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2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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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문헌 중 가장 애정하는 두 권이 <도덕경>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나에게 있어 <도덕경>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근본적인 길잡이가 되어주었다면,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삶에 대해 사유하게 해준다. 물론 고대와는 다각적, 다차원적으로 달라진 현재이긴하지만 결국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해야하는 바는 상통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최종 목적을 '행복'에 두고 그 과정에 있어서 인간에게 좋음, 미덕, 악덕, 정의, 즐거움, 사랑 등이 본질적으로 무엇이며 이것들을 어떻게 추구해야하는지 고찰한다.








 
이 책을  펼치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 정치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소견과 중용의 미덕이다. 그는 가장 권위 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최고 학문은 정치학이라고 꼽는다. 정치학은 한 국가와 각각의 시민이 필요로하는 모든 학문을 포괄하고 있기에 정치학은 인간에게 좋음을 추구하는 학문이 될 수 밖에 없다. 정치학은 정밀학문이 아니므로 절대적으로 참인 것이 아니라 대체로 참이라는 전제하에 살펴야 하며 이는 곧 대체로 참인 것에 도달할 수 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정치학을 배우는 목적은 지식에 있지 않고 행위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홀륭한 사람이 되기 어려운 것은 모든 일에서 중간을 찾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중용을 추구하는 것이 어렵다면 우선 중용과 더 대립하는 것에서 멀러 떨어지라는 충고를 하는데, 이것도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면 자신이 어떤 것에 쉽게 끌리는지 살피시라. 자신이 끌리는 것과 반대되는 쪽으로 스스로를 이끈다면 중용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용의 미덕은 책 전반에 꾸준히 언급된다.  


그렇다면 이 문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 미덕은 무엇인가. 미덕은 감정과 행위와 관련이 있어 자발성과 비자발성을 구분해야 한다. 더 큰 해악을 당할 것이 두려워서 또는 어떤 고귀한 목적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가 비자발적인지 자발적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행위의 원인이 외부에 있고 강요당한 행위자가 원인에 전혀 관여할 수 없다면, 그 행위는 강요로 보인다. 무지 때문에 어떤 행위를 했지만 후회하는 사람은 비자발적으로 한 것이라고 본다면,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경우로, 자발적으로 하진 않았지만 비자발적인 것도 아니다. 자발적이냐, 비자말적이냐는 결국 행위 이후 가책과 고통을 느끼느냐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일 터다. 


눈에 띄는 부분, 무지의 원인이 행위자에게 있다면 무지 때문에 한 행위에 대해서도 처벌을 받는데, 술에 취해 범죄한 사람에 대해 형벌을 두배로 가중해 처벌한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스스로 술에 취하지 않게 할 수 있었는데도 자신을 술에 취한 상태로 만들었고, 그렇게 술에 취한 것이 무지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당연한 말씀인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감형을 해주는 현대법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절제는 즐거움과 관련 있는 중용이다. 식욕과 성욕은 개인의 고유한 부분인데, 본성적인 욕망과 관련한 잘못은 한쪽으로만 지나치게 치우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절제 있는 사람은 즐거움을 주는 것과 관련해 중간 위치에 있다. 즐거움(욕망)을 적절한 수순과 적절한 방식으로 행한다. 즉 절제를 벗어나 지나침으로 치우치게 되면 즐거움이 주는 본래의 가치는 의미를 잃는다는 말씀이다. 무절제는 비겁함보다 더 자발적이다. 무절제는 선택 대상인 즐거움과 관련해 생기지만, 비겁함은 회피 대상인 고통과 관련해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난받아 마땅한 것은 무절제다. 비겁함(비겁한 행위)는 각각 경우에서 자발성 정도가 다른 반면, 무절제는 거의 개별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무절제한 욕망은 이성적 사고력을 굴복시킨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겁함보다 무절제가 더 비난의 대상임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건강한 분노와 욕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듯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의는 법을 지키는 것, 공평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와닿았던 부분은, 가장 나쁜 악행은 자신에게 저지른 것이고, 가장 좋은 미덕은 남에게 행하는 것이라는 대목이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과 훌륭한 시민이 다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우리는 전자의 경우 반대로 행하고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에 대한 구분이 없으니 말이다.   


그가 중용과 더불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실천적 지혜다. 실천적 지혜란 어떤 기술에도 속하지 않은 일을, 진지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잘 헤아리는 것이다. 기술에서는 어떤 나쁜 목적을 달성하려고 의도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일을 선택할 수 있지만, 실천적 지혜는 다른 미덕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선택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천적 지혜는 기술이 아니고 일종의 미덕이다. 실천적 지혜는 학문적 인식과는 다른 부분, 즉 의견을 만들어내는 부분에 따른 미덕이다. 의견과 실천적 지혜는 둘 다 변하는 것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성품은 망각될 수 있지만 실천적 지혜는 망각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다. 


