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어루만지면 창비청소년문학 123
박영란 지음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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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 보면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틀어 낯선 환경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가 있다. 19829월 부산으로 전학을 가 이모 집에서 공부를 해야 했던 순간이 정서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숫기 없이 당하고 사는 남동생을 혼자 보낼 수 없으니 덤으로 누나까지 엎어 부산으로 학적을 옮겨야 했다. 십 리를 걸어 통학하며 정들었던 친구, 교정, 개울, 가로수, 동네 어른들을 품고 도회로 나가 생활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학교를 오가며 적응하느라 힘든 생활도 그럭저럭 시간 따라 흘러가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친구들과 만나 우정을 두텁게 하는 사이 조금씩 하동에서의 시공간도 아련한 추억 속에 남게 되었다.


  “집은 잘 있어.”

   준이 장원으로 내려가 누나와 통화할 때마다 묻는 말이다. 얼마나 오래 그곳에 머물렀던가보다는 누구와 함께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따라 한 공간은 서사적 의미로 다가온다. 나의 가족은 성실하게 살면서 서울의 중산층을 꿈꾸며 무탈하게 지냈다.

  '지금까지 세상에 속았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그동안의 일상이 무너져 내린 아빠는 그동안의 생활에 매몰되어 지나왔음을 깨달았다. 지금껏 살아온 서울 생활을 접고 장원으로 내려간다는 가장의 말에 다른 식구들은 선뜻 함께한다는 말은 못하여도 아빠의 생각을 저지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생활에 익숙해진 엄마는 남편의 뜻을 선뜻 따를 수가 없어 큰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대학 갈 때까지는 서울에서 지내려 한다. 가장의 수입이 불투명해지자 대출이 절반인 아파트를 정리하고 그동안 집안 살림을 주로 하던 엄마는 취업을 하였다. 준과 누이, 엄마는 오래된 2층 주택으로 이사해 그동안 느끼지 못하였던 감각의 문이 열리는 경험들을 공유한다.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1층 정원에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아이들이 그네를 타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다급하게 뛰어가는 모습도 눈에 띈다. 마당 뒤편에는 장작더미가 가지런히 쟁여져 있고, 텃밭에는 식물이 자라고 있다. 숲에서 들리는 소쩍새 울음소리, 댓잎들이 소리 내어 우는 소리, 계절 따라 숲을 드나드는 짐승들의 소리 등이 자연의 울림으로 노래한다. 동생인 준이 목격한 바로는 1층에는 백발 할머니와 두 아이가 살고 있다고 하였다.


    며칠 후 마주친 할머니는 자신이 집주인이라 하지만 뭔가 숨기고 싶은 이력이 있어 보인다. 불도 들어오지 않고 수돗물도 끊어진 집에서 이들이 숨죽여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떠나야 할 상황에서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뭔가가 있을 것이라 남매는 생각했다. 자작과 종려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면을 튼 덕분에 서로 왕래하는 사이 남매는 할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어절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집을 거처로 삼아 지내는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함께 살지 않았던 시공간의 흐름을 감지한다.


    엄마가 쌍화탕을 들고 퇴근한 날에는 엄마를 푹 쉬게 하는 남매의 배려가 돋보인다. 엄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남매의 성숙함은 살고 싶은 집을 팔고 떠나버린 아들을 원망하지 않는 할머니의 넉넉한 마음과도 닿아 있다. 의지 가지 없는 손자들을 돌보며 손닿는 대로 움직이는 할머니의 정성은 비밀의 숲으로 불릴 만한 산삼 밭으로 가는 길을 준에게도 동행케 하였다. 집주인으로부터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명이 떨어지면 비밀 통로로 가기 힘든 산삼 밭을 2층 식구들에게 알려주었다는 점은 조금은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믿음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철조망 너머 산삼 밭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꿩들의 안내는 무의식의 흐름에서나 있을 법한 환상이어도 좋다. 자연 만물이 씨앗을 틔우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섭리에서 만나기 드문 흰 꿩을 본 일은 포용력 있는 사랑의 발로라는 생각이다. 먼저 장원으로 내려 간 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떠난 뒤로는 숨어 들지 않은 1층 식구들, 곧 장원으로 내려갈 것 같은 준의 엄마, 여전히 도시에서 살아갈 누나의 행방에 새로운 감각의 문이 열릴 때마다 어느 한 공간에서의 시간을 추억하며 또 다른 인연을 맺고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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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창비청소년문학 122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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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어도 온전히 살아있는 것이라 말하기 곤란한 일상을 보내는 오십 대 후반, 무탈한 나날을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복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늘어난다. 한 달에도 서너 차례 부고 문자가 들어와 장례식장으로 조문을 가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고인을 추모하고 애도하면서 살아남은 자는 고인의 명복을 빌 뿐이다. 여러 유형의 죽음이 있지만 뜻밖의 사고로 사랑하는 혈육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을 때, 회한은 깊어진다. 이전의 시간으로 돌릴 수 있다면 돌연한 죽음으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세계로 디지털 사후세계, 메타버스에서 죽은 개인의 아바타를 만들고 그들을 부활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인간과 기계 사이에 새로운 문명이 등장한 것이다.


