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주
실비 제르맹 지음, 류재화 옮김 / 1984Books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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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으로만 따지자면 앉은 자리에서 한두 시간 안에 읽을 수 있었겠지만, 진득하게 읽은 문장을 읽고 또 읽으면서 이틀을 넘게 붙잡고 있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을 때마다 그동안 읽어온 작가의 등장인물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고, 소설을 읽었을 당시에는 이 기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그들의 행위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다시금 곱씹게 된다.  






 



실배 제르맹은, 등장인물은 소설가에게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협력할 것을 요구하고, 대부분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오므로 소설가는 이를 재빨리 듣고 번역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고 말하는데, 이와 같은 맥락의 얘기를 반복한다. 그는 등장인물이 작가가 일방적으로 부여한 서사가 아닌, 등장인물과 작가가 서로 상호작용할 뿐만 아니라 마치 소설 속 인물들이 서사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듯 말한다.   


또한 글쓰기란 불확실성과 결핍의 상처로 인해 갈라진 틈을 메우는 일이라고 썼다. 최초의 언어를 비롯한 수많은 언어와 문자가 소멸되고 탄생하며 때로는 부정확하고 왜곡되었을지언정 언어와 문자의 영속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이에 있음을 얘기한다고 이해했다.  



실비 제르맹이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가장 낮은 자들의 살가죽이 종이와 다름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면서 이와 함께 여성의 몸을 묘사하고 표현하는 부분이 있다. 읽으면서 문득 지난 수천 년 동안 여성이 억압당했던 까닭 중 하나가 '피'에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체에 위해를 당하지 않고도 자연의 섭리에 따라 여성의 몸에서는 한 달에 한 번 피가 흐른다. 작가는 '여성의 몸이 지니고 있을 이 위험을 견제하기 위해'라고 썼는데,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가해자(특히 집단)가 가장 잔인하고 가학적인 폭력 방식으로 강간을 선택한 이유, 그리고 고대부터 이어져온 주술에 왜 여성이 피해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새삼 깊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그 어떤 문서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몸의 기록. 실비 제르맹은 소설에서 인간의 몸이 가장 매력적인 오브제라고 얘기한다. <밤의 책>에서 한 가계의 혈육들에게 특정해 놓은 신체적 특징, <분노의 나날>에서 사랑하는 카트린의 시신에 집착하는 앙부루아즈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실존의 불확실성, 인간 자체의 난해함, 지극히 어려운 사랑과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열정, 피해갈 수 없는 고독, 그리고 그 모든 끝에 따라오는 냉소와 죽음과 허무 등을 얘기하며 소설에서 '인간' 외에 다른 주제란 없음을 단언한다. 


실비 제르맹은 글을 쓰는 행위는, 우리가 침묵을 향해 가는 것라고 하는데 이에 앞서 작가는 청진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등장인물의 말과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렬한 표현은 등장인물의 몫이고, 그들의 외침이 드러나도록 침묵하는 것이 작가의 몫이라는 걸까. 등장인물 혹은 작가 본인이 화자가 되어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작품이 있다. 그런데 곰곰 떠올려보면 그의 작품은 인물도, 화자도 말이 많지 않다. 그러나 작품 전체에서 풍겨나오는 분위기는 독자를 압도한다. 여러 지점들을 되짚어보니 실비 제르맹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실비 제르맹의 소설들은 유독 아름답고 우아하며 시적이다. 이 에세이를 통해 그가 사유하는 인간의 육체와 내면, 언어와 철학, 소설과 시, 그리고 쓰여짐으로써 텍스트를 통해 생을 얻는 그의 '환상적인 거지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이후 실비 제르맹의 작품을 읽는다면 덕분에 더 이입해서 읽을 수 있을 듯 하다.  


이 양반은 에세이도 소설처럼 쓴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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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 카페 프랑수아즈 사강 리커버 개정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권지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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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를 마치고 예정보다 일찍 귀가한 집에는 예상치 못한 장면이 연출되어 있다. 직접적인 현장을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정황상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는 밀리센트. 결혼 생활 10년 동안 뭇 여성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남편의 외도라... . 밀리센트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남편의 불륜보다 자기의 집과 침실, 잠옷까지 침투한 낯선 대상이다. 불륜이든 사랑이든 예의라는 것이 있어야하건만, 이건 도가 지나쳤다. 그런데 함께 이 현장을 목격한 친구 린다의 의미심장한 한 마디 한 마디. 마침내 침실에 올라가서야 남편의 오래된 비밀을 알게 된다. 
 