학문적 인식 중에서 최고 형태가 곧 철학적 지혜다. 철학적 지혜는 직관적 지성이면서 동시에 학문적 인식이고, 가장 고귀한 것에 대한 최고의 학문적 인식이다. 숙고를 잘하는 것이 실천적 지혜를 지닌 사람의 특징이다. 숙고를 잘하는 사람은 인간 행위를 통해 이루어낼 수 있는 것 중에서 최고의 것을 잘 헤어려서 이루어내는 사람이다. 실천적 지혜는 보편적인 것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것도 관대하여 알려고 한다. 실천적 지혜는 행위와 관련되고, 행위는 개별적인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실천적 지혜는 개별적인 것을 다루고, 개별적인 것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데, 경험을 충분히 쌓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나이가 젊으면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젊은이가 실천적 지혜를 지닌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고 말하는데,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정말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을 사랑하는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진 이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초독 당시에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그는 이 둘이 종종 다르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덕 혹은 미덕을 수반한 사랑이 삶에서 가장 필요할 뿐만 아니라 고귀하다고 얘기하면서 '친구'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 눈에 띤다. 우리가 우정이라고 정의하는 것들을 시종일관 사랑의 범주에 포함시켜 서술하는데, 그에게 있어 사랑은 신뢰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받기보다 사랑하는 것에 있다. 사랑이란 동등성과 유사성이고, 미덕을 지닌 사람들 간의 유사성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사랑의 동등성에 대해 생각이 깊어진다. 빈부, 외모, 성별, 권력을 힘으로 어느 한 쪽이 주도권을 갖지 않는 사랑 혹은 우정의 동등함. 이 부분에서 와닿았던 부분은 사랑하는 것이 감정이라면, 사랑은 성품이라는 것, 사랑과 정의는 서로 같은 것과 관련되고 서로 같은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말씀.  



철학자는 행복은 여유로운 삶에 있다고 말씀한다. 우리가 분주하게 일하는 것은 여유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이고, 전쟁하는 것은 평화롭게 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미덕에 따른 행위 중에서 정치적 행위나 전쟁과 관련된 행위가 고귀함과 위대함에서는 뛰어나다고 해도, 그런 행위는 여유로운 삶이 아닌 분주한 활동에 속하고,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그 자체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둔다. 시민의 여유로운 삶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전쟁 자체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이 말씀은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사태와 맞물린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자국의 안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 교육과 생활지도에 관련한 관심, 특히 공동의 돌봄은 법을 통해 이루어지고, 훌륭한 돌봄은 훌륭한 법을 통해 이루어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양육과 교육은 한 가정 혹은 개인의 차원이 아닌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임을, 그래서 더 정확하고 세밀한 개인적 돌봄과 국가적 돌봄이 보편적으로 확대되어 조화를 이루어야함을 그는 놓치지 않고 있다.  


철학자들에게는 정치적 학문은 있으나 정치적 경험이 없고, 정치인들은 지성적 사고가 아닌 어떤 종류의 능력과 경험에 기반해 정치한다. 정치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이 두 가지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법을 만들 때에는 입법과 정치체제 전반을 검토해서 인간 철학을 완성하고, 수집해 놓은 정치체제를 토대로 잘잘못의 원인을 분석하고, 나아갈 방향을 살펴야 한다는 고대 철학자의 가르침이, 국내적으로는 갈 곳을 잃은 유권자의 권리와 국제적으로는 학살에 다름하지 않는 참혹한 지금 이 시국에 더욱 크게 와 닿는다.  


불의한 행위와 불의한 것, 정의로운 행위와 정의로운 것은 다르다. 정의든 불의든 실제로 행했을 때에만 불의(혹은 정의)한 행위가 되지만, 행하기 전에는 행위는 존재하지 않고 불의(정의)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행하지 않는 정의는 진정한 정의라고 볼 수 있는가? 실천철학자로 불리는 그의 말씀을 더욱 새겨 읽을 때다. 




사족
정독은 출판사를 달리해서 두번째였고, 그동안 여러 출판사들의 책을 발췌독 해본 경험으로 가장 어렵지 않고 매끄럽게 읽히는 판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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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의 선택 3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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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부르군두스와 필경사 둘만 데리고 날렵한 배 한 척을 빌려 조용히 동방으로 향했다. 나흘만에 프리에네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행정관 멤논을 찾아가 여드레 안에 4개 군단에 준하는 민병대를 소집해 마이안드로스 강가의 마그네시아에 집결시켜 달라고 부탁한다. 물론 총독의 지시라는 선의의 거짓말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전투 소집을 기다리고 있던 멤논은 기대에 차 공문 확인 요청도 없이, 카이사르의 정체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없이 아시아 민병대 소집 작업에 나섰다. 카이사르는 다른 한편으로 부르군두스를 앙키라의 갈라티아 족장 데이오타로스에게 보내 협공 작전을 요청한다. 카이사르가 대적할 상대는 폰토스 장군 에우마코스와 변절자 마르쿠스 마리우스였다. 참... 간도 크지. 원로원 의원이지만 민간인 신분으로 민병대를 소집하다니. 
 


