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54

˝불안에 쫓겨, 불안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움직여서는 아무리 걸어도, 아무리 걸어도 해결될 리 없다. 평생 해결되지 않는 불안 속을 걸어가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갱부>는 열아홉살의 화자인 ‘나‘가 가출을 하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한다. 정확하게 원인이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삼각관계로 인해 혼란을 겪은 부잣집 아들인 ‘나‘는 무작정 집을 나선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길을 헤매다가 ˝조조˝라 불리는 한 남자를 만난다. 그리고 ˝조조˝는 나에게 ‘갱부‘가 될 생각이 없는지 물어본다.

[그 흐릿한 세계가 흐릿한 채 널리 퍼져 정해진 운명이 다할 때까지 앞길을 막는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채 멈춘 한쪽 발을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디면 그 불안 속에 한 발짝 발을 들여놓는 셈이다. 불안에 쫓겨, 불안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움직여서는 아무리 걸어도, 아무리 걸어도 해결될 리 없다. 평생 해결되지 않는 불안 속을 걸어가는 것이다]  P.20



죽을까도 생각했던 나였기에, 차라리 갱부가 되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가서, 운좋으면 죽을수도 있기 때문에 큰 고민없이 ˝조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조조˝와 함께 기차를 타고 광산이 있는 곳으로 떠난다.

[˝자신이 거울 앞에 서 있으면서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신경 써본들 어떻게 되는 게 아니다. 세상의 규칙 이라는 거울을 쉽사리 움직일 수 없다면 자신이 거울 앞을 떠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다.˝]  P.44



그리고 광산을 가는 도중에 두 사람을 만나는데, ˝조조˝는 두 사람에게도 ˝갱부˝가 되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다. 그런데 그 두사람 역시 아무 망설임 없이 ˝조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들도 나처럼 삶에 대한 의욕이 없이 죽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혼자가는 것보다는 여럿이서 가니 마음이 편해진다.

[혼자 전락하는 것은 둘이서 전락하는 것보다 쓸쓸한 법이다.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면 실례되겠지만 나는 이 사내를 한 구석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저 함께 전락해준다는 점만이 고마워서 아주 유쾌했다.]  P.92

[만약 죽고나서 지옥에라도 가는 일이 생긴다면 사람이 없는 지옥보다는 반드시 요괴가 있는 지옥을 택할 것이다.]  P.92



그렇게 나는 광산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도쿄에서 내가 보던 사람들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삶의 마지막 벼랑끝까지 몰려서 이곳으로 온 사람들. 그들이 바라보는 나는 아직 어리고 순진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내가 결코 갱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젊은이다운 오기가 있었던 나는 그들의 태도에 위축되지 않는다.

[˝이봐˝ 하는 소리가 어떤 얼굴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얼굴에서 나왔다고 해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어떤 얼굴이나 다 사나웠고, 자세히 살펴볼 것도 없이 그 거친 얼굴에 경멸과 조롱과 호기심이 분명히 새겨져 있다는 것은 고개를 들자마자 발견한 사실이었다.]  P.169



그리고 갱부가 되기 위한 준비단계로 안내자와 함께 갱도로 들어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암흑속을 단지 등 하나만 가지고 들어가서, 세상의 끝과 마주하게 된다. 좁고 가파르고 위험천만한 갱도 안에서 나는 무력감을 느낀다. 하지만 모든걸 포기하고 절벽 끝에 서있던 나는 갱부가 되는걸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도 도망간다면 더는 갈곳은 없다. 과연 나는 갱부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쥔 사다리를 두어 번 흔들어댔다. 물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손을 놓아버릴까? 거꾸로 떨어져 머리부터 박살 나는 편이 빨리 결말이 나서 좋을 것이다. 걷잡을 수 없이 죽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  P.264





나쓰메 소세키의 <갱부>를 처음 읽었을때 갑자기 다자이 오사무가 쓴 <만년> 의 첫문장인 ˝죽을 생각이었다.˝ 가 떠올랐다. 그런데 소세키와 오사무중 누가 더 형일까?


책은 진작 읽었지만 밀려서 이제 리뷰를 쓴다. 벼랑끝에 몰려 심리적으로 위축된 사람의 심리를 섬세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었다. 나도 이런 심리상태를 경험해봐서 그런지 소세키가 써내려간 한 사람의 절망감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공인 ‘나‘의 갱부 체험이 그때는 힘들었겠지만 지나고나서 돌이켰을때는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기를 바래본다. 언제까지 과거에 억눌려서는 살 수 없으니까 말이다.


