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
김희진 지음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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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진 작가는 처음이다. 책의 표지를 보고 있으면 깔끔한 디자인이 꽤 인상적이다. 욕조의 배수구와 어지러이 널린 실핀들이 도드라지게 되어 있어 진짜 실핀인 줄 알고 집으려 했던 적도 있다. 책을 읽는 동안 계속 이 인상적인 표지를 꽤 마음에 들어했다. 매우 하얗고, 또 매우 까만 색으로 이루어진 표지를 보고 있으면 단정한 것 같으면서 기괴한 느낌도 든다. 그리고 그 표지의 인상은 김희진 작가의 소설집의 전체적인 느낌과도 비슷하게 맞아 들어온다. 단정하면서도 기괴한, 이 친절하지 않은 소설과 만났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깊은 문장과 마주하게 되면 그 부분을 반드시 꼽아놓는 편이다. 좋아할만한 구석을 찾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마주한 문장들은 현실감있는, 지극히 피부에 와 닿는 실재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공감할 수 있는 작고 세밀한 일상의 조각들이 소설에도 담겨 있었다. 비록 이 소설집 안의 작품들이 일상과 거리가 먼 것을 말하고 있더라도, 그 안에는 일상이 담겨있다. 이상한 조화다.

 

 "그들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혀의 저주 같은 말, 말, 말들. 세상이 어지러운 건 저놈의 혀와 혀가 뱉어 내는 말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만의 조용한 식사는 오늘도 이렇게 끝이 난다."

 

 주인공은 말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말을 하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시거워한다. 사실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대부분은 좋지 않은 말이다. 남의 말을 하더라도 칭찬보다는 흉이 더 재미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굳이 시간과 수고를 들여 좋은 말을 하려고 하진 않는다. 그게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소설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혀가 입 밖으로 빠져나와 공중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혀는 자신의 주인이 내뱉었던 말을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한다. 그 말들 때문에 온통 혼란이 온다. 설정이 참 독특하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언령'이란 것이 떠올랐다. 말에도 힘이 있어서 말을 하면 그대로 일이 이루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쉽게 속담으로도 '말이 씨가 된다'하는 등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말을 가볍게 하지만 가볍게 뱉어낸 말에 사실 무거운 힘이 있어서 그게 곧 짐이 된다. '언령'이란 말을 듣고 난 뒤로 불길한 말을 함부로 입에 담지 않게 됐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하지 않으니 곧 그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입밖으로 내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않은 일처럼 여겨지기도 하니, 말이 가져다 주는 힘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크다.

 

 "누구도 빌려 간 적 없는 책이 분명했다. 책은 아주 깨끗했고, 새것처럼 아직 길들여지지 않아 표지를 여는 데도 좀 뻑뻑했다. 나는 새 책을 처음 열 때의 그 순간을 좋아한다. 특히 이처럼 하드커버로 된 경우가 그렇다. 미닫이문을 열 때처럼 양장본 표지를 열 때도 미약하지만 '쩍쩍' 소리가 난다. 표지 안쪽의 책등 부분이 벌어지면서 나는 소리였는데 새 책일수록 그 소리가 컸다."

 

 새 책, 새 물건을 처음으로 손에 넣었을 때 느끼는 감정을 옮겨놓았다. 특히 하드커버로 된 책을 처음 열어볼 때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난다는 점이나 약간의 뻣뻣한 느낌을 표현한 점이 좋았다. 생활 속에서 얻어진 생생함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부분이 좋다. 이런 곳에서 공감을 느끼면서 작가와의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타인과 연결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소설 속에서 공감가는 부분을 보게 되면 그 느낌이 더 크게 느껴져서 좋다.