에우마코스는 비옥한 땅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쾌적하고 평화롭게 지나다 보니 페르가몬 외곽에 주둔 중인 로마군을 깔보게 되었다. 방심한 폰토스 장군은 밤을 보내면서 방버벽을 세우지도 않고 마치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처럼 굴다가, 어두운 밤을 틈타 완벽한 로마식 대형의 4개 군단이 나타나자 너무 놀란 나머지 저항하지 못했다. 에우마코스와 그의 선임 보좌관들은 남은 군대와 마르쿠스 마리우스의 상황은 살필 겨를도 없이 도망갔다. 템브리스 강까지 도망 온 에우마코스는 갈라티아의 톨리스토보기족이 마르쿠스 마리우스 군대를 공격하고 있는 상황을 목격했고, 결국 수천 명이 전사했다. 에우마코스는 젤라로 돌아갔고, 마르쿠스 마리우스는 직접 미트리다테스를 찾아나섰다. 
 


카이사르는 승리를 거머쥔 아시아 속주의 민병대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고 규율을 가르치며 아시아 속주의 운명은 주민들의 손에 달려 있고 그들 자신이 방어할 능력이 있다며 사기를 고무시켰다. 엠논은 카이사르에게 신전 내부에 그의 조각상을 세우겠다고 말하고, 카이사르는 이를 받아들인다. 스물여섯 살, 그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군대를 승리로 이끌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승리가 다른 방식으로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루쿨루스를 만나기 위해 페르가몬으로 향했다. 예상했던대로 루쿨루스는 위법을 하지는 않았지만 체계를 지키지 않은 카이사르를 맹비난했고, 기소하는 일은 없겠으나 인정할 수 없으며 다른 어떤 총독의 군관으로도 임명되지 못하게 할 거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그러나 우리의 카이사르가 어떤 사람인가. 집정관에게 한마디도 지지않고 논리정연하게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모습이라니. 루쿨루스의 의문의 패다. 
 


루쿨루스가 비교적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다보니 인간적으로 카이사르를 싫어한다해도 그에게 새로운 임무를 지시한다. 지중해에서 해군 소탕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기테이온에 있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하급 군관으로 보낸다. 하급 군관 신분에 어긋나는 언행을 한다면 군사법정에 세우겠다는 엄포를 덧붙여서. 더구나 카이사르가 미움을 받는 안토니우스 집안 사람의 하급 군관으로. 카이사르의 외삼촌인 또 다른 집정관 마르쿠스의 코다의 말이 딱 맞다. 루쿨루스나 카이사르나 독선적이기는 마찬가지. 카이사르, 갈 길이 구만리다. 그런데 되는 사람은 어떻게든 된다더니. 행운을 빌었던 큰외삼촌의 죽음이 카이사르에게는 행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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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의 선택 3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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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트리다테스 왕이 진군을 시작해 비티니와의 국경인 헤라클레이아까지 당도했다. 폰토스 국왕이 비티니아를 접수할 작정이라는 소식은 로마에도 전해졌다. 미트리다테스 왕의 입장에서 보자면 혈통, 태생, 근접성을 모두 따져봤을 때 비티니아는 로마가 아니라 폰토스에 귀속되어야 했으므로 로마가 비니티아를 가로채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폰토스 국왕은 헤러쿨레이아에서 로마의 반응을 살피며 기다리고 있었다. 
 


총독의 죽음으로 킬리키아 총독 직이 공석인 탓에 타르소스에 주둔중이던 2개 군단은 아시아 속주를 도우려고 나서지 않았다. 에페소스와 사르디스에 주둔중인 핌브리아군 2개 군단을 페르가몬으로 불러들이기는 했으나 페르가몬에서 비티니아로 군대를 파견할 낌새가 안 보였다. 8월이 되자 두 집정관 루쿨루스와 마르쿠스 코타가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미트리다테스 문제를 직접 해결하기로 했다. 비티니아는 별도의 속주로 분리되어 마르쿠스 코타가 담당하게 되었고, 킬리키아는 루쿨루스에게 돌아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시아 속주의 운명은 예측 불가의 상태에 놓였다. 
 