  예민한 촉수로 여러 감각에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 겪는 일상의 고통은 곳곳에서 머리를 내민다. 부모나 형제자매 혹은 자식을 여의고 망자를 그리워하며 비탄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일상은 피폐해진다. 가족은 다시는 볼 수 없는 세계로 가버린 이를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는 숙명을 끌어안는다. 공부하다 잠깐 바람을 쐬러 간 아들이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 일을 겪은 부모 마음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부모는 열여덟의 나이에 세상을 등진 첫아들 진을 가슴에 묻고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참척의 아픔을 견디며 살아야 했다. 첫째아들 진과는 열세 살이나 벌어지는 둘째아들 혁을 보며 자식 잃은 비통함을 견뎌왔는지도 모른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운명의 시간 속에 스스로를 욱여넣고는 평상심을 찾으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메타버스 플랫폼 난달의 피싱랜드에서 낚시 게임을 즐기는 혁과 도운은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눈비가 내리거나 거센 바람이 불어도 가상 세계에서는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캐시로 낚시 장비를 마련하고 먹잇감을 사 물고기를 낚는 시간은 공부하기 싫어도 책상 앞에 버텨야 하는 의무감에서 자유롭다. 각자 나름의 아바타로 변신하여 현실 세계를 빠져나와 가상 세계에서 유영한다.

  혁은 형이 다니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족이 모르는 형의 흔적을 좇는다. 형의 고2 담임인 교감 선생님이 혁을 불러 안부를 전한 일은 물음표로 싸인 형에 대한 의문을 푸는 열쇠로 작용했다. 진의 방은 그가 세상에 머물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이라도 하듯 정지된 채 머물러 있다. 혁은 안 봐도 될 형의 세상인 메타버스 ‘가우디’ 속 현실을 엿보게 되면서 아바타 진의 집을 가꾸어 온 공유 친구 곰솔의 정체를 밝히고 싶은 마음에 휘감긴다.

  대부분은 보고 싶은 대로 보려는 경향이 있어 특정인을 겪어 보지 않고는 평가를 제대로 내릴 수 없음을 알아차린다. 형 친구는 진이 무던한 성격이라고 했고, 엄마는 형을 애교 많은 수다쟁이 아들로 평가했다. 조용하고 책임감 강한 학생으로 형을 기억하는 교감 선생님과는 거리가 있는 평가라 짧은 생을 살다 간 사람일수록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각기 다를 수 있음을 알면서도 혁은 간과해 온 형의 본질을 찾고자 한다.

  조별 과제로 미술관을 찾아 작품을 관람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발표수업으로 진과 곰솔은 마음이 통해 서로에게 끌려 좋아한 듯하다. 곰솔이 좋아하는 귤을 검정 봉지에 담아 현관 문고리에 걸어두고 간 진의 행동은 영락없이 곰솔을 좋아하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가우디 공간에서 마음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아갈 무렵 진은 세상을 떴고, 곰솔은 진의 정원을 돌보며 그의 마음이 들어 있는 공간에서 그에게 전하는 편지를 가슴에 새겼다.

