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품이 조지 오웰의 <1984>나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와 비교되고 있다는 것을 책을 읽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에 더하여 나는 이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고 <가타카>라는 영화도 함께 떠올렸다. 부모로부터 우수한 유전자만을 물려받아 결점이 없는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미래사회에서 자연의 섭리대로 태어난 빈센트! 그는 심장질환, 범죄자가 될 가능성등 결점투성이 유전자를 가진 자신의 운명에 굴하지 않고 우주비행사가 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데 그런 빈센트를 보며 꽤나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영화 <가타카>가 유전자에 의해 상류계급과 하류계급으로 나뉘는 새로운 신분사회를 그려낸데 비해 <기억전달자>는 마을 구성원들이 동등한 생활을 하는 평등한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일단 태어난 아기들이 그 마을의 구성원으로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 조너스가 살고 있는 마을은 범죄, 기아, 가난, 장애, 이혼 등이 없는 평온한 곳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마을 사람들은 쾌락, 환희, 색깔, 음악 등을 느끼지 못한다.

마을의 원로들은 <늘 같음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되는 모든 기억들을 <기억보유자>만이 간직하게 하고, 사람들의 감정과 본능을 통제한다. 치밀한 통제하에 마을에서는 해마다 50명의 아이들이 태어나고, 아이들은 기초가족에 배정된다. 아이들은 열 두살이 될 때까지 원로들에게 끊임없이 성격과 재능이 관찰된 후 각자의 적성에 맞는 최적의 직위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열 두살 기념식때 조너스는 <기억보유자>로 선택된다.

조너스는 <기억전달자>로부터 인류의 역사를 이루는 수많은 기억들을 전달받는 훈련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배고픔과 전쟁등의 기억을 전달받을 때는 참기 어려운 신체적 고통까지 느끼지만,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그가 모르고 살았던, 그리고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그 모든 기억들은 마을의 <늘 같음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기억보유자>에게 봉인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기억보유자>덕분에 조너스가 살고 있는 마을은 치우침이 없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듯 보인다. 심지어는 집집마다 가구 배치까지 똑같고, 내리막이나 언덕도 없는 지형이라 조너스는 기억을 전달받는 훈련과정에서 "언덕"의 개념을 알았을 정도이다.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 한 명 한 명이 유기적이면서도 완벽한 시스템을 이루고 있는 곳! 하지만 엄청난 권위를 지닌 <기억보유자>도 컨트롤할 수 없는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임무 해제>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임무 해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독자들은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조너스는 기억전달자가 그들 마을의 체제가 어떻게 유지되는지 실체를 보여주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만약 태어난 아기들이 마을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할 것으로 판명되거나 노인이 되어 직위를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 그들은 <임무 해제>되어 마을에서 사라지게 되는데, 마을 사람들은 물론 조너스도 <임무 해제>된 아기나 노인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 채 살아왔던 것이다. 조너스는 보육사인 아빠가 따로 집으로 데려와 노력을 기울였던 아기 "가브리엘"이 마을에 부적합한 아기로 판명되어 <임무 해제>될 것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아기와 함께 마을을 탈출한다.

"하느님이 행하신 일을 보라, 하느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도서 7장 13절) - 영화 <가타카>의 주제를 함축하는 이 말은 <기억전달자>를 통해서도 같은 울림을 준다.  그런 점에서 조너스가 마을에서 탈출할 때 데려간 아기의 이름이 <가브리엘>이라는 것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완벽한 사회, 완벽한 평등을 이루기 위해 신의 영역인 태어남과 죽음까지 통제하는 인간의 오만함! 작가는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을 가진 대천사의 이름 <가브리엘>을 아기에게 부여함으로써 그 오만함을 경고하는 듯 하다.

사람들은 전쟁, 질병, 기아, 가난, 장애, 차별이 없는 유토피아를 늘 꿈꾸어 왔다. 하지만 "결국 그런 이상향도 이상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라는 의문부호가 남는것은 어쩔 수 없는 아이러니인것 같다. 결국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아무데도 없는 나라>일 뿐, 현실은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지금껏 반복되어 온 역사처럼 싸우고, 굶주리며, 차별받으며 괴로와 하며 살아갈 것이다. 조너스는 진짜 삶에 그런 고통이 있는 걸 알면서도 <늘 같음 상태>로 안주할 수 있는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에게 놓인 진짜 삶이 과연 아름답기만 할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책장을 덮으며 조너스의 삶이 더 이상 가짜 삶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조너스는 말한다. "저는 사랑이라는 느낌을 좋아하게 되었어요."라고... "어쩌면 사랑이란 살아가는데 위험한 방식일지도 몰라요."라고 그는 걱정하지만 사랑이야말로 삶에서 찾아오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진정한 용기를 내는 원천이라는걸 조너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짧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할 여지를 많이 던져주고 있다. 또 미래사회의 암울한 면을 흡입력 있게 풀어나간 내용이 꽤 재미있었다. 개인적으론 우리말의 어감을 잘 살려 번역하려 애쓴 번역가의 노력을 칭찬해 주고 싶다. 조너스의 친구 애셔가 세살 때 "Snack"과 "Smack"을 혼동하여 말하는 부분을 "맘마"와 "맴매"로 번역한 센스는 이 작품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매끄럽게 잘 살려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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