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어루만지면 창비청소년문학 123
박영란 지음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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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 보면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틀어 낯선 환경에서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가 있다. 19829월 부산으로 전학을 가 이모 집에서 공부를 해야 했던 순간이 정서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숫기 없이 당하고 사는 남동생을 혼자 보낼 수 없으니 덤으로 누나까지 엎어 부산으로 학적을 옮겨야 했다. 십 리를 걸어 통학하며 정들었던 친구, 교정, 개울, 가로수, 동네 어른들을 품고 도회로 나가 생활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학교를 오가며 적응하느라 힘든 생활도 그럭저럭 시간 따라 흘러가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친구들과 만나 우정을 두텁게 하는 사이 조금씩 하동에서의 시공간도 아련한 추억 속에 남게 되었다.


  “집은 잘 있어.”

   준이 장원으로 내려가 누나와 통화할 때마다 묻는 말이다. 얼마나 오래 그곳에 머물렀던가보다는 누구와 함께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따라 한 공간은 서사적 의미로 다가온다. 나의 가족은 성실하게 살면서 서울의 중산층을 꿈꾸며 무탈하게 지냈다.

  '지금까지 세상에 속았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그동안의 일상이 무너져 내린 아빠는 그동안의 생활에 매몰되어 지나왔음을 깨달았다. 지금껏 살아온 서울 생활을 접고 장원으로 내려간다는 가장의 말에 다른 식구들은 선뜻 함께한다는 말은 못하여도 아빠의 생각을 저지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생활에 익숙해진 엄마는 남편의 뜻을 선뜻 따를 수가 없어 큰 아이가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대학 갈 때까지는 서울에서 지내려 한다. 가장의 수입이 불투명해지자 대출이 절반인 아파트를 정리하고 그동안 집안 살림을 주로 하던 엄마는 취업을 하였다. 준과 누이, 엄마는 오래된 2층 주택으로 이사해 그동안 느끼지 못하였던 감각의 문이 열리는 경험들을 공유한다.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1층 정원에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아이들이 그네를 타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다급하게 뛰어가는 모습도 눈에 띈다. 마당 뒤편에는 장작더미가 가지런히 쟁여져 있고, 텃밭에는 식물이 자라고 있다. 숲에서 들리는 소쩍새 울음소리, 댓잎들이 소리 내어 우는 소리, 계절 따라 숲을 드나드는 짐승들의 소리 등이 자연의 울림으로 노래한다. 동생인 준이 목격한 바로는 1층에는 백발 할머니와 두 아이가 살고 있다고 하였다.


    며칠 후 마주친 할머니는 자신이 집주인이라 하지만 뭔가 숨기고 싶은 이력이 있어 보인다. 불도 들어오지 않고 수돗물도 끊어진 집에서 이들이 숨죽여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떠나야 할 상황에서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뭔가가 있을 것이라 남매는 생각했다. 자작과 종려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면을 튼 덕분에 서로 왕래하는 사이 남매는 할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 어절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집을 거처로 삼아 지내는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함께 살지 않았던 시공간의 흐름을 감지한다.


    엄마가 쌍화탕을 들고 퇴근한 날에는 엄마를 푹 쉬게 하는 남매의 배려가 돋보인다. 엄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남매의 성숙함은 살고 싶은 집을 팔고 떠나버린 아들을 원망하지 않는 할머니의 넉넉한 마음과도 닿아 있다. 의지 가지 없는 손자들을 돌보며 손닿는 대로 움직이는 할머니의 정성은 비밀의 숲으로 불릴 만한 산삼 밭으로 가는 길을 준에게도 동행케 하였다. 집주인으로부터 더 이상 접근하지 말라는 명이 떨어지면 비밀 통로로 가기 힘든 산삼 밭을 2층 식구들에게 알려주었다는 점은 조금은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믿음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철조망 너머 산삼 밭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꿩들의 안내는 무의식의 흐름에서나 있을 법한 환상이어도 좋다. 자연 만물이 씨앗을 틔우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섭리에서 만나기 드문 흰 꿩을 본 일은 포용력 있는 사랑의 발로라는 생각이다. 먼저 장원으로 내려 간 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말하며 떠난 뒤로는 숨어 들지 않은 1층 식구들, 곧 장원으로 내려갈 것 같은 준의 엄마, 여전히 도시에서 살아갈 누나의 행방에 새로운 감각의 문이 열릴 때마다 어느 한 공간에서의 시간을 추억하며 또 다른 인연을 맺고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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