 

 "알랭 씨는 경보 수준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로 걷는다. 보도를 따라 걷다 보면 마주 오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칠 때가 있다. 페이스가 끊기게 되는 주원인이었다. 그럴 때마다 알랭 씨는 얼굴을 잔뜩 응그리며 혀를 찬다. 당신들이 내 운동을 방해할 권리는 없어. 비켜. 저리 비키라고! 알랭 씨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주 오는 사람들의 어깨를 일부러 치고 가기도 했다. 물론 죄송하다는 말을 건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주인공이 알랭씨라고 해서 외국인이 주인공인가 했는데 프랑스인의 이름을 딴 한국인의 이름이었다. 알랭씨는 괴팍한 주인공이다. 당최 정이 안가고 이름대로 차가운 사람인 것 처럼 보이는데, 그가 점점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가는 과정이 조금씩 보여 재미있다. 알랭씨의 이야기 중에서 저 부분을 꼽은 건, 역시 공감됐기 때문이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을 때, 또는 거리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치였을 때 저런 생각을 품어본 적이 있다. 알랭씨가 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긴 해도 사실 내 안에도 알랭씨같은 면이 존재한다. 

 

 "남자가 수줍게 웃으며 네, 하고 대답했다. 그때까지도 남자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찍어 대고 있었다. 여자는, 땀이 많은 사람치고 악한 사람은 없다는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이 땀에 관한 얘기는 주변에서 실제로 체험한 적이 있는 신빙성있는 부분이다. 땀이란 것이, 단순히 더위를 느끼는 정도만 나타내는 게 아니라 감정의 동요를 꽤 정확하게 나타내기도 한다. 여자와 관련된 상황에서 여지없이 폭포수같은 땀을 보이는 남자는 대부분 순박하다. 는 두번째 케이스를 이 책에서 마주했다. 그 땀에 대한 꽤 정확한 이론을 이 책에서 또 마주한 것이 의외였다. 잘 몰랐지만 땀이 많은 사람치고 악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 엄마 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말처럼 널리 알려진 말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는 이상한 상황들이 아무런 설명없이 막 던져져있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처럼. 혀들이 공중에 떠다니고, 세상의 빨간색이 없어지고, 욕조에서 자는 여자가 있고, 해바라기로 사람을 고문하기도 한다. 이런 독특한 상상이 재미있으면서도 불친절하다. 문장이 좀 건조한듯한 느낌을 주는 탓도 있지만, 그 독특한 설정을 보고 있으면 난데없이 낯선 곳에 내쳐진 기분이 들게 만든다. 인상적인 소설들이 많다. 김희진 작가만의 개성을 느껴보기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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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님전 시공 청소년 문학 50
박상률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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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님전은 구수하다. 개님전의 황구, 누렁이, 노랑이 식의 표현을 따르면 노란 애기똥같은 매력이 있는 소설이다. 구수하다는 말이 색다르다는 말과 어울릴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히 이 책은 구수해서 색다르다. 청소년들을 위해 쓰여진 책 중에서 이렇게 구수한 맛을 내는 작품을 보기는 처음이다. 개인적으로는. 온통 사투리가 가득하고 구어체로 되어 있다. 판소리를 한마당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판소리치고는 좀 더 세련된 느낌이지만. 구식이라고 하기에는 세련됐고, 요즘 식이라고 하기에는 구수하다. 이 독특한 청소년 도서, 가볍게 읽히지만 그 안에 배움와 재미가 골고루 들어가 있다. 우리 토종인 진도개에 대해서 알 수 있고, 시골 문화, 사투리의 맛도 볼 수 있는 책이다.

 

 개님전은 말 그대로 개가 주인공이다. 진도에서 태어난 노란 털의 진도개, 황구와 황구가 낳은 마지막 새끼들 누렁이, 노랑이와 황구의 주인댁 노랭이 황씨 할아버지네 집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얘기도 있고, 어디선가 들어봤던 이야기도 나온다. 무엇보다 특별한 점은 개의 생활과 습성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나온다는 점이다. 집 안에서 키우는 사람같은 개가 아니라 개답게 자라는 개 본연의 모습으로. 소설은 액자식의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첫 장면이 황구네 집에 팔려갔던 누렁이가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황구는 추위에 지쳐있는 누렁이를 보듬어주고, 황구가 누렁이와 노랑이 자매를 낳던 때의 시간으로 넘어가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실 쥐들은 개 냄새와 개 소리가 났을 때 이미 절반은 넋이 빠져나간 상태였것다. 그런 상태에서 패대기까지 쳐지자 더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렷다. 개 냄새와 개 소리는 고양이의 것과는 달리 치명적이었으니. 고양이 냄새는 별로 고약하지도 않고,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소리도 그다지 몸서리 쳐질 정도는 아니었것다. 그런데 개 냄새와 개 소리는 다르다. 개 냄새는 마치 연기에 질식되는 것처럼 괴롭고, 개 소리는 고막을 찢는 것처럼 아프고 공포스럽게 들렸으니."