이와 유사한 내용을 종종 영화나 다큐로 만날 때가 있다. 긴 세월 함께 살아온 남편의 외도와 맞주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분노가 아닌 허탈에 가깝다면 왠지 억울한 기분이다. 밀리센트는 남편에게 연민을 느끼는데, 이 부분도 이해가 된다. 지금은 이때보다 나아졌다고 말 할 사람이 있겠지만, 내가 체감하기에는 전~혀. 이 사랑에 있어 잘못한 이는 없는데, 피해자만 있다는 건 참 속상하다. (어쨌든 밀리센트가 가장 놀랐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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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주
실비 제르맹 지음, 류재화 옮김 / 1984Books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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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침묵의 망망대해 앞에서 종이 제방을 쌓는 행위다.
침묵, 오로지 침묵만이 결정권을 얻는다. 다량의 단어들에 분산되어 있는 의미를 굳건히 견지하는 것이 곧 침묵이기 떄문이다. 결국 글을 쓸 때, 우리는 침묵을 향해 가는 것이다.  




글을 쓸 때 침묵을 향해 간다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 표현인가. 글이란 드러내는 것 아니었나? 개인의 생각을, 신념을, 영감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글일텐데, 어째서 실비 제르맹은 침묵을 향해 간다고 했을까.  


이에 앞서 실비 제르맹은 작가는 청진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등장인물의 말과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렬한 표현은 등장인물의 몫이고, 그들의 외침이 드러나도록 침묵하는 것이 작가의 몫이라는 걸까.  


등장인물들 혹은 작가 본인이 화자가 되어 엄청나게 수다스러운 작품이 있다(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도선생, 톨선생 등).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실비 제르맹의 작품은 인물도, 화자도 말이 많지 않다. 그러나 작품 전체에서 풍겨나오는 분위기는 독자를 압도한다. 곰곰 되짚어보니 실비 제르맹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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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주
실비 제르맹 지음, 류재화 옮김 / 1984Books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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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단어들에게도 혈색을 줘야 한다. 부피를, 색깔을, 맛을, 섬유 조직 또는 성역 같은 조직을 마련해야 한다. 소리와 빛에 반사 작용을 할 수 있는 힘이 갖춰져야 한다. 등인인물들의 부름에 응답하는 소설가에게 주어지는 책임이다.   
 



십대 초반, 소설을 한 편을 썼었다. 원고지 1000매가 넘는 분량이니 그 나이에 쓴 것치고는 적지 않은 분량이다. 그때가 한참 <작은 아씨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였는데, <작은 아씨들>의 아류작이라고 보면 되겠다.  


완성을 하고 나보다 두 살 많은 사촌 언니에게 보여줬더니 잘 썼다고 칭찬을 받았는데(그래봐야 그 사람도 중학교 1학년), 더 잘 써보라고 두툼한 몇 권의 공책과 연필 몇 다스까지 선물받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십 수년이 지나 다시 펼쳐보니, 정말 낯 뜨거워서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글들. 고작 열두어 살에 썼다는 것을 감안해도 창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실비 제르맹을 글을 읽다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라는. 그 글에는 사건, 등장, 감정 등을 나열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색깔과 생명력이라고는 1도 없는. 그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켰음에도 동경의 대상이었던 한 인물에만 집중한 채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단역으로 전락시켜버렸던.  



이 책을 읽으면서 글은 아무나 써도 되지만, 아무나 잘 쓰는 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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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의 선택 1~3 세트 - 전3권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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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가 포르투나의 선택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걸출한 인물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바라던대로 전쟁의 신이라 불렸던 스승을 누르고 최고자가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죽기 전 호쾌하고 흐드러지게 놀다 간 술라는 자신의 삶에 만족했을까?
로마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세르토리우스와 스파르타쿠스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었을까? 


현재의 지구촌만큼이나 어수선한 시기에 포르투나의 선택을 받고 싶었던 자들.
지금도 자기가 '운명의 여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만, 제발 정신차리시기를. 


개인적으로 로마 시대의 법 제도에 관심이 많은 독자로서 3부는 그런 점에서 흥미로웠다. 로마 공화정 시대의 가장 흥미로운 사건(인물) 중 하나라고 꼽는 카이사르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4부~5부에 걸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대감 가득 채우며 3부를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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