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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불빛이 붉게 타오르면 - 사르담호 살인 사건
스튜어트 터튼 지음, 한정훈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2월
평점 :
소설은 유럽 제국주의가 아시아까지 손을 뻗친 17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634년, 동인도회사령 바티비아에서 사르담호가 암스테르담을 향해 출항했다. 선주인 바티비아 총독 얀 하안과 그의 가족을 비롯해 각자의 목적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승선했다. 출항 전부터 시작된 불길한 조짐은 항해 첫날부터 30년 전에 발생했던 악마 올드 톰을 연상시키는 상징들이 곳곳에 나타나면서 내내 이어진다. 출항 이틀째 밤, 바타비아에서 출항한 동인도 선박은 일곱 척인데, 바다 위의 불빛은 여덟 개다.
동인도회사의 비밀 지배 조직인 신사17인회에 합류하기 위해 바티니아를 떠나는 총독 얀 하안과 그의 아내 사라와 딸, 얀의 정부 크리지와 그녀의 어린 두 아들, 영문도 모른 채 죄수가 되어 이송되는 최고의 탐정 새미, 새미의 피고용인이자 절친인 용병 아렌트,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달바인 자작 부인, 신교 목사이자 마녀 사냥꾼 샌더, 샌더의 제자 이사벨, 얀의 최측근들, 그리고 거칠대로 거친 선원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악마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사르담호를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폭풍우가 몰아닥첬고, 선원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폭풍우 속에서 사르담호는 살아남았지만 배의 상태는 뗏목과 다를 바 없었고, 항로를 이탈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얀은 항로 관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신사17인회에 갖다 바쳐야 할 '포세이돈'을 꺼내기로 하는데, 그 귀한 포세이돈이 사라졌다.
새미는 왜 졸지에 죄수로 전락했을까?
죽은 문둥병자는 어떻게 살아나 사르담호에 탔을까?
난장이 일등 항해사 라르메가 감추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샌더에게 죽은 피터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낸 자는 누구일까?
얀 하안이 진정 두려워하는 단 한 사람, 그는 누구일까?
그리고 악마 올드 톰을 소환한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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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촘촘한 추리 구도와 밀실 트릭, 오컬트적 요소까지 보이며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장면에서 긴장감을 유지한다.
인간의 탐욕과 욕망이 곧 악마라는 주제로서 소설은 동인도 회사와 사르담호를 악마 올드 톰과 동일 선상에 놓으며 인간성을 망가뜨리는 죄악의 온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당시 여성의 불평등한 사회적 위치와 여자라는 이유로 부정당해야만 했던 삶을 얘기하면서 현재에도 그 잔재가 남아있음을 독자는 짐작할 수 있다.
얀은 동인도 회사가 부富 뿐만 아니라 문명을 전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피식민국이 문명을 받아들이는 대가는 학살이다. 이뿐만 아니라 얀은 30년 전부터 욕망을 이루기 위해 무차별한 살인을 저질러 왔고, 여성을 전리품과 자기의 신분을 높여줄 교환가치로만 취급하며 서슴없이 학대를 가한다.
얀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아렌트다. 그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사라와 더불어 거의 유일하게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유력한 귀족 가문의 후계자임에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그저 소모품로만 인정했던 할아버지의 신념을 싫어했고, 남자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는 동안 자기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칼대신 괭이를 든 여자들을 보면서 성차별의 오류를 깨닫는다. 또한 경험을 통해 전쟁에 영광이나 명예 따위는 없음을 알고 있다.
소설에서 눈에 띄는 또다른 부분은 사라와 그녀의 딸 리아, 크리지, 그리고 이사벨의 연대다. 재능과 능력을 숨기고, 폭력을 감수해야하는 네 여성들의 연대는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한다. 사건 해결에 있어 적극적이고 앞서 나가는 사람은 사라다. 그리고 리아와 크리지, 이사벨은 각자 가진 재능을 살려 능동적으로 사라를 돕고, 서로를 보호한다.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총독 얀을 포함한 남성들은 권력을 탐하거나 복종할 뿐 이타심은 거의 전무하다.
아렌트가 유년 시절 기억하는 얀의 모습은 현재의 모습과 아주 다르다. 그는 다정하고 의기소침해 있는 소년 아렌트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가 변한 건 첫 번째 욕망을 채우고 난 뒤였다. '나'의 욕망은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커진다. 그러나 그 허기는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다. 얼핏 사르담호가 탐욕의 불구덩이로 보일 수 있겠으나 배는 배일 뿐이다. 아렌트 손목의 상처가 흉터에 불과한 것처럼. 그것을 특별한 존재로 각색한 것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소재로 한 소설은 너무 많아서 식상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요소가 가득해 식상함에 대한 우려는 넣어두어도 되겠다.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워낙 뿌려놓은 밑밥이 많고, 모두 회수되는 밑밥이기에 섣불리 내용을 건드리기가 조심스럽다. 일단 읽으시라, 재미있으니!
아렌트의 생각처럼 지혜가 힘을 이기고 약한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더 안전하게 만드는 미래의 도구로 사용되기를 바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