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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경 지음, 김지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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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윌, 피비 인, 존 릴, 세 사람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교차해 풀어나간다. 윌은 1인칭, 다른 두 사람은 3인칭 시점인데, 피비의 서술 방식이 독특하다. 3인칭 시점임에도 피비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둣 서술한다. 마치 고해성사 같은 말들을, 피비는 누구를 향해 얘기하는 것일까? 





 


 

 




윌이 기독교인이 된 때는 중학생, 어머니가 처음 아팠을 때였다. 소년 윌은 신앙으로 어머니를 구원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고, 다섯 달 뒤 어머니의 세례식에 증인으로 설 때만해도 어머니를 구원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윌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주빌리 신학대학에 다니던 중 신앙을 잃었다.


천재 피아니스트로서 유명인이 되고 싶었던 피비는 리비흐 음반을 듣고 자신애게는 그만한 재능이 없어서 위대한 연주자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해 피아노를 그만두고자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물러서지 않았다. 어머니와 첼로 공연을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를 운전하던 피비는 반대쪽 차선으로 차를 몰았다. 


존 릴은 대학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중국 옌지에 이르렀다. 북한과 가까운 도시에서 탈북자들을 서울의 보호소로 밀항시키는 활동을 하는 단체에서 일하다가 북한 요원들에게 납치 당해 평양 외곽의 수용소에 처박혔다. 억류된 지 세 달이 지났을 때 교도관들이 존 릴을 강둑으로 데려가 중국으로 도로 넘어가라고 했다. 3월초, 살얼음이 낀 강을 건너기 전에 익사할 게 뻔했다. 하지만 그는 발걸음을 옮기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ㅡ 


윌, 피비, 존 릴은 각자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ㅡ신앙, 영예, 신념ㅡ에 대해 실패와 상실감, 그리고 죄책감을 안고 도피하듯 녹스허스트로 들어온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으면서도 여전히 신앙이 그리운, 아무런 죄 없이 죽어가는 이들을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그래서 그들의 죄책감은 누군가는 파티걸로, 누군가는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신념을 실현시킬 광신도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이 갖는 슬픔과 죄의식의 고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됐을까. 
피비의 어머니는 서울에서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결혼해 시댁에 들어가 돈도 받지 못하는 하녀 노릇을 하듯이 살다가 첫아이를 출산 후 몇 달 뒤 아이를 데리고 그 집을 떠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L.A.까지 쫓아온 남편을 내치지 못하고 받아들인다. 어머니는 자신의 박탈당한 삶을 딸이 대신 살기를 바랐다. 피비의 어머니는 딸에게 피아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필요없는 것들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것들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피비는 어쩌면 어머니가 살았을 수도 있는 위대한 삶을 자신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 대신 살아야할 의무가 있었다. 자식을 통한 대리 성취. 아마 어머니가 자신의 삐뚤어진 욕구가 그토록 사랑하고 아꼈던 딸의 인생에 독이 될 줄 알았더라면. 


피아노를 포기하고 방황하는 피비가 갈망한 건 어떤 대상이든 상대방이 들려주는 진실이었다. 누군가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상쇄시키고 싶었던, 아니 그보다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주는 존재로 비하하며, 자신의 고통으로도 부족해 타인의 고통까지 꽉꽉 채워 스스로를 학대했던 그녀. 피비의 윌을 향한 사랑도, 피비에 대한 윌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도, 빠른 시간 안에 피비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든 것도, 모두 이와 같은 선상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피비가 윌에게 처음 끌려 의도적으로 접근한 이유 또한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방인의 고독이었다. 윌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고. 안주하지 못하고 부유하듯 떠있는 서로를 땅에 붙어있을 수 있게 해주었던 두 사람. 


피비가 제자 모임에서 사랑하는 윌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그녀가 갖고 있는 비밀들을 털어 놓았다는 것은, 그녀가 자신이 안고 있는 고통과 슬픔을 얼마나 털어놓고 싶어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윌은 그 모임에서 피비를 데리고 나오기 위해 스스로 내부자가 될 생각으로 모임에 가입하지만 윌마저 때로는 존 릴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차라리 옳기를 바란다. 피비, 그리고 자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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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묘사되는 '제자' 모임의 행위는 우리가 매체에서 접했던 소위 사이비 종교의 그것과 흡사하다. 과도하게 고해를 강요하고, 금전적 충성과 복종을 요구하며, 죄를 물어 신자들의 죄책감을 세뇌 및 강화한다. 신의 말씀 앞에서 사회적 규범이나 법은 무용하며, 신체적 자해와 폭행은 신에 대한 순종의 척도가 된다.  


단적으로 '제자' 모임이 낙태 반대 행진을 주도하는 장면에서 윌의 물음에 낙태가 합법이냐 불법이냐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라고 말로 대화를 시작하는 피비의 모습에서 그들의 정당성은 임산부의 입장이나 태아의 생명권이 아닌 신의 말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의아한 인물은 존 릴이다. 그는 우리가 언론에서 보았던 교주와는 다른 한편으로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그는 교단을 위해 헌금을 걷고 신도들에게 재산을 헌납하라고 간접적으로 강요하지만 그 돈을 사취하지 않는다. 존 릴은 정말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믿는 미치광이 교주였을까, 아니면 집단 뒤에 숨은 아나키스트 혹은 테러리스트였을까. 아니면 둘 다 였나? 가장 아픈 곳을 찔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부숴가며 자신의 목적을 취했다는 점에서 존 릴은 여타 교주와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오직 피비만이 알고 있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진실과 마지막에 아들의 전화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어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윌의 어머니의 모습을 마주하면서, 불현듯 영화 <밀양>이 떠올랐다. 전도연 배우의 울부짖는 장면, 마당 한구석 웅덩이를 비추는 햇살의 마지막 장면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지나갔더랬다. 


저자가 윌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밀양>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바로 그 햇살과 같지 않을까.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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