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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에블린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7
잉고 슐체 지음, 노선정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평점 :
민음사에서 나오는 시리즈들은 꽤 괜찮다. 그리고 아주 매력있다. 고전들, 가볍지 않게 읽을만한 양서들을 모아놓은 시리즈들을 보고있으면 책장을 온통 정갈한 민음사 시리즈들로 채우고 싶은 욕망을 갖게 한다. 그래서 실제로 한권 두권 모으고 있는 주변 사람들도 있다. 세계문학전집들도 그렇고, 모던클래식도 그렇고. 세계문학전집 275번과 모던클래식 57번을 같은 날 읽기 시작했는데 57번을 먼저 다 읽었다. 모던클래식 57번은 '아담과 에블린'이다. 그렇다면 세계문학전집 275번은 무엇일까!? 하는 건 장난이고. '아담과 에블린'을 떠올려보자.
맨 처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이 책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호흡이다. 호흡이 들쑥날쑥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부담스럽거나 읽는 이의 호흡까지도 흐트러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강약조절이 잘되어 있다고 하나, 약 400쪽 가까이하는 분량을 지루하지 않게 읽도록 돕는다. 아담과 에블린의 감정 싸움에서 여행으로 카탸와의 만남까지 번져가며 촛점이 두사람에게서 벗어나며 흐름이 느리게 진행되는가 싶다가도 또 매우 빠르게 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사만으로 처리된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부분을 보고 있을 때면 '거미여인의 키스'가 떠오른다.
"난 나에 대한 배신이 그저 신발 문제로만 끝나기를 바랐어. 아니면 정원이나 그도 아니면 안락의자나. 그렇게 원한다면 그 여자 당신한테...... 당신이 그게 그렇게까지 필요하다면 말이야. 그렇게 원하는 일이라면 눈감아 줄 수도 있었다고! 하지만 난 알고 싶지 않았어. 보고 싶지도, 감 잡고 싶지도 않았다고. 알겠어? 내가 시청 지하식당에서 달려나갔을 때, 갑자기 내면의 목소리가 들렸어. 조심해, 조심하라고! 하지만 난 그 소릴 듣지도 않았어. 하지만 이젠 다 알아 버렸고. 봤어. 이걸로 끝이야. 전달 사항 끝이라고!"
사건의 발단이다. 아담과 에블린의 아슬아슬한 일상이 어긋나는 순간이었다. 100% 신뢰하는 남녀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신뢰. 아름다운 말이다. 남녀관계에서도 필요한 덕목 중 하나다. 신뢰가 없는 관계는 괴로울 뿐이니까. 그런데 신뢰라는 것이 어쩌면 상대방에 대한 오만이 될 수도 있다. 에블린은 아담을 신뢰하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 사이의 문제를 회피했을 뿐이다. 아담은 에블린이 아담을 신뢰하지 않는 만큼, 에블린을 신뢰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위태로웠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부분이었다. 에블린 내면의 경고, 그리고 피하고 있던 문제와의 마주침. 에블린은 그 순간 아담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를 두고 여행을 떠나버린다. 그리고 그런 에블린의 뒤를 아담이 쫓는다.
"서로 싸울 때라도 아담은 그녀에게 친밀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런 관계를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적어도 자신을 속이고 바람을 피우는 남자보다는 나은 사람을 만나야 마땅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얼굴을 남자보다는 나은 사람을 만나야 마땅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얼굴을 아담의 오른손에 묻었다. 그녀는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손을 그의 티셔츠 소매 안으로 넣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어깨를 쓰다듬으며 목까지 올라가 손가락 끝으로 그의 목젖을 만졌다. 그의 목젖은 마치 동물처럼 이리저리 도망을 가다가도 이내 다음 순간에는 언제나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부정한 상대와 만나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생각이 반드시 실천으로 옮겨지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생각 뿐. 결국 감정적으로 또는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길을 택하고 만다. 인생이 쉽지 않다는 것,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 여기 있다. 나쁜 상대에게 끌리거나, 나쁜 상대를 나만은 이해하고 고쳐줄 수 있다는 맹신이 여기에도 적용되는지 모르겠다. 아담과 에블린의 관계를 보면, 왜 서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 말도 안되는 거짓을 변명하고 있는 아담을 보면, 에블린의 괴로움이 전해져온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게 끈질기게 따라붙는 아담. 그리고 결국 아담의 곁으로 돌아가는 에블린. 서로에게 나쁜 상대는 누구일까.
" "장벽이 무너졌어."라고 마레크가 말했다.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라고 에블린이 물었다. "모두 다! 텔레비전은 베를린만 보여 주고 있어. 모두가 다 뛰어넘어 갔어. 지난밤부터 벌써. 너희들 말고 그걸 아직까지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가 맹세한다니까!" 마레크가 손을 번쩍 들었다. "기다려 봐!" "마레크, 그러지 마. 제발!" 마레크가 나이 지긋한 부부에게로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제 여자 친구가 제 말을 믿지 않네요. 베를린 장벽이 없어졌다는 걸요." "이 사람 말이 맞아요."하고 남자가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담은 동독의 재봉사다. 그는 동독에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한다. 에블린은 동독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에블린은 서독으로 넘어가길 원하고 그런 에블린을 따라 아담도 서독으로 간다. 서독과 동독은 문화와 환경이 다르다. 동독에서 어려움없이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며 지내던 아담은 서독에서 좌절을 겪는다. 장벽이 무너진 뒤 동독으로 집으로 돌아가서 보게 되는 것은 엉망이 되어버린 자신의 소중한 것들 뿐. 아담과 에블린의 이야기를 보다 보면, 성경 속의 아담과 하와가 떠오른다. 하와로 인해 선악과를 먹게 된 아담이 만족스러운 에덴에서의 생활을 잃게 되는.
읽고 난 뒤에 강렬한 느낌과 재미가 차오르는 책이다.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좋은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떤 울림이 있는, 어떤 울림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 울림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단순히 아담과 에블린의 사랑에 대해서가 아니라, 베를린 장벽으로 가로막힌 독일, 장벽이 무너진 독일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하고 느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