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진실이 있으면 또다른 진실이 있게 마련이다. 이세상은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한다고 혹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로
가득하긴 해도, 사실,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과도 같다. 우리에 대한 진실에는 끝이 없다. 그 점은 우리에
대한 거짓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거짓말 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을 밝히지 않고 침묵하고 있을 뿐인데 이걸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꼭 무언가를 설명해야만, 설득헤야만 하는 걸까? 밝히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민약 상대방이 진실을 오해하고 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유태인으로 알려진 아테나 대학의 교수인 "콜먼 실크", 학장인 그는 진취적인 사고방식과 개혁적인 정책을 추진하여 학교의 활력을 불어 넣는 개방적인 인물이다. 나태한 교수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그리고 젊고 의욕적인 교수를 임용하는 그의 태도에 다른 교수들은 불만을 갖는다. 은퇴를 앞두고 있던 "콜먼"은 수업시간에 출석을 부르면서 두명의 학생이 한번도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나름 조크라고 여겨지는 말을 학생들 앞에서 한다.
["이 두 학생에 대해 알고 있 는 사람 없나요? 이 학생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아니면 유령들(spooks) 인가요?"] 1권 P.20
하지만 spooks란 말은 속어로 흑인을 지칭하는 말이었고, 공교롭게도 결석한 학생은 모두 흑인이었다. 어이없게도 그가 한 말은 그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잘못된 결과로 돌아오게 된다. 교수 생활을 하면서 단 한번도 인종차별주의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건만, 그는 그렇게 부당한 취급을 당하게 되었으며, 평소 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다른 교수들은 그를 보호해 주지 않는다. 이런 부당한 취급에 단단히 화가 난 "콜먼"은 이후 교수직을 내려놓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오해였기 때문에 화가 날 수 도 있었지만, 대상 학생들에게 사과를 했더라면 쉽게 해결될 문제였는데도, 그는 사과를 하지 않는다. 오직 분노에 분노만 한다.
[콜먼의 머리통, 한때는 누구도 감히 공격할 수 없던 학장 그리고 고전문학 교수의 두뇌를 감싸고 있던 머리통은 잘려나간 거나 마찬가지였고, 내가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것은 손발마저 잘려나간 나머지 몸통이 중심을 잃고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빠져드는 모습이었다.] 1권 P.28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상대방이 잘못된 내용을 말할 때 보다 상대방이 진실을 건드렸을 때 더 화가나는 법이다. 그가 그렇게 분노한 이유는 "콜먼"이 흑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흑인이지만 피부색이 백인에 가까웠던 그는, 젊은 시절 2차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백인'으로 패씽을 하였었고, 흑인이었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자신의 가족과 의절까지 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궁금해하지 않는 유태인 아내 "아이리스"와 결혼을 해서 완벽하게 "유태인"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콜먼 어머니의 말 : "내가 내 손자 손녀를 만져볼 수 있는 기회는 브라운 부인이니 뭐니 하는 이름으로 너희 집에 내가 아기 보는 할미로 고용되어 애들을 재우거나 할
때뿐이라고 네가 말한다면 난 그것도 그대로 따를 거다. 브라운 부인이 되어 네 집에 와서 청소를 해달라고 해도 난 그대로 할 거다. 그럼,
그럼, 난 네가 하는 말은 다 따를 거야. 내겐 선택의 여지라곤 없으니까] 2권 P.253
그렇다고 그가 자신을 스스로 "유태인"이라고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다만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 원래부터 '흑인'이었던 그에게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딱지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흑인'임을 밝힐 수 없었다. 이는 자신이 가족과 인연을 끊으면서 까지 쌓아온 인생을 송두리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후 아내는 이에 대한 헛소문으로 화병이 나서 죽게 되고, "콜먼"의 인생은 박살난다. 자신이 숨겨왔던 과거에 스스로 발목이 잡힌 "콜먼", 이를 그의 잘못으로만 말할 수 있을까? 왜 그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패씽'을 하며 살아야 했던 걸까?