 

 집에서 개를 키워본 적도 없고 애초에 집에 쥐가 들끓은 적도 없어서 집에서 키우는 개가 쥐를 잡는다는 얘기는 개님전 읽다가 처음 알았다. 나만이 아니라 이 책을 읽는 아이들도 멘탈이 붕괴 되는 얘기일 것이다. 쥐잡는 건 고양이인줄만 알았는데 옛날에는 개도 쥐를 잡았나 모르겠다. 개 좋아, 짱 좋아 뭐 이런 표현이 나오는 것만 봐서는 그렇게도 옛날은 아닌 것 같은데, 배경이 언제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쥐가 고양이보다 개를 더 무서워한다니. '고양이 앞에 쥐'라는 말도 있는데 개님전에 나오는 쥐잡는 개에 대한 얘기는 진짜 새로웠다. 진도개가 주인공이라서 있을 수 있는 에피소드일지도 모르겠다.

 

 "노랑이가 다시 물었다. "부르기 전에 뛰어 들어가믄 안 되는 것이여?" "미리 뛰어가 있을 필요까정은 읎어. 너무 앞어가도 우릴 재빠른 진도개라 안 하고, 눈치 빠른 여시 취급허거든." "근께 여시 취급은 당허지 말고, 그냥 개 취급 받는 선에서 살어라, 그 말이제?" "뭣이든 지나치믄 모자란 것보다 못헌 벱이여." "

 

 애기 똥을 먹는 수업을 받는 한 대목이다. 똥을 싸서 밖으로 내어놓으면 그 똥을 집어먹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애기가 똥을 싸면 방 안으로 들어가 직접 애기 엉덩이에 묻은 똥을 핥아 먹는다니 이건 또 새롭다. 이 전에는 황구가 새끼들에게 앞으로는 애기 똥을 먹으라고 하자 개들이 그건 좀 비위상한다고 꺼려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꽤 우습다. 개가 똥을 가리다니. 생각 이상의 것만 이 책에 담겨있나보다. 그 밖에도 황구는 쥐잡는 법, 노루잡는 법, 개가 지내여 할 개격에 대해 부지런히 새끼들에게 알려준다. 살뜰히 챙기는 모습이 사람과 다를 바가 없고 개들이 사람말을 다 알아듣고 사람처럼, 사람보다 낫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탓에 배우면서 읽는 책이다.

 

 "노랑이도 떠나고 누렁이도 떠난 헛간에 황구는 홀로 엎드려 있는 시간이 많아졌것다. 무슨 일을 해도 흥이 나지 않았것다. 나이가 들어 더 그런지 모르겠지만, 요즘은 헛간에 엎드려 노랑이와 누렁이의 냄새를 떠올리는 게 아주 중요한 일이 되고 말았으니."

 

 꽤 감상적인 부분이다. 누군가와 이별했을때 그를 떠올리는 수단으로 냄새를 기억하는 일이 있다. 개뿐만 아니라 사람도 그렇다. 냄새를 맡거나 떠올리고 있으면 더 많이 생각이 나고 그리움도 짙어진다. 이 책은 단순히 재미만 주고 끝나는 것은 아니고, 개에 대해서 모르던 것도 알고, 또 황구와 새끼들의 이별을 통해 동물에 대해서 헤아려줄 수 있는 생각의 여지도 준다. 아동도서 '순둥이'가 떠오르는 부분이다. 순둥이라는 순한 강아지가 새끼를 낳게 되면서 어미 개로 성장하고 새끼들과 이별하는 과정을 그려낸 동화다. 이 책의 흐름과도 비슷하다. 초등 저학년에게는 '순둥이'를 추천하고 초등 고학년, 중등까지는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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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에블린 민음사 모던 클래식 57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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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에서 나오는 시리즈들은 꽤 괜찮다. 그리고 아주 매력있다. 고전들, 가볍지 않게 읽을만한 양서들을 모아놓은 시리즈들을 보고있으면 책장을 온통 정갈한 민음사 시리즈들로 채우고 싶은 욕망을 갖게 한다. 그래서 실제로 한권 두권 모으고 있는 주변 사람들도 있다. 세계문학전집들도 그렇고, 모던클래식도 그렇고. 세계문학전집 275번과 모던클래식 57번을 같은 날 읽기 시작했는데 57번을 먼저 다 읽었다. 모던클래식 57번은 '아담과 에블린'이다. 그렇다면 세계문학전집 275번은 무엇일까!? 하는 건 장난이고. '아담과 에블린'을 떠올려보자.