  XR 헤드셋 착용 후 만나는 세상을 통해 혁은 기억에도 없는 형의 일면이자 전부인 학창시절의 우정과 사랑을 가늠하며 꿈속에서 형을 만났다. 도서관 서가의 책에 적힌 형의 생일, 선생님으로 진을 그리워하며 지내는 곰솔, 학창시절 아들이 쓰던 물건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부모 등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영면한 사람을 그리워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삶 곁에 바투 서 있는 죽음을 떠올리며 회한을 남기기보다는 상대를 배려하는 사랑의 표현으로 짧은 생을 다채롭게 채우면 좋을 듯하다. 가슴 속 깊숙이 자리한 슬픔을 어루만지며 살아 있어 감사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지낼 수 있는 감각이 있어 고마운 일상이다. 톡 쏘는 신맛으로 감각의 반전을 맛보게 하는 귤의 새콤함이 온몸으로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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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시대예보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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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도구와 AI의 도움으로 혼자서도 일들을 해내는 지능화의 결과 개인이 발휘하는 힘의 강도는 세지고 있다. 평균 수명 증가와 초고령화 사회 진입으로 예전의 생애주기 모델을 표준으로 삼던 시대를 벗어나 개인이 역량을 발휘하며 어떻게 생존할 것인지 물음을 던지며 지내야 하는 때이다. 관행대로 살아도 되는지 의문을 품고 물음에 답하는 여정에 삶의 궤도를 수정하고 보완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50대 중반 남은 인생 2막을 위해서라도 사회구조적 변화의 맥락 속에서 개인이 힘을 발휘하며 살아갈 역량을 기르는 자기관리 능력이 요구된다. 부모가 자식을 돌보던 은혜를 잊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며 지내던 때와는 달리 자식에게는 더 이상 효도를 받지 못하는 노년을 미리 대비해야 하는 과제를 해결하며 살아야 할 운명에 맞닥뜨렸다.

나라의 경계를 넘어 세계로 확장된 영역에서 활동하는 일이 늘어나는 때에 세상 보는 눈을 키울 필요가 있다. ‘K-대한민국’이라는 말은 대한민국이라는 물리적 ‧ 법률적 공간을 넘어 확장하고 있어 미래 국가는 도시국가가 될 것이라는 학자들의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개개인이 다양한 특성을 갖고 오롯한 자신으로 정체성을 드러내는 성향이 뚜렷한 때, 수직적 능력주의가 갖는 한계가 있다. 상사가 대화를 독점하기보다는 대화 순서의 평등성이 보장되는 친화적 분위기에서 부원들은 각자의 특기와 장점을 활용할 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주의 중에서도 새로운 개인으로 불리는 핵개인 시대에 학력은 사회적 성취 단계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지 그 자체의 성취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회식 자리 술잔을 들고 건배사를 할 때,

“우리가 남이가?”

라고 물으면 남이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으로 무장한 연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디지털 유목민이 늘어나는 때, 조직 중심에서 개인 중심의 플랫폼 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은 명약관화해졌다. 세계적인 감염병인 코로나19를 겪으며 바이러스와 함께 지내는 동안 인공지능의 힘을 빌리는 일이 흔해졌다. 온라인 공개수업, 원격수업, 화상 회의 등이 보편화되며 답이 있는 문제는 AI로 대체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글로벌 전문 교육은 디지털 환경을 기반으로 어디에서든 교육이 가능해 인간은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를 고민하며 자신의 서사를 갖출 필요가 있다.

새로운 기술이 시대적 이슈로 대두되는 시대에 시대의 큰 흐름을 읽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된 환경에 맞게 갱신하는 과정은 문제해결을 위하여 선행해야 할 과제이다. 유튜브 스승을 만나 자체 역량 강화가 가능한 시대에 집합적으로 축적된 지혜와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 고민하며 스스로 권위를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잇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시도하며 삶의 다양성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필요가 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평준화된 기준에 발목 잡혀 살던 평균적 일상을 벗어나 자신만의 권위를 찾아가는 과정은 인공지능이 활약하는 시대에 거쳐야 할 단계이다. 자신만의 트랙을 설계하고 독립된 목표를 설정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시간을 뒤로 하고 이제는 경쟁 구도에서 이탈해 개인의 서사를 만드는 일에 주력해야 할 때이다.

