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야기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0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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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23036

좋은 작품이란 재미있거나, 감동적이거나, 여운이 있거나 일텐데, 윌리엄 트레버의 작품은 여운이 있는 작품이다. 솔직히 말해서 트레버의 작품은 막 재미있지는 않다, 그리고 감동이나 교훈을 주지 않는다. 이야기나 인물들 자체가 엄청 평범하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여운이 진하게 남는다.


트레버의 묘사는 상세하다. 반면 등장인물의 대사는 짧다. 절대로 길게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장에 숨겨져 있는 의미는 대단히 깊다. 한번 읽고 지나칠 수 없고, 곱씹어서 생각을 해야 이해할 수 있다.

[애니타 라이드는 출판사 원고 검토자가 무엇인지 알기 전인 1970년 대에 파이어플라이스 멤버로 춤을 추었고, 텔레비전에 출연해 춤추고 노래하는 삶의 흥을 즐겼다. 매력이 넘치고 나름대로 잘생긴 연상의 남자가 그녀를 흠모했고, 이윽고 그 남자는 그녀에게 자신과 결혼하는 걸 견딜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와 결혼하지 않는 걸 견딜 수 없다고 대답했고 그건 진심이었다.] P.48 <다리아 카페에서 중 >


[그녀는 여느 여행에서는 아버지가 독서에 몰입할 때 가끔 소외감을 느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간간이 떠오르는 즐거운 미소, 책장을 넘기는 섬세한 손, 여행중에도 구겨지지 않은 여름옷이 그가 긴 세월을 두고 서서히 얻게 된 마음의 평안을 나타냈다. 그는 자신의 비통함을 잘 견뎌냈다. 어딘가에서, 오늘 그리고 모든 날에, 그가 끝까지 사랑했던 아내는 그가 주지 못한 만족감을 즐겼다. 그는 잔인한 인내심을 발휘해 그가 없는 그녀의 삶에 대해 곱씹으며 살 수도 있었지만, 그 대신 비우기를 택했고, 그것이 진실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P.240 <여자들 중>



윌리엄 트레버의 마지막 작품인 <마지막 이야기들>에는 10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그런데 하나같이 다 좋다. 어떻게 그럴수 있냐고? 정말이다. 하나같이 다 좋다. 국내에 번역된 윌리엄 트레버의 책을 다 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가장 좋았다. 가장 최근에 읽어서 그런걸수도 있겠지만...


10편의 단편이 다 좋지만, 가장 좋은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겨울의 목가>를 선택하겠다. 다 읽고 나서도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줄거리를 간단히 풀어보진면,


한적한 시골에 있는 큰 농장의 딸인 "메리 벨라", 어느날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한가하게 있던 도시에 살던 "앤서니"가 "메리 벨라"의 가정교사가 되어 시골로 내려온다. 그리고 두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다.

["굉장히 히스클리프적인데." 황무지에서 말을 타고 경주를 벌이는 사람들을 보고 그가 말했다. 그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그가 책을 읽어주었는데, 무슨 책이냐에 따라 그녀가 읽어주기도 했다. 그녀는 그 여름이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슬펐다. 그는 그 여름이 결코 끝나지 않을 거라고, 기억이 그걸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P.180



하지만 "앤서니"는 떠날수 밖에 없었고 두 사람은 좋은 감정을 뒤로하고 각자의 인생을 살아간다. "앤서니"는 지도제작자가 되어 가정을 꾸리고 살고, "메리 벨라"는 미혼으로 살면서 농장을 운영한다. 그렇게 각자 살았더라면 괜찮았겠지만, "앤서니"는 지나가는 길에 "메리 벨라"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아직도 그곳에 있는 그녀를 만난다. 그리고 두사람은예전의 좋은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음을 알게된다.

[너를 다시 보니 기분이 얼마나 묘한지. 난 과거의 시간은 과거로 남아 있어야 하는 건지 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 집을 지나쳐갔어. 하지만 다시 마음을 바꾸지 않았더라면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거야.] P.189



결국 "엔서니"는 가정을 버리고 그녀의 집으로 온다. 누군가의 불행을 방치한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메리 벨라"는 잠깐의 행복을 느끼지만 언젠가는 "앤서니"가 떠날거라고 예감한다.

["이제 다 끝났어." 앤서니가 말했다. "끔찍한 시간은 지나갔어." 끝나지 않았다. 기억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점잖게 사라지지 않고 악마들을 풀어놓는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고, 그녀는 안 그럴 거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P.202



불행할걸 알면서도 멈출수 없는 감정, 그 떨림과 체념을 너무나 완벽하게 담고 있는 작품이었다. 차라리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자책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차피 마음이 이미 기울어 있는데 말이다. 사랑은 끝나더라도 흔적은 그렇게 남겨진 것이 된다.