 

 맨 처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이 책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호흡이다. 호흡이 들쑥날쑥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부담스럽거나 읽는 이의 호흡까지도 흐트러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강약조절이 잘되어 있다고 하나, 약 400쪽 가까이하는 분량을 지루하지 않게 읽도록 돕는다. 아담과 에블린의 감정 싸움에서 여행으로 카탸와의 만남까지 번져가며 촛점이 두사람에게서 벗어나며 흐름이 느리게 진행되는가 싶다가도 또 매우 빠르게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사만으로 처리된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부분을 보고 있을 때면 '거미여인의 키스'가 떠오른다.

 

 "난 나에 대한 배신이 그저 신발 문제로만 끝나기를 바랐어. 아니면 정원이나 그도 아니면 안락의자나. 그렇게 원한다면 그 여자 당신한테...... 당신이 그게 그렇게까지 필요하다면 말이야. 그렇게 원하는 일이라면 눈감아 줄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난 알고 싶지 않았어. 보고 싶지도, 감 잡고 싶지도 않았다고. 알겠어? 내가 시청 지하식당에서 달려나갔을 때, 갑자기 내면의 목소리가 들렸어. 조심해, 조심하라고! 하지만 난 그 소릴 듣지도 않았어. 하지만 이젠 다 알아 버렸고. 봤어. 이걸로 끝이야. 전달 사항 끝이라고!"

 

 사건의 발단이다. 아담과 에블린의 아슬아슬한 일상이 어긋나는 순간이었다. 100% 신뢰하는 남녀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신뢰. 아름다운 말이다. 남녀관계에서도 필요한 덕목 중 하나다. 신뢰가 없는 관계는 괴로울 뿐이니까. 그런데 신뢰라는 것이 어쩌면 상대방에 대한 오만이 될 수도 있다. 에블린은 아담을 신뢰하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 사이의 문제를 회피했을 뿐이다. 아담은 에블린이 아담을 신뢰하지 않는 만큼, 에블린을 신뢰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위태로웠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부분이었다. 에블린 내면의 경고, 그리고 피하고 있던 문제와의 마주침. 에블린은 그 순간 아담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를 두고 여행을 떠나버린다. 그리고 그런 에블린의 뒤를 아담이 쫓는다.

 

 "서로 싸울 때라도 아담은 그녀에게 친밀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런 관계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적어도 자신을 속이고 바람을 피우는 남자보다는 나은 사람을 만나야 마땅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얼굴을 남자보다는 나은 사람을 만나야 마땅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얼굴을 아담의 오른손에 묻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손을 그의 티셔츠 소매 안으로 넣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어깨를 쓰다듬으며 목까지 올라가 손가락 끝으로 그의 목젖을 만졌다. 그의 목젖은 마치 동물처럼 이리저리 도망을 가다가도 이내 다음 순간에는 언제나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부정한 상대와 만나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생각이 반드시 실천으로 옮겨지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생각 뿐. 결국 감정적으로 또는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길을 택하고 만다. 인생이 쉽지 않다는 것,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여기 있다. 나쁜 상대에게 끌리거나, 나쁜 상대를 나만은 이해하고 고쳐줄 수 있다는 맹신이 여기에도 적용되는지 모르겠다. 아담과 에블린의 관계를 보면, 왜 서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말도 안되는 거짓을 변명하고 있는 아담을 보면, 에블린의 괴로움이 전해져온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게 끈질기게 따라붙는 아담. 그리고 결국 아담의 곁으로 돌아가는 에블린. 서로에게 나쁜 상대는 누구일까.

