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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인 소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여담이지만,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탐정시리즈가 있다. 제작년인가로 탄생 20주년을 맞은 "탐정 진구지 사부로" 시리즈가 바로 그것인데, 오랜세월동안 기종을 바꾸어 가면서 이어져 온 롱셀러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탐정 어드벤처게임이다. 국내에도 많은 고정팬을 확보하고 있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게임. 이 진구지 사부로라는 인물로 말할것 같으면 잔뜩 무게잡는 고독한 탐정의 전형적인 캐릭터 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 진구지 사부로의 모델이 된 것이 바로 이 "하라 료"의 "사와자키" 탐정이 아닌가 하고 지금에 와서야 생각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하지만 진구지 사부로의 탄생시기와 하라료의 데뷔작인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의 출간 시기가 엇비슷한 것을 보면 더욱 그 심증은 굳어진다.
각설하고, 이책 <내가 죽인 소녀>는 사와자키 탐정이 등장하는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이자 제 102회 나오키상 수상작이다. "남자는 터프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고 부드럽지 않으면 살아갈 자격이 없다"를 모토로 살아가는 남자. 그런 남자의 요염함과 묵직함이 전편에 흘러넘친다.
탐정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은 무궁무진한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중에는 일반적인 탐정의 이미지에서 벗어난 인물들이 주인공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코믹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는 탐정의 평균 연령이 십대까지 내려간지 오래이고, 소설이라고 해도 실제로 탐정업에 종사할법한 이미지의 인물은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다. 외계인 탐정이 왠말인가! 어쨌든 추리를 하는데 연령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장애가 있어도 좋고, 빚더미에 올라 앉았어도 사건만 잘 해결하면 장땡, 하나같이 작품내에서 훌륭하게 대활약하고 있고, 개성있는 인물로 인해서 독자가 즐거워하면 그걸로 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흉악한 살인 사건의 범인을 간파해내고, 수수께끼에 싸인 사건을 해결해 내야 하는 탐정이라는 역할은, 아직 미성년인 십대의 아이나 꼬부랑 할머니가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가혹하고 무거운 짐이 아닌가 하는 의식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다. 실제로 살인사건 현장에 초등학생이 나타나서 손을 턱에 괘고 짐짓 심각한 척 하거나 노친네가 설친다면, 장담하건데 백퍼센트 욕만 얻어먹고 쫓겨난다. 실제로 무엇을 하겠는가, 걸리적거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혹시라도 범인과 격투라도 벌어지는 날에는 명탐정 사망으로 이어지기 쉽상이다. 요컨데 리얼함이 떨어진다.
명색이 살인사건이다. 한 인간의 생명이 타인의 손에 의해 불합리하게 사라졌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무겁다. 그런데 이러한 변칙 탐정이 등장하는 소설들은 그 무거움과 엄숙함을 배제하고 라이트하게만 가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번뜩이는 통찰력이나,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의 비약이라는 점에서는 어쩌면 사물에 대해서 유연한 발상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이나, 세월의 풍파를 헤쳐나온 노익장쪽이 (혹은 외계인이) 더 뛰어난 부분도 있을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살인 사건이라는 것을 어디까지나 리얼한 현실로서 바라볼때, 그 진상에 대한 호기심과 동시에 죽음이라는 것으로 인해서 마음에 드리워지는 어둠과 숙연함을 느낄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수수께끼를 푸는 것 뿐만 아니라, 불합리하게 빼앗긴 피해자의 생명의 무게를 등에 지고도, 냉철하게 사건을 파헤칠수 있는 정신적인 강인함이라는 의미에서의 탐정은, 역시 조금은 사회에 찌들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협상이 가능할 정도로 말이 통하며, 위험한 폭력앞에서 객기도 부릴수 있는, 그런 탐정으로서 납득할수 있을만한 중년의 어른이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자면 이 소설 <내가 죽인 소녀>의 사립탐정 사와자키와 같은.
