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래그먼트 - 5억년을 기다려온 생물학적 재앙!
워렌 페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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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린시절의 나는 대자연과 생태계의 신비에 대해 무한한 경외감을 품고 있는 지적이고 잘생긴 아이였다. 어른이 된 지금, 막연하던 어릴적 꿈이 현실로 이루어져 결국 생물학자가 되었다는 식으로 인생이 아름답게 전개되지는 않아서 기껏해야 티비앞에 쪼그리고 앉아 동물의 왕국을 시청하고 있을 뿐이지만, 언제 봐도 여전히 신비로운 동물의 왕국이다.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고 있는 동물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팽팽한 긴장감, 먹고 먹히는 살육전, 동족간의 힘겨루기, 일말의 동정심 없이 본능에 충실한 그 먹이사슬의 현장을 보고 있으면, 무질서 한 듯 보이는 그 안에 인간세상에 버금가는 수많은 규칙들이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고 경탄하게 된다. 현존하는 동물들이 매일매일 그저 살아가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이러한데, 하물며 공룡이나 킹콩같은 괴수들의 에피소드쯤 되면 열광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폼나는 수퍼히어로들의 이야기만큼이나 흉칙한 괴수, 괴물과 같은 이형의 생명체가 영화의 소재로 자주 다루어지는 모양이다.

그런데 정말로 이런 이형의 생명체들은 우리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실제로 존재할 가망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이 생명체들이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질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지구상의 각양각색의 생명체들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오늘날 자신이 속한 환경에 가장 적합한 형태와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지구상에 오늘날까지도 인류의 손길이 닿지 않는 장소가 있어서 현재 알려져 있는 생물군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독자적인 진화를 해온 생물들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리고 이 낮선 생물들이 기존의 생물들에 비해 훨씬 공격적이고 위험한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면? 이 책 <프레그먼트>에는 그러한 상상에서 출발한, 독자적으로 진화해온 생물체들이 군집해 만들어내는 지구위의 또 하나의 생태계가 눈 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전세계 곳곳의 바다를 항해하며 이국적인 장소나 진귀한 동식물을 소개하는 인기 티비 프로그램 "시 라이프"의 스탭을 태운 트라이던트호가, 남태평양의 외딴섬 헨더스 섬으로부터 보내져 오는 구조 신호를 포착한다. 헨더스섬은 18 세기에 영국 군함이 단 한번 발견 한 적이 있었을 뿐,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조사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미지의 섬이었다. 전인미답의 땅에 상륙하게 된다는 흥분으로 들끓는 트라이던트 호의 탑승객들. 그러나 헨더스 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지금껏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갑각류를 닮은 기괴하고 흉폭한 동식물의 무리였다.

낮선 생물들에 의헤 차례차례 학살되는 상륙 멤버들의 모습이 담긴 충격적인 영상이 전파를 타고 생방송으로 전세계에 중계된다. 너무나 충격적인 데다가 포커스가 제대로 맞추어져 있지 읺은 이 영상이 실제냐 연출이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관심을 보인 미국 정부는 즉시 최신 장비를 갖춘 정예 조사대를 헨더스 섬에 보낸다. 그러나 헨더스섬의 가혹한 생존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이 강인한 생물군 앞에서는 NASA의 최신 장비마저 무력하다. 이 생물들이 만약 대륙에 상륙하게 된다면, 기존의 생태계는 순식간에 초토화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모든 생물은 즉시 멸종 당해 버린다.

이런 것 정말 좋아하는데 최근에는 좀처럼 보기힘든 계열의 소설. 에일리언처럼 동에번쩍 서에 번쩍하는 초강력 독불 장군 몬스터가 아니라 다수 대량의 생명체가 하나의 커다란 생태계를 이루고 살아간다는 설정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서는 마이클 크라이튼의 후계자라느니, 테크노스릴러의 계보를 잇는다던가 하는 식으로 이야기 되고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영화라면 모를까 소설쪽에서는 의외로 많이 있었던 것 같으면서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류이고, 그러고보니 최근에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본 기억이 없다. 그런 타이밍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이 소설은 표지에서부터 벌써 심상치 않은 포스가 풍겨나온다. 특히, 독자적으로 진화한 이형의 "생물군"이라는 설정이 오랫만에 나의 어린시절의 감성을 직격했다.

잘 만들어져 있다. 스피디한 전개는 지루할 틈이 없고, 진기한 괴기 생물들이 거침없이 꾸역꾸역 몰려 나오다가 마지막에는 휴머니티 맛까지 완비. 굉장하다. 여기서 일단, 그런 괴기 생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불법적인 연구의 부산물이라거나, 방사선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돌연변이, 우주에서부터 흘러들어온 외계생명체같은 진부한 수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책에 나오는 생물들은 갑각류에 그 진화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그야말로 철갑을 두르고 게다가 막 날아다니고 튀어오르는 등의 독창적인 형태를 하고 있지만, 진화생물학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창조된 것들이라는 점에서, 마구잡이 상상으로 이것도 붙여보고 저것도 붙여보고 해서 만들어진 B급 몬스터영화의 괴수들과는 그 태생이 다르다. 하나의 생물이 생태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서장에서부터 실례를 들어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시작으로, 생물의 수명이 근친교배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등 흥미로운 가설과 생물학적 지식들로 가득하다.

현실의 생태계와는 달리 원반개미, 헨더스 쥐, 헨더스 말벌, 스피거 등등의 헨더스 섬의 주민(생물)들의 생태계는 와일드의 극치를 달린다. 위 아래도 없고, 서로 먹고 먹히는 무시무시한 생태계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것은 주라기 공원보다 더 나은것이 아닌가. 유전공학을 기반으로 한 주라기 공원보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이 쪽이 더 설득력있게 들린다. 어쨌든 이런류의 작품에 굶주려 있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소중하게 받아들여질만한 작품. 기대에는 절대로 부응한다. 주라기 공원 이후로 <프레그먼트>가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을 생각하면 언제 또 이런 소설이 나와줄런지. 이 "지적인 몬스터 소설"은 보호 소설로 지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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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2814 2011-08-23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번에 프레그먼트 쓴 작가가 후속작 낼 예정이랍니다. 이번에는 섬이 아닌 외부에 손이 닪지않은 동굴 스토리에 배경이라는 이야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