핏줄을 중심으로 한 친족 중심의 전통적 사회의 균열이 가속화되면서 가정은 있지만 일가가 사라지는 현상이 뚜렷해졌다. 전통적 시대의 효와 돌봄이 퇴색한 돌봄 과도기에 나이 듦을 부정적인 단어로만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 나만의 서사를 이뤄가는 일은 진정한 자립으로 나아갈 통로이다. 세상의 눈높이에 나를 맞추지 않고 나만의 권위를 이뤄가는 과정은 핵개인 시대를 사는 지혜로 여겨진다. 시대적 흐름에 편승하며 안도하기보다는 좌절을 겪더라도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도하며 누구도 쉽게 넘보지 못할 권위를 찾을 때, 고유성 있는 개인으로 진정성 있는 삶을 이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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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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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가 캡슐처럼 작은 방에 들어가 뒤척이다 잠들었다 뒷날 서방 세계로 향하였다. 피붙이는 지병을 앓고 있어 서울의 대형병원에 진료 예약 하루 전, 미리 도착해 친구를 만났다. 친구와 점심을 먹고 롯데월드에서 놀이기구를 타며 놀다 예약한 숙소로 들어와 잤던 피붙이는 다시는 못 볼 세상으로 갔다. 질병의 고통에 짓눌려 일반인들처럼 살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보낸 피붙이를 생각하면 약 한 알로 통증 없이 살아갈 날을 고대하며 백일몽을 꾸기도 하였다.


   감각 없이 살 수 없기에 일상의 고통은 곳곳에서 머리를 내민다. 모두와 잘 지내고 싶은데 뜻대로 안 되어 괴롭고, 외톨이가 된 듯하여 직장에 오는 것이 고통이라는 동료를 떠올린다. 고통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약이 나오면 좋겠다고 하여 마음이 쓰였다. 현대의학 기술로 질 좋은 약품들이 출시되고 있지만 부작용이 따르는 경우도 있다. 기존에 상용된 진통제보다 부작용 없이 효과적인 진통제가 만들어지면 좋겠지만, 약물 과잉 남용으로 폐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제약회사에서 개발한 진통제 사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사회인의 삶에 고통이 사라진다. 통증을 사라지게 하는 진통제 개발로 이익을 실현하는 제약회사에 맞서는 종교집단이 생겨났다. 고통을 숭배하는 종교 집단에서는 고통만이 구원에 이르는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고통을 벗어나려는 사람들을 교인으로 받아들이며 종교인들은 살아있는 존재가 느끼는 고통만이 구원에 다다를 수 있는 힘이라고 믿는다. 신약 개발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제약회사와 본원적인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야 한다는 종교집단이 상충하며 여러 사람의 죽음에 직면한다. 교단에 소속된 사람들이 잇따라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테러범으로 수감 중인 를 취조하며 종교집단이 있었던 곳으로 데려간다.

 

   교단은 고통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데 집중하였다. 교단에서 자란 태는 교단의 무기가 되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의미라 믿으며 성장해 태는 제약회사를 폭발 테러를 감행했다. 이로 인해 경은 인해 부모를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 자식을 생체실험 대상으로 사용하는 부모의 학대로 오빠를 잃었고, 경 역시 약물 투여로 내내 고통에 시달렸다. 경에게는 제약회사를 가질 권리가 있고, 증거물인 회사를 지킬 의무가 있었지만 그녀는 한사코 거절하였다. 경의 뜻을 받아들인 이사회에서는 그녀의 법적 배우자인 현이 제약회사의 경영자로 취임하였고, 경은 그냥 사라졌다. 경은 지금껏 부모의 악의에 저항하지 못한 채 온몸으로 고통을 감수하며 지내왔다. 동생에게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죽은 오빠의 한마디를 끌어안고 가공할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하는 기존의 경계를 넘어 서는 길을 찾아 나섰다.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고 조그만 방에 깃들어 사는 경은 현이 찾아오기를 바라며 청소와 설거지 등을 하며 9년 반을 버텼다. 일터와 거처를 옮기며 자신의 근거지 노출을 막아온 경은 부모가 이룩한 세계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그녀는 두려움이 사라진 자리를 현실적인 욕구가 채워지고 있음을 알아차리며 현을 만나 긴 대화를 나누며 존엄한 개체로 만나 함께하는 삶의 가치를 일깨운다.