 

 " "장벽이 무너졌어."라고 마레크가 말했다.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라고 에블린이 물었다. "모두 다! 텔레비전은 베를린만 보여 주고 있어. 모두가 다 뛰어넘어 갔어. 지난밤부터 벌써. 너희들 말고 그걸 아직까지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가 맹세한다니까!" 마레크가 손을 번쩍 들었다. "기다려 봐!" "마레크, 그러지 마. 제발!" 마레크가 나이 지긋한 부부에게로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제 여자 친구가 제 말을 믿지 않네요. 베를린 장벽이 없어졌다는 걸요." "이 사람 말이 맞아요."하고 남자가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담은 동독의 재봉사다. 그는 동독에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한다. 에블린은 동독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에블린은 서독으로 넘어가길 원하고 그런 에블린을 따라 아담도 서독으로 간다. 서독과 동독은 문화와 환경이 다르다. 동독에서 어려움없이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며 지내던 아담은 서독에서 좌절을 겪는다. 장벽이 무너진 뒤 동독으로 집으로 돌아가서 보게 되는 것은 엉망이 되어버린 자신의 소중한 것들 뿐. 아담과 에블린의 이야기를 보다 보면, 성경 속의 아담과 하와가 떠오른다. 하와로 인해 선악과를 먹게 된 아담이 만족스러운 에덴에서의 생활을 잃게 되는.

 

 읽고 난 뒤에 강렬한 느낌과 재미가 차오르는 책이다.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좋은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떤 울림이 있는, 어떤 울림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울림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단순히 아담과 에블린의 사랑에 대해서가 아니라, 베를린 장벽으로 가로막힌 독일, 장벽이 무너진 독일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하고 느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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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를 위한 직업 콘서트 - 행복한 꿈을 찾는 직업 교과서 꿈결 진로 직업 시리즈 꿈의 나침반 1
이랑 지음, 김정진 그림 / 꿈결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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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직업에 관한 책이 우후죽순으로 나오던 시기가 있었다. 대부분 만화와 인터뷰가 어우러진 형식으로 다양한 직업을 소개하고 직업의 전문가의 인터뷰를 따고 그림으로 직업인의 모습이나 환경을 묘사해놓은 형식이었다. 아이들은 꽤 좋아했는데 이내 흥미를 잃었다. 만화만 몇번보고 아이들 사이의 유망직종만 살펴보더니 말았달까. 가벼운 책은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는 법인가 했었다. 그래도 그 책들을 살피면서, 요새는 직업에 대해 소개하는 책도 이렇게 나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꿈결에서 나온 이 청소년 교양서 시리즈, '십대를 위한 직업 콘서트'는 어떨까 궁금했다. 다른 책들과 차별화가 됐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표지 디자인을 봤을때,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고학년 정도가 그 대상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왠걸 내용은 중고등학생용이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가장 내용이 충실하달까, 중고교생들 수준에 좀 맞을만한 내용이 있는데 표지가 아쉽다. 지금 다시 봐도 겉과 속이 좀 따로 노는 느낌이라 아쉽다. 초등학생용으로 알록달록한 표지를 보고 산다면 내용이 맞지 않을 것 같고, 요새 성숙하고 세련된 중고등학생용으로는 선뜻 손이 가지 않을 것 같아 안타까웠다. 내용은 괜찮은데.

 

 "직업의 세계에서도 하나의 직업은 다른 직업의 도움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세상에 있는 직업은 나름대로 존재하는 이유가 있고,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다.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 나가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누군가가 해 주기 때문에 나 역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는 어렵고 위험하고 더러운, 3D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누군가를 대신해 힘든 일을 하고 있는 걸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직업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직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성숙한 사고를 하도록 요구하는 말들이 많다. 직업에 대한 설명을 해주면서 결국 직업을 갖는다는 건 우리 사회의 한 일원이 되는 것이고, 우리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우리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도 말해주고 있다. 직업에 귀천이 없고, 늘 다른 사람들의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도 알려줄 수 있다. 내가 앞으로 뭘하고 싶은지에 집중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려준다. 무엇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떤 자세로 어떻게 하는가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직업에 대한 정보 뿐만 아니라 사회와 직업에 대한 에티튜드를 함께 가르친다는 것이 장점이다.