가족의 일로 상담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고 작가 마카베 오사무의 자택으로 향한 사와자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딸을 돌려달라'는 마카베 오사무 당사자의 절규와, 여행가방에 들어있는 몸값, 그리고 잠복하고 있던 형사들이 덮어씌운 "마카베 사야카 유괴의 공범자"라는 정말이지 짐작도 가지않는 혐의였다. 혐의는 곧 벗겨졌지만, 그 후 진짜 유괴범의 지시에 의해 몸값의 운반을 하게 하게 된 사와자키는 1시간 가깝게 패밀리 레스토랑을 차례로 돌아다닌 끝에 결국 누군가에게 후두부를 강타당하고 졸도, 가방째 몸값을 빼앗기고 그로 인해 유괴범과의 교섭도 중단되게 되어 버리는 추태를 연출하기에 이르른다. 결국 빠지라는 경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한명의 사립탐정으로서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한다.
과연 전화를 걸어 온 "남자같은 여자"의 목소리의 주인과 실제로 현금을 빼앗은 인물은 동일 인물인가, 혹은 공범자인가, 그렇지 않으면 현금을 빼앗은 것은 유괴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제삼자인가. 피해자의 가족으로부터는 원망의 소리를 듣고, 경찰로부터는 유괴 사건의 공범자가 아닌가 끈질기게 의심받고, 정말이지 그 노력을 보상받지 못하는 불운한 사립탐정이지만, 확실히 본서의 특징 중 한가지가, 주인공이 스마트하게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 범인을 밝혀 내 버리는 명탐정과 같은 신들린 존재가 아니라, 노력의 많은 부분을 허무하게 날려 버리기도 하는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쓰여져 있다는 점이다. 뒤늦게서야 알아채기도 하고, 간신히 도달한 진상이 결국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가리키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탐정으로서의 신념을 밀어 붙이는 쿨하고 고독한 한사람의 사립탐정의 모습을,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서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담배라면 필터없는 피스, 알코올이라면 위스키 버본, 당장이라도 고장나 버릴 것 같은 승차감 나쁜 '블루 버드'를 운전하는 중년에 막 접어든 덧없는 사립탐정의 이미지는, 확실히 미국에서 탄생한 하드보일드 사립탐정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요즈음의 의표를 찌르는 탐정만을 접해온 독자에게 있어서는 반대로 신선한 인상을 주게 될런지도 모른다. 언제나 오만상을 찌푸리고 "빌어먹을"이라는 대사를 내뱉는 대신에, 빌어먹을 세상이라도 게의치 않고 조크를 날리고 휘파람을 불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갈수 있는 남자의 멋. 그게 사와자키다.
그는 말많은 남자가 아니다. 오히려 무서울 정도로 과묵한 남자다. 결코 감정을 드러내 보이는 일이 없고, 매일매일을 담담하게 살아가고 있다. 지울 수 없는 과거를 짊어지고 있는 고독한 남자다. 그런 탓도 있는 것일까. 그의 특징중 하나가 금전에 관해서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만큼 무관심 하다는 것. 그리고 연발하는 신랄하고 쿨한 대사가 좋다. 상대의 비아냥을 순간적으로 받아칠수 있는 치기등, 대화가 고도의 유희임을 깨닫게 해주는 남자.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서 그랬듯이 <내가 죽인 소녀>에서도 이런 대화의 묘미를 마음껏 만끽할 수 있다.
사와자키는 주의 깊은 남자다. 타인이 내는 신호를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타고난 재치로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이라기 보다는, 경험의 축적에 의한 형사의 감에 가깝다. 상대의 시선의 흔들림, 말, 행동, 상황의 판단... 터프하고 주의 깊고,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서투른 부분을 잘알고, 신랄하면서도 타인에게 부드러울수 있는 남자. 다 읽고 나면, 모르는 사이에 이 남자에게 빠져들어 있는 자신을 깨닫는다. 아마 동양인 중에 해외의 하드보일드 탐정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와자키일 것이다. 부드러움을 감춘 터프가이임을 행동으로 나타나게 하려면, 확실한 이야기의 구성력과 무엇보다 순간 순간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문장력이 필요하다. 이 작품은 틀림없이, 그러한 요소를 충족하고 있고, 그래서 전형적인 하드보일드의 사립탐정인 사와자키의 모습은 하나의 전형적인 캐릭터를 구축하고 있으면서도, 과장되지 않고 수수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다. '하드보일드 소설의 진수는 바로 이런것' 임을 이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