 

   교인의 죽음의 진상을 규명하는 형사의 심문은 유력한 용의자로 을 지목하지만 그는 신성한 고통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교단에 도움이 안 되니 없는 편이 낫다고 주장한다. 교주에게 충성하던 은 교주의 대리인일 뿐,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병약한 이들의 통증을 덜어주는 의사를 가장한 교주는 태와 대화하며 정체를 밝히고 떠났다. 숲속 평화로운 호숫가 물안개처럼 피어올라 빛을 내던 불덩이는 교주의 다른 모습이었다. 고통으로 이지러진 사람들은 불빛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며 구원에 이르는 길을 따라 나섰지만 선택의 길이 막혀 자멸하고 말았다.

 

   살면서 겪는 고통의 범주는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 각각의 처방을 바라지만 적법한 처방을 내리지 못한 채 고통과 함께 지내야 하는 경우가 흔하다. 지금의 상황이 고통스러워 더 이상 생활하기 힘들다고 여겨진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서야 한다. 정해진 규칙대로 살아지지 않는 현실이기에 아픔과 슬픔을 수반하게 되더라도 상흔을 어루만지며 스스로 나아갈 방향을 잡은 경과 현의 결합은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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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명소녀 투쟁기 - 1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현호정 지음 / 사계절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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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중학교 동기 아버지의 부음을 알리는 문자가 날아들었다. 오십 대에 접어들어 지인의 부모 부고를 알리는 메시지가 잦아졌다. 팔십사 년을 살다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정토로 가는 길은 통과의례처럼 여겨지지만, 수정이 입시 고민으로 찾아간 점집에서 점쟁이 북두로부터 들은 단명 소식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단명할 운명이라는 예언을 들은 수정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을 강하게 드러냈다. 살고 싶어 산다기보다는 죽음을 피하고 싶을 뿐인 수정은 북두의 주술이 이끄는 대로 남동쪽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수정이 죽음을 죽이러 가는 길에서 만난 이안은 영면에 들기 위하여 노력한다. 커다란 개 내일의 등을 타고 환상의 세계로 가는 길에서 오늘은 죽고 싶지 않은 자와 살고자 하는 이가 만났다. 특정인이 이안을 사랑한 적은 없었지만 이안이 있어서 분명 좋았을 것이라는 북두의 말을 듣고 그는 죽겠다고 결심했다. 죽음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한 둘은 함께 저승으로 가서 힘을 합해 저승의 신을 붙잡아 각자 원하는 것을 얻으라는 북두의 말을 듣고 비현실적인 세계로 향한다.

동물의 등을 타고 이동하며 기괴한 얼굴을 한 인간의 –눈·모기·허수아비-의 형상을 한 괴물들을 물리치며 저승사자 앞으로 다가간다. 살생부 같은 명부의 초상화에 나온 악사, 청소부 등을 죽이고 목표점을 향하는 동안 목도한 마지막 남은 명부의 초상화는 수정과 이안의 얼굴이었다. 서로를 죽여야 목표에 도달할 일촉즉발의 설정에서 이안은 연명을 위하여 북망산을 등지고 걸어온 수정을 생각하였다. 


죽음으로 가는 이안의 모험은 끝나고 병원에서 눈을 뜬 수정은 현실의 무게를 가늠한다. 병실에 입원한 할머니로부터 갓 태어난 강아지를 선물 받은 수정은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분투하던 환상을 떠올린다. 스무 살을 넘기기 어렵다는 북두의 말에 지금은 죽고 싶지 않다며 수정은 북망산과 멀리 떨어져 걸었다. 




대한민국에서의 열아홉은 입시 경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입시를 향하는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불확실성이 커져 불안감이 엄습할 때, 수정 역시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점집을 찾았을 것이다. 단명(短命)할 운명이라는 점쟁이의 말에 쐐기라도 박듯 명을 늘리기 위하여 용기 있게 모험 길에 올랐다. 태어날 때는 알아도 죽을 때를 모른 채 살다 어느 순간 죽음에 직면한다. 불투명한 죽음의 시기를 두고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라는 말이 항간에 떠도는 것을 보면, 탄생은 죽음을 등에 지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수정이 부정적인 점괘를 듣고 삶을 비관하기보다는 지금은 죽고 싶지 않다며 살아갈 방법을 찾아 나섰다. 우리 삶 역시 기존의 질서를 벗어나 새롭게 시도하며 언제 맞닥뜨릴지 모를 시간과 경쟁하며 함께 나아갈 길을 찾는 과정이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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