 

 "사람들은 일을 하며 정당한 대가를 받고 싶어 한다. 일한 만큼 대가를 받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분노한다. "내가 이 돈을 벌려고 그 고생을 했단 말이야?" 돈의 액수보다도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억울하기 때문이다. 결국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것은, 별 노력 없이 돈만 많이 주는 직업을 원한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그런 도둑놈 심보를 가진 사람들은 실제로 '도둑놈'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전제하에, 그에 대한 만족스런 보상을 바란다. 일에 대한 보상은 사회적 지위, 명예, 자아실현, 보람, 칭찬, 행복 등 다양하지만, 돈은 일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아이들 중에도 커서 "내가 이 돈을 벌려고 그 고생을 했단 말이야?" 이 말을 그대로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10년이고 20년이고쯤 뒤에 이 말을 그대로 말하고 놀랄 일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웃기지만 사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한번쯤은 또는 몇번이고 하게 된다. 우리가 원하는 노동의 댓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노동의 댓가보다 거의 매번 더 크기 때문이다. 누군든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이 지닌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 가치에 대한 보상을 '사회적 지위, 명예, 자아실현, 보람, 칭찬, 행복 등'으로 나눠 충당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돈으로만 받으려고 한다면 이런 말은 더 많이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돈만을 따져서 직업을 선택하면 스스로가 괴로워지는 것이다. 저런 다른 보상과 함께 돈이 딸려있어야 그래도 그 안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돈을 더 많이 벌고 싶다는, 돈만 많이 주는 직업을 원하는 것은 무조건 도둑놈 심보만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얻을 수 있는 다른 가치를 따로 찾지 못해서 돈에 더욱 집착하는 것일 수도 있다. 누구나 꿈꾸는 직업이 있을 것이고 진심으로 그 꿈에서 돈만 많이 벌기를 원하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직업을 통해 다른 가치도 얻을 수 있는 꿈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자신의 주체성없이 무조건 공부만을 하던 아이들에게 꿈을 갖고 거기서 돈 외에 가치있는 보상을 기대한다는 그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결국 진짜 유망직업은 '내게 희망을 주는 직업'이어야 한다. 성취감과 보람을 느끼게 해 주고, 가족들과도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희망을 주는 직업 말이다. 제아무리 미래에 유망하다 해도, 일할 곳이 없어지거나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가족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직업은 희망을 줄 수 없다."

 

 이건 정말 중요한 말이다.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나와 남까지 힘들게 하는 직업은 돈을 많이 준대도 좋은 직업이 아니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도 그것을 상쇄시킬만한 다른 가치가 그보다 더 크지 않은 직업이라면 절대 좋은 직업이 될 수 없다. 특히 현대인은 정신적인 부담에 취약하다. 자신을 스스로 잃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스트레스 없는 직업은 없지만, 그것을 상쇄시킬만한 다른 요소가 전혀 없는데 오로지 돈 때문에 그 일에 매달리고 있다면, 금방 사라질 돈 때문에 자신을 망치게 될수도 있다. 더불어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내 주위 사람들, 특히 가족들까지 나로 인해 불행할 수도 있다. 돈을 좀 덜 벌더라도 스트레스가 적거나, 다른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 몇 단락에서는 문과와 이과를 선택하는 것, 대학교, 학과 선택 등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이 많이 있다. 직업 적성 검사 테스트를 할 수 있는 사이트도 정리되어 있어서 유용하다. 책을 읽으면서 직업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항공사에서 승무원을 뽑을 때 키를 암리치라고 해서 까치발을 하고 손을 다 뻗은 키가 208cm이상이어야 한다거나, 직업군을 나눌때 색깔별로 나눠서 블루칼라/화이트칼라, 골드칼라/실버산업, 녹색직업/갈색직업, 노란색직업/보라색직업 (색채의 상징, 색채의 심리/박영수/살림 참고) 등으로 나눈다거나, 요새 한참 책으로 나오는 도시 건설에 관한 직업 '도시계획가'에 대한 얘기,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들의 마음을 읽기 위해 개발된 소셜 엑스레이에 대한 소개, 티비에서 본 적 있는 국내 최초 시각장애인 아나운서 이창훈 아나운서에 대한 얘기까지 정보가 다양하게 실려 있어 보면서 참고하며 읽었다. 새로운 것을 접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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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빛깔 - 여성동아 문우회 소설집
권혜수 외 지음 / 예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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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 목록이 엄청나다. 16인의 여성작가들이 16편의 단편을 담아냈다. 여자 셋이 모여도 접시가 깨진다는데 16인이나 모여있는 이 책에서 조분조분한 말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의외로 조용하다. 말 그대로 오후의 빛깔을 담아낸듯한 분위기가 전체에서 흐른다. 햇빛에 약간의 노란빛이 섞이는 시간, 그때의 한가로움, 어딘지 모를 약간의 처짐, 막막함같은 느낌이 묻어난다. 글 자체는 대체로 매우 여성적이다. 세밀하고 작은 것에 집중하여 피부에 묻어나는 것 같은 이야기를 써냈다.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자들의 소설집이어서 그런가, 다른 듯하면서도 같은 느낌이다. 그쪽의 취향이 반영된 작가들이 선발되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작가들의 사진과 꼬릿말이 달려있는데 어떨 땐 그부분을 보는 재미가 더 각별하고 기다려질 때도 있었다. 왜냐면 작품이 끝나고 난 뒤에 맨 끝에 공개되어 있어서다. 이 글은 어떤 사람이 썼을까 궁금해하다 정답을 맞추는 기분으로 확인을 한다. 내게는 낯선 작가들의 얼굴이 익숙해보이는 것이 재미있고 이상했다. 다들 어딘가에서 감쪽같이 살고 있는 주변의 아줌마들처럼 보였다. 숨어있는 그림처럼.