Ps 1. 이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전작에 <명암> 한편만 남았다. 갑자기 너무 아쉬워진다.

Ps 2. 갱도를 헤매는 장면을 읽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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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04-13 20: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대단하세요. 소세키의 전작이라니요. 저 계속 소세키 <행인> 읽을까? 망설이는 중이에요.

새파랑 2022-04-13 20:43   좋아요 2 | URL
소세기 작품은 비슷한 분위기이인거 같으면서도 작품마다의 특색이 강한거 같아요. 그래서 재미있게 읽히더라구요 ㅋ 전 행인 아주아주 좋았습니다 ^^

청아 2022-04-13 2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세키의 자전적 경험일까요? 에밀졸라의 <제르미날>이 떠오르네요. 바쁘신 중에도 이런 멋진 리뷰를 쓰시다니요👍20 페이지 문장이 인상적입니다^^*

새파랑 2022-04-13 20:48   좋아요 3 | URL
저도 제르미날 읽어야 하는데 ㅜㅜ 자전적 이야기는 아닌거 같고 해설에는 제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본 기억이 어설프게 나네요 ㅋ (제가 해설은 주의깊게 안읽어서 😅)

제가 갱도에 가본적은 없지만 읽으면서 마치 제가 갱도 안에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

coolcat329 2022-04-13 22: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새파랑님 짱짱짱!입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 첫문장에 눈이 번쩍하네요.
저도 전작해서 아쉬움느껴보고 싶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새파랑 2022-04-13 22:30   좋아요 2 | URL
쿨캣님이라면 소세키 전작 금방하실거라 생각됩니다. 완전 좋아요 ^^

페넬로페 2022-04-13 22: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삶의 마지막 벼랑끝까지 몰린 사람들이 온 곳이라는 말이 많이 슬퍼네요.
소세키작가가 사람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탁월한 작가인지라 이 책도 좋을것 같아요.
저도 이제 한달에 한 권씩 소세키를 읽어 끝내야겠어요^^

새파랑 2022-04-14 06:07   좋아요 4 | URL
제가 전작을 해보니까 계속 읽는것 보다는 한달에 한권 정도가 적당한거 같더라구요 ㅋ 연속해서 읽으면 좀 질립니다 ㅎㅎ 현암사 소세키 책은 다 평균 이상이어서 읽는 재미가 있더라구요~!!

mini74 2022-04-14 00: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절망감이 낯설지 않다하시니 ㅠㅠ 지금은 괜찮으신거죠 새파랑님 !! 언제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새파랑님 즐겁고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ㅋㅋ 전 갱부하면 예전 일제강점기 끌려간 우리나라 사람들 생각도 나더라고요. 비슷한 시대라서 그런가봐요. *^^*

새파랑 2022-04-14 06:11   좋아요 3 | URL
저런 방황(?)을 하기에는 이젠 나이가 많아서 😅 지금은 먹고 살기 바빠서요 ㅋ 요즘 시대는 갱부가 별로 없는거 같은데 저 시대에 갱부로 일하면 참 힘들었을거 같아요 ㅜㅜ 위험하가기도 하고~~

희선 2022-04-14 00: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보다 소세키가 먼저 태어났죠 다자이 오사무가 소세키 소설 읽었을 것 같습니다 이제 한권 남았군요 저는 《명암》 읽었어요 마지막 소설이지만 길고 끝내지 못한 거네요


희선

새파랑 2022-04-14 06:12   좋아요 3 | URL
소세키가 형이군요 ㅋ 희선님도 소세키 작품 많이 읽으셨을거 같아요. 명암 좀 두꼅던데 😅 담달에 읽어보겠습니다 ^^

그레이스 2022-04-14 00: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좋았던 작품입니다!
잘 읽고 가요~~

새파랑 2022-04-14 06:13   좋아요 4 | URL
그레이스님은 소세키 전작 선배님이시죠 ^^ 갱부 저도 상당히 괜찮더라구요~!!

모나리자 2022-04-14 1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을 제일 먼저 읽고 소세키의 팬이 되었지요~ㅎ
한 권 한 권 도장깨기 하시는 새파랑님의 아쉬움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하루 되세요~ 새파랑님.^^

새파랑 2022-04-14 19:20   좋아요 1 | URL
아하 이 책을 먼저 읽으셨군요 ㅋ 소세키 작품은 시간순서대로 읽으면 더 좋을거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