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인간
알도 팔라체스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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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내 눈에는...... 날개가 잘려나간 크고 검은 새들로 가득찬, 아주 커다란 새장 같아요." 



'칼비노 이전에 팔라체스키가 있었다' 라는 문구에 홀랑 넘어가 읽게 된 작품이다. 책장을 넘기면 곧바로 소설의 남다른 분위기가 전해진다.  


페나, 레테, 라마 세 노파가 땐 벽난로의 연기에서 태어난 연기 인간 페렐라. 그는 세 노인이 불을 때면서 주절거린 대화 내용 덕분에 본의 아니게 아무 쓸모 없는 지식ㅡ사랑, 전쟁, 철학 등ㅡ을 배웠다. 언제부터 생각과 이해의 기능이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존재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면서 자신이 하나의 생명임을 느꼈다. 언어를 듣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말을 할 줄 알게 됐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람이었다. 








소설은 인간의 욕망과 제 잇속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변덕스러움, 그리고 폭력적인 군중 심리를 통해 인간의 민낯을, 그리고 동시에 현대 사회에서 맞닥뜨리는 사회 문제를 환상적이고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세 노파의 이름인 페나pena, 레테rete, 라마lama는 각각 고통, 그물, 창을 의미하는데, 페렐라가 이들이 피운 연기에서 태어났다는 설정은 의미를 갖는다. 소설에서 '한 사람은 마음의 고통을, 다른 한 사람은 고통스런 마음을 포획한 그물을, 또 다른 한 사람은 포획한 마음을 꿰뚫는 창'이라는 표현을 쓴다. 소설의 진행 과정을 보면 이 이름 들이 왜 반복적으로 불리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육신과 정신이 순화된 신비롭고 새로운 존재인 연기 인간 페렐라는 등장하는 순간부터 왕을 비롯한 왕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신과 비견되는 추앙을 받는다. 몇 마디 되지 않는 단조롭기만 한 그의 말은 계시요, 구원이다.  


재미있는 점은 페렐레는 거의 말이 없다. 화가, 사진사, 은행가, 시인, 박사, 철학자, 대주교, 왕궁의 하인 등 페렐라를 찾아온 이들은 페렐라가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얘기를 하지만,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 뿐더러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성공, 대중의 인기 등을 탐하는 속내를 교묘히 감추며 자신들의 주장만 강화하고 정당화한다. 말 끝에는 한마디도 대꾸를 하지 않은 페렐라에게 고맙고, 감사하고, 존경한다고 말한다. 또한 다과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페렐라에게 질문을 하지만 그가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들 역시 페렐레 뿐 아니라 타인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제 말만 할 뿐이다. 사회적 갈등의 원인 대부분이 경청의 부재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비혼이든, 기혼이든, 혹은 외도 대상자든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자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남자들은 지적 허영을 부리며 교양을 과시하면서 여자들을 외모로만 평가하며 낮잡아 보고,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여성들은 괜찮은 남자들의 청혼을 기다리는 게 전부다. 여러 여성들의 발언을 통해 당시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차별, 정략결혼, 성에 대한 내밀한 고민, 성정체성에서 오는 혼란과 번민, 드러낼 수 없는 성욕과 관능 등 여성이 갖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페렐라가 내려간 도시는 왕이 죽으면 가장 부유한 시민이 왕좌에 오른다. 나라의 금고에 금을 가장 많이 쏟아부을 수 있는 사람이 새로운 왕이 되는 것이다. 왕을 죽인 자는 새로운 왕에게 은총을 받고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의 신분을 보장받는다. 이러한 지경이니 돈이 많은 자들은 왕을 꿈꾸고, 꿈을 이룬 순간부터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세상의 주체는 과연 누구(무엇)일까?  


ㅡ 


일방적 추종이 흔들리는 계기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아주 사소하게 시작된다. 분노에 찬 근거 없는 짐작과 비방, 혹은 농담처럼 흘리는 말 한 마디 등 스치듯 가볍게 지나가는 의심은 귀와 입이 더해질수록 그 크기와 무게가 커지면서 과거의 기억들이 재편집된다. 간혹 누군가는 대중의 억지스러운 짐작을 제지하는 사람도 있지만, 겉으로만 보이는 모습을 왜곡하고, "누가 알겠어"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라는 무책임한 말들은 모든 것들을 이미 하나의 결론에 두고 있다.   


한때 페렐라를 추앙했던 사람들은 그의 가치를 과도하게 평가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연기 인간은 신적인 존재에서 악마의 자식으로 추락하고 만다. 정작 페렐라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를 단죄하는 데에 있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대중에게 페렐라에 대한 약간의 비난과 적개심만 뿌려놓으면 그만이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존재, 무無에 '신'이라는 프레임을 씌어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 세상에서 가능한 멀리 둔다. 군중을 조종하고 죄의식을 손쉽게 씻어내는 데 이만한 수단이 없다. 


페렐라는 늘 그 모습 그대로다. 전혀 변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군중은 폭도가 되어 페렐라를 몰아 세웠다. 페렐라는 야유와 창피를 당하고, 비웃음과 경멸을 사며, 물리적 공격을 당하고 조롱거리가 되었다. 아무도 그를 보호하려 들지 않았다. 페렐라는 사람들이 자신을 추앙했을 때도, 폭력적으로 가해할 때도 그 이유를 모른다. 도대체 왜?   


대주교를 비롯해 과거 펠레라를 구원과 영웅으로 떠받들었던 이들 모두가 증인으로 나서서 그를 부정하고 비난한다. 그토록 경외했던 단어인 '가볍다'는 어느새 혐오 단어가 되어버렸다.   


페렐라는 왜 스스로를 '가벼운' 인간이라고 했고, 사람들은 한때나마 가벼움에 매료됐을까? 어쩌면 인간의 삶이, 세상사가 너무 무거워서 아닐까? 욕망, 질투, 사랑, 아름다움, 부富, 권력 등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치고 어느 것 하나 무겁지 않은 것이 없다. 삶의 무거움은 페렐라가 왕궁을 출발해 도시의 중심 도로를 가로질러 포르타 칼레이오에 도착하는 동안 걷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사람들의 욕설과 비웃음과 경멸을 감내해야하는 그 길이 마치 인간의 인생 행로 같이 느껴졌다. 



1911년에 쓰여진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도시와 군중은 지금의 우리 사회에 투영해도 전혀 괴리가 없다. 또한 이념의 전쟁 시대였던 20세기를 빗대어 볼 때 이렇게 적절한 소설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책소개에서 언급했듯 이탈로 칼비노의 느낌이 곳곳에서 보여진다.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을 비롯한 '선조 3부작'의 주인공들에게서 '연기 인간'의 면면이 보이고, 가상의 두 도시에 대한 묘사는 칼비노의 소설들에서 표현된 도시들이 연상된다. 환상문학이라는 공통점에도 이 두 작가가 그려낸 작품의 맛은 사뭇 다르다. 팔라체스키의 작품을 처음으로 읽었기에 섣부른 판단일 수 있으나 그가 비교적 직접적으로 주제에 접근한다면 칼비노는 좀더 은유적이고 해학적이다. 읽으면서 칼비노의 작품들을 부분 발췌해 읽었는데, 비교하며 읽는 맛도 제법 쏠쏠하더라는. 


좋은, 그리고 아주 흥미로운 작가를 알게 됐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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