 

 16편의 단편은 파랑 빨강 하양으로 나뉘어 줄을 섰다. 그런 구분을 두고 나눠있어서 그런가 파랑에서는 파랑의 빨강에서는 빨강의 하양에서는 하양의 느낌이 났다. 그냥 두었으면 그런 생각 못했을테지만, 나눠놓으니 또 그런 것만 같이 느껴졌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빨강의 느낌이 나는 빨강부분이었다. 파랑, 빨강, 하양이라는 말을 보고있으니 불현듯 프랑스가 떠올랐다. 또 그 비슷한 제목의 영화도 떠올랐다. 보고싶었는데 아직까지 보지도 못했고, 사실 내 취향이 아닐 것만 같은 영화였는데 다시 보고싶어졌다. 어쩌면 그 영화를 보면 이 책을 읽는 느낌과 똑같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진심으로 신희는 떠나고 싶었다. 그러면 막막한 드라마도 풀리고 꽉 막힌 삶에 가라앉은 먼지도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충동적인 사랑, 기꺼이 맞아들이고 싶었다. 푸른 새벽이라는 특정한 공간의 부추김에 기대어. "그러면 대하드라마가 재미있게 진행될 텐데 말이죠. 작가님한테 좋은 소재를 제공할 때가 있겠죠." 신희는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남자는 그냥 드라마 작가한테 어울리는 농담을 했을 뿐인데, 진심으로 달아올랐으니."

 

 푸른 새벽이라는 말이 있듯이 파랑에 해당하는 단편 중 하나였다. 파랑은 어딘지 모르게 공상같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우연한 로맨스를 꿈꾸는 듯한 내용, 새벽과 얽혀있는 내용이. 드라마 작가가 되려고 노력하는 여자 앞에 곧 교도소에 들어가게 될 남자가 나타난다. 그 남자가 가진 묘한 분위기와 은근한 신호를 감지한 여자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예 모르는 채 넘어가지도, 능숙하게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모든 게 어색한 채 꿈만 꾸는 여자의 모습을 보면서 약간의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나도 결국 그런 사람일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자가 주인공인 소설도 좀 있지만 그대로 대부분 꽤 섬세한 편이라 부분 부분 공통점을 찾게 된다.

 

 "엄마가 주는 돈으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건 내게 상당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엄마가 내 몫으로 마련한 아파트가 없다면, 그 자본의 힘이 없다면, 내가 이렇게 우아한 백수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빈둥대는 내 저울추는 본의 아니게 자본의 힘에 있었다. 그래서 기부도 한다. 내 통장에서는 매달 일정 금액의 돈이 서너 군데의 복지재단이나 사회단체로 빠져 나간다. 만 원, 이만 원씩이 고작이지만 이 금액은 내가 이 사회에 부담하는 최소한의 책임의식이다."