[이스트오렌지고등학교에서는 수석 졸업생이었던 그가 인종차별을 하는 남부에서는 단지 또다른 검둥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인종차별이 남아 있는
남부에서는 흑인들에게 개별적인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와 그의 룸메이트도 개별적인 존재가 아닌 그저 검둥이였던 것이다. 세밀한 구별 같은
것은 허락되지 않았고, 그 충격은 그야말로 통렬한 것이었다. 검둥이, 그것이 그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스트오렌지고등학교에서는 수석 졸업생이었던 그가 인종차별을 하는 남부에서는 단지 또다른 검둥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인종차별이 남아 있는
남부에서는 흑인들에게 개별적인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았고, 그와 그의 룸메이트도 개별적인 존재가 아닌 그저 검둥이였던 것이다. 세밀한 구별 같은
것은 허락되지 않았고, 그 충격은 그야말로 통렬한 것이었다. 검둥이, 그것이 그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2권 P.192
이후 "콜먼"은 피폐해진 삶을 살아가면서 아무에게도 동정받지 못한, 은둔형 삶을 살아간다. 그런 가운데 그는 자신이 재직했던 대학의 청소부로 일하는 문맹인 30대 여성 "포니아"와 연인관계가 되고, 그녀와의 열정적인 사랑을 통해 위로를 받고, 그처럼 과거의 아픔이 많은 그녀를 통해 새로운 삶의 의미를 얻는다. 하지만 71살의 "콜먼"과 34살의 "포니아"의 관계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며 그에 대한 평판을 더욱 나쁘게 하고, 이러한 이야기는 "콜먼"의 자녀들에게 까지 들어가게 된다. spooks 사건 이후로 급격하게 전락하는 "콜먼"의 삶, "포니아"와의 만남으로 그의 육체는 오히려 젊은 시절처럼 활기를 찾으나, 그의 마음은 점점 죽어만 간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그것이 육체적 질병보다 한층 더 위험한 이유는 그걸 완화시키는 데 모르핀 점적 주사나 척수신경 차단 마취 혹은 환부를
도려내는 근치 수술 같은 것이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단 마음의 병이라는 녀석의 손아귀에 붙들리고 나면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죽는 수밖에는 없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1권 P.30
이후 "포니아"의 전남편이자 베트남전 참전 후 PTSD를 겪고 있는 "레스터 팔리"가 그들 앞에 나타나고, "레스터"는 그들 주위를 맴돈다. 알콜과 마약에 찌들어 있고, 결혼생활 내내 "포니아"를 구타했던 "레스터",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극심한 폭력성과 불안을 가진 그의 등장으로 인해 "콜먼"과 "포니아"의 삶은 두번째 위기를 맞게 된다.
["베트남에서 복무할 때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나요?" 베트남에 파병되었던 병사들 중에서 살인을 해보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다던가? 베트남으로
파병된 병사들이 거기 가서 하기로 되어 있던 게 바로 살인 아니었나?] 1권 P.133
과연 세 사람은 과거의 아픔을 극복하고 행복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것, 그렇게 진실이 밝혀지고 단지 얼룩으로 남아있어야 하는 것 뿐이었다.
[이제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네게 도망칠 길은 없고 네가 도망치려고 발버둥 쳐도 결국 네가 출발했던 자리로 되돌아오게 될 거라는
거란다.] 1권 P.254
미국 3부작의 첫번째 작품인 <미국의 목가>에서 "필립 로스"는 베트남전의 참상과 반전주의, 그리고 사회문제를 등한시하고 오직 개인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미국에 대해 비판하였고,
[다음 세대의 성공적인 레보브가 되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정떨어지게 분노에 찬 말이나 뱉어내는 딸, 도망자처럼 숨어 있던 곳에서 스위드를
몰아내 또다른 미국으로 완전히 보내버린 딸, 스위드 특유의 유토피아적 사고 형태를 완전히 박살내버린 딸과 그 십 년의 세월, 스위드의 성으로
침투해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감염시킨 미국이라는 전염병, 그토록 갈망하던 미국의 목가로부터 스위드를 끌어내 그 대립물이자 적인 모든 것
속으로, 분노, 폭력, 반목가의 절망 속으로, 미국 고유의 광포함 속으로 집어넣은 딸]
미국 3부작의 두번째 작품인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에서 "필립 로스"는 이데올로기와 반공주의, 그리고 '메카시즘'에 대해 통렬히 피판하였다면,
[트루먼 씨가 국민에게 이 나라는 공산주의가 큰 문제라고 말하면, 국민들은 그 말을 믿는 이 잘나빠진 나라 때문에 정말 화가 나. 인종차별도
불평등도 문제가 안 돼. 공산주의가 문제라고, 사만 명, 육만 명, 십만 명밖에 안 되는 공산주의자가 문제라고, 그들이 인구가 일억 오천만인 이
나라를 전복시킬 거라고. 내가 바본 줄 아오? 이 빌어먹을 나라가 무엇 때문에 망해가고 있는지 얘기해볼까?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 노동자에 대한
차별 때문이오. 우리나라를 망치는 건 공산주의자가 아니오. 우리나라는 인간을 짐승처럼 취급하는 차별 때문에 저절로 망해가는 거야!]
"필립 로스"의 미국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휴먼 스테인>은 마지막 작품 답게 분노가 가장 극에 달해 있고, 미국에 대한 위선과 편견을 가장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미국의 목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에서 다뤘던 미국의 문제를 다시 한번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추가로 <휴먼 스테인>이 좀 더'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고 주인공도 유태인이 아니다.
혹시 "필립 로스"의 '미국 3부작'을 안읽어 보신 분들이 읽게 된다면 꼭 <미국의 목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휴먼 스테인>의 출판 순서대로 읽기를 추천한다. 맛의 강도가 매운맛, 좀더 매운맛, 가장 매운맛 순서이다. 원래 음식도 강도가 약한 것에서 먹기 시작해야지 처음부터 강한맛으로 시작하면 이후 먹는 음식은 맛이 없어지기 떄문이다. 그러고보니 "필립 로스"는 순한 맛의 책을 쓸 줄 모르는 작가라는 생각도 든다. 재미면에서는 <휴먼 스테인>이 가장 좋았고, 그나마 읽기 수월한 책은 <미국의 목가>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