적으로 길고 긴 서술의 끝에 간신히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말하자면 방이 하나 있다, 소세키는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 방의 크기부터 시작하여 벽지의 색, 놓여진 가구의 위치나 빛이 들어오는 모양을 천천히 짚어 설명해주고 난 뒤에야 그래서 그 방에서 찾고자했던 인물이- 혹은 물건이 거기에 있었다고 말하는 식이다. 거의 매 장면이 그러한데, 책의 중반정도 가보니 어느 정도 서술이 시작되면 금새 그 방의 윤곽이 잡히고 이번엔 무엇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지 설명이 귀에 들어오게 된다. 그 뒤부터는 금방이었다. 정상을 지나 내려가는 길만 남은 것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그리하여 곧 내려오는 끝이 아쉽게 느껴진다.
[다른 두 세계는 8시발 밤기차에서 뜻하지 않게 엇갈린다.
내 세계와 내 세계가 엇갈렸을 때 할복을 하는 일이 있다. 자멸하는 일이 있다. 내 세계와 다른 세계가 엇갈렸을 때 둘 다 무너지는 일이 있다. 부서져 날아가는 일이 있다. 혹은 길게 열기를 끌며 무한한 것 속으로 사라지는 일이 있다. 생애에 한 번 굉장한 엇갈림이 일어난다면 나는 막을 내리는 무대에 서는 일 없이 스스로가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하늘로부터 받은 성격은 그제야 비로소 제일의로 약동한다. 8시발 밤기차로 엇갈린 세계는 그다지 맹렬한 것이 아니다. ]
읽다가 모든 인물들과 관련된 첫 교차점이 보이는 것 같은 순간이 바로 여기서부터 였다. 삼분의 일 정도 읽었을까 싶었는데, 시치조의 밤 기차에 탄 채로 '서로의 세계가 어떤 관계로 엮어질지 모르는' 사람들이 같은 장소와 시간 안에서 운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얼핏 꽤나 중대한 운명에 대한 이야기같이 느껴지지만 삼각 혹은 사각 정도 되는 관계의 클리셰라고 할 수 있는 설정이 주를 이룬다. 얽힌 관계에 놓여있는 네 남녀는, 후지오를 결혼상대로 생각하고 있는 무네치카와 장래가 유망하지만 가진 것이 없어 자신 앞에서 약할 수 밖에 없는 오노를 결혼상대로 생각하고 있는 후지오, 오노가 힘든 시절 보살펴 준 은사의 딸로 오노와 결혼할 것이라 여기고 있던 사요코, 책임을 느끼는 사요코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후지오 사이에서 선택의 갈등을 하고 있던 오노이다. 계속되는 오노의 치졸한 행동을 두고 무엇을 위해 두 여자가 그렇게도 신경쓰고 괴로워해야 하는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오노는 변했다.
5년 동안 하루도 잊을 수 없었던, 목숨보다 확실한 꿈속에 있던 오노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5년 전은 옛날이다. 서쪽과 동쪽으로 갈리고, 길고 짧은 옷소매로 갈리고, 이별의 슬픔을 가리는 저녁 구름이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의 빗장이 되어, 만나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진 지난 세월 동안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바람 불면 변할 거라고 생각하고, 비 내리면 변할 거라고 생각하고, 달밤에 핀 꽃을 보고도 변할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이렇게는 변하지 않았기를 빌며 플랫폼에 내려섰다.]
오노의 달라진 모습을 두고 사요코가 떠올린 생각을 읽으며 오래 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 기대와 실망, 부질없어진 믿음의 변절이 얼마나 그대로 인간의 내부에서 선연히 이루어지고 반복되고 있는지 곱씹었다. 세계가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던 부분이었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두고도 그대로인 사람의 마음들이 지속되는 세계를 만들고 있다고. 또, 누군가를 만나고 또 짝을 이뤄 결혼을 하는 일이 복잡하고 미묘한 완력의 차이를 두고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때나 지금이나 오래두고 만나온 사람과의 도의적 책임이나 앞으로 주어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라는 인물을 둘러싼 이야기는 또 참 흥미진진하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모든 등장인물이 한 자리에 서서 마주했을때 매력적인 인물이라 여기고 있던 사요코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은 안타까웠다. 손 위에 놓여진 쉬운 상대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오히려 먼저 단절을 선고받고야 만 입장이라지만, 그녀의 자존심을 두고 더 강하게 대처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나름의 응원을 보냈던 인물이라 더욱 그러했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그저 장을 덮고 시선을 멀리 두고 가만히 읽어온 시간을 반추했다. 누군가에게 함께 읽기를 권하기보다 그저 읽었다면 그 곁에서 따뜻한 겨울의 볕을 두고 마지막 장의 침묵을 함께 즐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독특한 아우라가 남았다. '이곳은 만이 유행한다네.'
# 함께 들은 음악
김지연 Oblivion ; 학생 때 처음 들었던 탱고 곡이다. 음울한 느낌이 전반적이지만 그 중 열정적이면서도 관능적인 느낌이 묻어 있어 읽으며 자주 떠올라 들었다.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n6idiKuDiZ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