 

 도대체 스타벅스라는 커피 체인이 주는 그 의미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큰 것일까 이제는 가늠하기도 어렵다. 능력은 없어도 돈 쓸 줄은 아는 여자들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가장 먼저 튀어나올 것만 같은 말이다. 스타벅스 커피컵을 자랑하는 여자는 이제 없다. 그래도 스타벅스 커피컵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허세, 무절제한 소비, 낭비벽, 생각없는 여자를 대표하는 말이 된 것 같다. 여기서도 이런 식으로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면 우아하고 여유로운 능력있는 사람으로 보여지지도 않고, 보여진 적도 없는데 대체 왜 그런 이미지가 뿌리박혔을까 모르겠다. 오히려 이 단편 속의 여자가 분수에 맞지 않게 느껴지는 부분은 백수이면서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운운하며 기부를 한다는 점이다. 동정은 자기 자신부터.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부분이다.

 

 "아줌마들은 하나같이 '처녀 때' 허리가 십구 인치였다고 한다. 아줌마들은 "이 사람은 나를 평생 사랑해줄 것 같다, 라는 확신이 왔어요. 정말 따뜻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었죠" 이렇게 말했지만, 결론은 "하지만 웬걸요. 살아보니 정말 그때 그 맹세는 다 잊어버리고 무심한 사람이 되었지 뭐에요"로 끝났다. 그러면 아줌마들의 공감 어린 폭소가 터졌다. 그럴 때 엄마는 억지미소를 짓곤 했다."

 

 아줌마들이 리즈시절을 회상할 때 꼭 나오는 말이 저 개미허리라는 게 공감된다. 그럼 내 리즈시절은 초등학생 때 정도 되려나 모르겠다. 우습지만 아줌마들은 정말 그런 말을 한다. 추억은 원래 더 아름다운 법이다. 그리고 누구도 그 시절로 돌아가 그 개미허리가 19인치인지 29인치인지 확인할 수도 없다. 즐거운 일이다. 믿어야지 어쩌겠는가. 누구나 한번쯤은 허리가 19인치였던 때가 있었을테니까 말이다.

 

 " "엄마는 쓸데없이 전화해서 집중력을 떨어드려. 나는 지금 전쟁터에서 격렬하게 총질을 하고 있다고!" 이런 핀잔을 듣고부터는 딸이 그리워도 아예 연락하지 않았다. 향긋한 봄과 시퍼런 여름과 애틋한 가을과 순박한 겨울, 그들이 들려주는 다채로운 노랫소리를 윤씨는 홀로 음미했다. 그녀에게 고독은, 또한 인내는 일종의 장기(臟器)와도 같은 것이었다."

 

 나이든 사람은 외롭지 않아보인다. 언뜻. 조금만 자세히봐도 사무치게 외로워보일텐데, 그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나이든 사람을 자세히 보려는 생각을 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나이든 사람에게 많은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마치 강요하듯이 그들을 획일화한다. 그들이 우리를 똑같이 바라보는 것은 참지 못하면서. 나이든 사람도 누군가 자신을 안아주었으면 하고 사람을 그리워하고, 지나간 일 투성이지만 이야기라도 나누었으면 하고 대화를 그리워하고, 때로는 요동치는 감정으로 고독을 느낄 때도 있을 것이다. 나이듦을 이유로 그것마저 인내하고 넘겨낸 것일 것이리라. 온 계절과 자기 안의 감정을 홀로 음미하면서 고독에 따라붙은 인내가 장기가 되었다는 표현이 안쓰럽다. 그립다는 말이 갑자기 사무친다.

 

 재미를 주는 소설집은 아니다. 어떤 느낌을 주는 소설집이다. 어떤 느낌인지 알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것을 공유할 수는 없는 듯한, 개인의 내면에 숨어있는 것들을 끌어올리는 느낌이다. 내밀하여 타인과는 공유할 수 없지만 사실 그 비슷한 것을 모두 각자 가지고 있는, 그 어떤 감각. 만약 남성 독자가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을 받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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