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은 지금까지 단 한편밖에 읽어보지 못해서 감히 "란포는 이런 작가다"라고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그 강렬한 이미지만은 머릿속에 완전히 각인되어 있어서 "나에게 있어서 란포는 이런작가다" 라고는 확실하게 말할수 있다.
오래 전에 일본어 공부를 하다가, 무리해서라도 원서로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충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별 생각없이 집어든 것이 바로 에도가와 란포의 "외딴섬 악마"였던 것인데, 그 음침한 분위기가 초반부터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는 책이었다. 생각외로 한자가 너무 어려워서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다가 나중에 한글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결국 한글판으로 재도전.
란포는 커녕 추리소설이란 것 자체에 익숙치 않던 때라, 도입부부터 한 청년의 연인이 밀실에서 살해당하고, 게다가 사건을 맡기로 한 탐정까지 사람들의 눈앞에서 살해당해 버리는 장면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건 말 그대로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청년과 기묘한 관계에 있는 주인공이 밝혀낸 무서운 불구자 섬의 비밀은... 그걸 지금 다시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져 올 지경이다.
굉장하고 무서운 책이었다. 성인이 된 뒤로는 이렇게까지 무서운 이야기를 읽은 적이 없었다. 잔혹한 행위나 묘사에 의한 그로테스크함이 그 공포의 정체가 아니라, 범인의 생각 자체가 무섭다. 이야기 전체에 떠도는 일그러진 가치관이 너무나 섬찟하다. 전반은 불가능 살인의 수수께끼, 후반은 어떤 기괴한 쌍둥이의 이상한 기록, 그리고 외딴섬에 들어서고 나서의 절망의 동굴탐험, 이윽고 밝혀지는 배덕의 진실. 어쨌든 요상하고 기괴한 상상력으로 가득찬, 정말로 지옥을 탐험하고 나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머릿카락이 쭈뼛쭈뼛 서게 만드는 기형적인 등장인물들의 묘사, 왠지 동성을 끌어 당기는 화자. 눈 깜짝할 사이에 무기력하게 살해당해 버리는 명탐정. 깊은 과거를 짊어지고 있는 아름답고 영리한 동성애자 등등. 이외에도 심각한 불구가 된 사람들이 대량으로 나오고, 무서운 이야기에는 익숙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해 왔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그만 어질어질 해 버렸다.
게다가 차례차례 그려지는 비틀린 사랑까지도 등뼈를 진동하게 만든다. 동성애 뿐만 아니라, 엄마가 아들의 몸을 탐하고, 남녀가 결합된 샴쌍둥이가 한쪽이 한쪽을 사랑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게 미쳐 있다.
범인의 악은 너무나 농후하고, 그 광기어린 행위로 말할것 같으면 잔혹함에 있어서는 비교할 곳이 없음. 확실히 무서운 것을 넘어서 전율하게 만드는, 음침하고 기괴한 상상력의 극치라고 할 수있다.
결말부분에서 묘하게 무 자르듯 잘라내듯이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게 유일한 아쉬움이었지만, 에도가와 란포라는 작가의 이름을 뇌리에 남기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는 작품이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의 작품들이 칭송받고 여전히 임팩트를 잃지 않는 이유를 잘 알수가 있었다.
수많은 후배작가들이 란포의 작풍의 영향을 받았고, 아직도 여전히 받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이 원조의 벽을 넘을수 있는 작가는 앞으로도 영원히 등장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란포의 작품에는 당시의 특수한 시대상이나 가치관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란포뿐 만 아니라 요코미조 세이조 같은 초창기 작가들의 작품들이 그렇듯이, 그 시절의 일본이라는 공간을 살아가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작품들을 써낼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완전히 다른 시간,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지금의 사람들의 상상력으로는 아무리 발버둥친다고 해도 그 뿌리까지 모방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란포의 작품과 같은 작품을 읽으려면 란포를 읽는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는건가. 고작 한 작품을 읽은 것만으로 이런 이야기를 주절거릴 수 있을 만큼 그와의 첫만남이 강렬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란포의 소설은 그동안 좀처럼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되는 작품이 없어서, 이 외딴섬 악마를 몇번을 꺼내 읽었는지 모른다. 고맙게도(놀랍게도) 이번에 두드림에서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이 총 3권 모두 출판 되었다는 소식이다.
에도가와 란포에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두드려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