[일꾼들이 의자를 뒤로 밀치고 일어선다. 붉은 타일이 깔린 바닥에서 그들의 장홧발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메리 벨라는 불안감을, 그리고 어쩌면 연민을 감지한다. 그녀는 그것들을 웃어넘기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변함없는 사랑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그에게는 그 사랑이 그녀의 그림자들 사이에 존재하고 그녀에게는 그와 함께했던 방들과 장소 에 있음을 일꾼들이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 사랑이 시들지 않을 것임을, 길고 느린 죽음이나 평범해진 사랑은 없을 것임을 일꾼들이 알 수 있기를 바란다.] P.206





다른 단편도 소개하고 싶지만 시간관계상 못쓰는게 아쉽다... 단편을 좋아하신다면, 특히 체호프를 좋아한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거라 확신한다.




Ps. 이 책에 대한 몇몇 추천사들

'나는 언제나 트레버를 읽고 또 읽는다. 그리고 항상 놀란다. 현실에서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끔 찍한 행동을 하지만 트레버는 어떠한 판단도 없이 그들을 바라본다. 그건 정말로 사랑스러운 일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트레버의 문체는 너무도 섬세해서, 사실상 문체라고 부를 것이 없다.' 존 밴빌

'트레버는 21세기의 체호프다. 월스트리트저널
평범한 삶에서 이끌어낸 비범한 이야기' 타임스

'트레버 소설의 특징은 군더더기 없는 적확하고 생생한 묘사, 흔들림 없이 정밀한 인물 설정, 칼같이 예리한 동시에 불가사의한 부드러움을 지닌 소설적 시선에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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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6-16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범한 인물들의 이야기, 근사한 묘사를 이끌어내고 진한 여운을 남긴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죠. 새파랑님의 리뷰를 읽어보니 읽을 이유가 충분하군요^^*

새파랑 2023-06-16 17:11   좋아요 1 | URL
화가님은 윌리엄 트레버 잘 맞으실거 같아요 ^^ 강추합니다~!!

페넬로페 2023-06-16 1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편다 좋고 여운이 남는 내용이면~~
무조건 읽어야겠어요^^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여운이 있는 작품이 좋은 책이다^^
밑줄 쫙!!!!!!!
책 표지도 멋지네요^^

새파랑 2023-06-16 22:17   좋아요 1 | URL
표지도 좋고 내용은 더 좋고 ^^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레삭매냐 2023-06-16 1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까 서점에 들러서 만지작
거리다가 그냥 돌아섰습니다 -

나중에 중고책으로 풀리면
그 때 만나 보는 것으로.

새파랑 2023-06-16 22:19   좋아요 1 | URL
중고든 새책이든 좋으면 그만이죠~!! 레삭매냐님이라면 이 책 정도의 두께는 그자리에서 다 읽으실거 같아요~!!

독서괭 2023-06-16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편이 한결같이 좋다니 굉장해요!! 저는 펠리시아의 여정 이후 못 읽고 있네요 ㅠㅠ

새파랑 2023-06-16 22:20   좋아요 1 | URL
전 윌리엄 트레버의 국내판중 <펠리시아의 여정>이 젤 안좋았습니다. ㅋ 당연히 좋긴 한데 가장 약한편? ㅋ

희선 2023-06-17 0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파랑 님은 트레버 소설을 아주 좋아하시는군요 다른 작가도 좋아하겠지만... 이 책에 담긴 단편은 다 좋다니, 책 읽는 동안 즐거워겠네요

새파랑 님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새파랑 2023-06-17 10:59   좋아요 1 | URL
윌리엄 트레버 아주 좋아합니다~!! 그의 다른 작품도 더 읽고싶은데 더이상 번역책이 없네요주ㅜ

그레이스 2023-06-17 0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트레버는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여성의 삶에 대해 그리는 듯 보이네요
모아놓은 그의 작품 다 읽지도 못했는데, 이 책도 들여놓아야 하려는지... 고민중이었는데, 새파랑님 리뷰가 떠억!

새파랑 2023-06-17 11:00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은 윌리엄 트레버 좋아하실거라 확신합니다 ㅋ 주위를 바라보는 트레버의 시선이 너무 좋습니다~!!

han22598 2023-06-18 0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윌리엄 트레버....지금 도전중입니다. ㅋㅋㅋㅋ 새파랑이 좋아하시니..저도 좋아할 것 같은데 아직 느낌이 안오네요 ㅎㅎ

새파랑 2023-06-18 19:11   좋아요 0 | URL
앗 ㅋ 좋으셨으면 좋겠지만 다 맞을수는 없죠 ^^ 영어로 읽으시면 더 느낌이 오지 않을까요? ㅋ

coolcat329 2023-07-01 10: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트레버의 소설은 읽고난 후 여운이 짙어요.
10편이 다 좋으셨다니 또 사야하나 싶네요. ㅎㅎ

새파랑 2023-07-01 12:22   좋아요 1 | URL
무조건 구매하셔야 합니다. 트레버는 소장각입니다~! 재독, 삼독해야 하는 작가라 생각합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