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2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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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법을 지키는 것과 공평한 것이고, 불의는 법을 어기는 것과 공평하지 않은 것이다. 법은 모든 것과 관련해, 모든 사람의 공통 유익 또는 귀족들의 유익 또는 미덕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 통치하는 자들의 유익을 위해 무언가를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 공동체를 위해 행복과 행복의 요소들을 만들어내고 보전하는 것을 우리는 정의롭다고 한다.  



자기 자신과 친구들에게 악덕을 행하는 자가 가장 나쁘고, 자신의 미덕을 자신이 아니라 남에게 행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다. 미덕과 정의의 실체는 같지만, 이 둘을 정의하는 방식은 같지 않다. 남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본 것이 정의이고, 그 자체로 어떤 종류의 성품이냐 하는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미덕이다. 정의는 한 종류가 아니고, 미덕들 전체를 가리키는 정의와 구별되는 다른 정의가 분명 존재한다. 모든 시민을 교육하려고 제정된 법을 지키는 행위를 통해 온갖 미덕이 만들어진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과 훌륭한 시민이 되는 일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나쁜 악행은 자신에게 저지른 것이고, 가장 좋은 미덕은 남에게 행하는 것, 그리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과 훌륭한 시민이 다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각에 감탄하지 안을 수 없다. 현재 우리는 전자의 경우 반대로 행하고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에 대한 구분이 없으니 말이다.  



불의한 행위와 불의한 것, 정의로운 행위와 정의로운 것은 다르다. 정의든 불의든 실제로 행했을 때에만 불의(혹은 정의)한 행위가 되지만, 행하기 전에는 행위는 존재하지 않고 불의(정의)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행하지 않는 정의는 진정한 정의라고 볼 수 있는가? 여기에서도 자발성 여부가 중요하다. 정의(불의)가 비자발적으로 행했다면 그것은 정의(불의)라고 할 수 없다. 자발적일 때에만 그 행위는 비난 혹은 칭찬 받을 수 있다. 자발적 방조 혹은 방관 역시 불의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비자발적으로 행한 불의한 행위 중에서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은 모르고 했더라도 무지가 아니라 자연적이지도 않고 이난적이지도 않은 감정으로 한 잘못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내 생각을 뒷바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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