한편 로마의 사정은 이렇다. 현 집정관 루쿨루스의 동생 바로 루쿨루스가 다음해 수석 집정관으로 당선되었고, 빌런 가이우스 베레스는 사악한 수완으로 재력가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여전히 재물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이러한 부정부패와 태만, 사리사욕은 이들만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고, 원로원은 미트리다테스 왕과의 전쟁을 심각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심지어 폰토스의 군대가 코앞까지 들이닥쳤음에도 원로원은 어떠한 합의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융쿠스에 대한 항의가 빗발쳐 로마로 소환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술라의 독재와 공포정치가 옳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술라가 죽자마자 스스로 로마의 기둥이라고 자처하는 원로원의 방만한 모습을 보면서 술라의 모순이 다시 떠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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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의 선택 3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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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살, 원로원에 입성한지 5년차. 카이사르는 죽어가는 니코메데스 왕으로부터 호출을 받는다. 마땅한 후계자가 없는 니코메데스 왕은 카이사르를 비티니아 왕국의 후계자로 삼고 싶다고 하지만, 카이사르의 설득으로 비티니아를 로마에 유증한다. 따라서 비티니아는 로마의 아시아 속주에 편입됐다. 



새로 부임할 비티니아의 총독에게 위임할 준비를 끝낸 카이사르는 비티니아를 출발해 한두 해 정도 공부할 계획으로 로도스 섬으로 향한다. 밀레토스를 떠난 후 해적과 마주한 카이사르는 자신의 몸값을 더 올린다. 몸값이 낮다고 자존심 상해서 펄쩍 뛰는 모습이라니. 해적 소굴에서 몸값이 도착하는 40일 동안 해적 소굴 인근을 관찰하면서 아주 안락하고 유쾌하게 보내고, 카이사르는 몸값을 치른 뒤 해적 소굴을 빠져나와 사흘 후 로도스 섬에 도착했다.  그리고 로도스 섬 도착 두 시간 만에 삼단 노선 열 척과 군인 500명을 마련해 다시 해적 소굴로 향했다. 절대 찾을 수 없다는 해적 소굴을 되짚어 간 카이사르는 약속대로 해적 두목 폴리고노스를 쇠고랑 채웠다. 두목조차 처음 드나들 떄에는 백 번도 넘게 헤맸다는 그곳을 단 한 번에 찾아간 방법은 파타라와 해적 섬 사이의 만의 개수를 세어났던 것. 이런 영악한 남자를 보았나. 



이 사건을 통해 카이사르는 로마에 의해 로도스 해군력 약화로 인해 해적이 세를 키우게 됐고, 해적 근절을 위해 해군력을 증강하면 반란을 우려한 로마로부터 압박을 받는 현실적인 문제를 알게 된다. 이렇게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이 처한 현실적은 문제들을 하나둘씩 알아감과 동시에 현명한 문제 해결과 탐욕에 대한 절제로 명성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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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2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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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법을 지키는 것과 공평한 것이고, 불의는 법을 어기는 것과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법은 모든 것과 관련해, 모든 사람의 공통 유익 또는 귀족들의 유익 또는 미덕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 통치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해 무언가를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 공동체를 위해 행복과 행복의 요소들을 만들어내고 보전하는 것을 우리는 정의롭다고 한다.  



자기 자신과 친구들에게 악덕을 행하는 자가 가장 나쁘고, 자신의 미덕을 자신이 아니라 남에게 행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다. 미덕과 정의의 실체는 같지만, 이 둘을 정의하는 방식은 같지 않다. 남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본 것이 정의이고, 그 자체로 어떤 종류의 성품이냐 하는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미덕이다. 정의는 한 종류가 아니고, 미덕들 전체를 가리키는 정의와 구별되는 다른 정의가 분명 존재한다. 모든 시민을 교육하려고 제정된 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 온갖 미덕이 만들어진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과 훌륭한 시민이 되는 일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나쁜 악행은 자신에게 저지른 것이고, 가장 좋은 미덕은 남에게 행하는 것, 그리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과 훌륭한 시민이 다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에 감탄하지 안을 수 없다. 현재 우리는 전자의 경우 반대로 행하고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에 대한 구분이 없으니 말이다.  



불의한 행위와 불의한 것, 정의로운 행위와 정의로운 것은 다르다. 정의든 불의든 실제로 행했을 때에만 불의(혹은 정의)한 행위가 되지만, 행하기 전에는 행위는 존재하지 않고 불의(정의)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행하지 않는 정의는 진정한 정의라고 볼 수 있는가? 여기에서도 자발성 여부가 중요하다. 정의(불의)가 비자발적으로 행했다면 그것은 정의(불의)라고 할 수 없다. 자발적일 때에만 그 행위는 비난 혹은 칭찬 받을 수 있다. 자발적 방조 혹은 방관 역시 불의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비자발적으로 행한 불의한 행위 중에서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은 모르고 했더라도 무지가 아니라 자연적이지도 않고 이난적이지도 않은 감정으로 한 잘못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내 생각을 뒷바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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