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창비청소년문학 122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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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하늘로 떠나보냈던 형의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주인공이 겪는 일을 그린 이 소설은, 특별히 이렇다할 커다란 사건 하나 없이 그저 인물들의 일상을 나지막히 그리고 있는 청소년 소설이다. ‘메타버스’가 상용화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며 그를 주요한 소재로 다루고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이 다른 청소년 소설들과 차별화된 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소설은 어쩐지 호불호가 조금 갈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이야기를 끝까지 이끌어가는 부분은 주인공의 형이 운영하던 메타버스 게임 속 세계를 누군가가 지금도 계속 보살펴왔다는 사실을 주인공이 알게 되며, 그 형의 세계를 꾸준히 관리해준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해하며 진행되는 것이다. 음… 작가가 나름의 ‘반전’이라 할법한 결말을 바랐던 걸까? 글쎄, 읽으면서 너무도 예상이 가능했고, 그래서 내 예상이 틀리기를 바라기도 했건만 어김없이 그 예상이 들어맞으며 이야기는 맥없이 끝났다. 이전의 <페인트>나 <테스터>의 결말에서 느꼈던 충격의 전율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아쉬움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이 나쁘기만 했던 것은 분명 아니다. 작품을 통괄하고 있는 잔잔한 분위기에서 비롯하는 평화로운 마음은 나름의 적적한 여운을 독자에게 선사하기도 한다. 인상적인 장면 또한 있다. 주인공의 친구가 같은반 이성 친구로 인해 곤혹을 겪게 되자 주인공이 여학생에게 일침을 가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부분은 직접 읽어보기를 바라는 마음에 자세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글을 줄이도록 하겠다. 기존의 이희영 작가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결이어서 실망하기도 했지만, 작품만의 매력이 분명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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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가 쏟아진다 창비시선 484
이대흠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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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 공장은 휴무가 없습니다> 전문


그대를 사랑한다고 하기 전에 그대가 생각난 적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흙 속에서 봄싹이 오르듯 그대는 불쑥 자라납니다 없었는데 없다고 믿었는데 티눈처럼 풋내도 없이 그대는 나타납니다 하루에 일곱번은 나타납니다


그대를 몇번이나 떠올리는지 헤아리다가 멈추었습니다 세다보니 계속해서 그대만 떠올랐습니다 마치 밤의 어둠처럼 물러설 기미가 없이 그대가 있었습니다 그대를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그대가 있어서 나는 마음속 그대를 추방할 수가 없었습니다


까맣게 잊고 다른 일을 하다가

그대가 몇번이나 떠올랐는지 세어보면 일곱번이나 여덟번 혹은

서른번쯤 마음에 도장 찍듯 그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는 것을 압니다


마음에도 프린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화면에 그대가 스칠 때마다 인쇄가 된다면

하루에 몇번이나 그대를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마도


그대 얼굴 새겨진 종이가 키를 넘길 것입니다

그대를 생각하지 않는 순간이 몇번인지를 세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까맣게 잊기 위해 그대를 생각합니다

생각할 때마다 그대 얼굴은 더 선명해집니다


복사한 것도 아닌데

뽑아내도

뽑아내도 더욱 그대가 남은 것을 보니

내안에 무수히 많은 그대가 압축되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누가 이토록 많은 그대를 생산하는 걸까요

그리움의 공장은 휴무가 없습니다


아껴서

아껴서

일곱번만 생각하려 하겠습니다마는

일곱번은 생각하지 않는 순간이 분명히 있기는 했습니다

.

.

쪽수로 세 페이지나 될 정도로 분량이 긴 시라 일부만을 발췌해서 옮겨적을까 했지만, 이 시는 도저히 그러하지 못했다. 읽으면서 감탄하고, 이곳에 옮겨 적으면서도 또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저 슬프고 애달프게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 더 좋았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프린터’에 빗대어서 ‘뽑아내도 뽑아내도 더욱 그대가 남’는다고 말하고, 또 ‘공장’에 비유를 하며 ‘휴뮤가 없’이 그대라는 사람을 ‘이토록 많’이 생산한다고 말하는 이 시가, 어쩐지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 조금의 웃음이 나기도 했다. 이 느낌을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귀엽다? 아니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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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란 감정은 일반적으로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것에 더 가깝지 않은가. 그래서 ‘그리움’의 핵심을 파고들게 되면 밑도끝도 없이 처절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이 시는 그렇지 않았다. 보다 긍정적인 기운을 발산하는 비유와 표현 덕에 읽는 이로 하여금 색다른 비유에서 비롯된 웃음과 그리움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 슬픔이라는, 이질적인 두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점은 이 시 말고도 아주 많은 시에서 느낄 수 있었고, 그런 점을 느낄 수 있었던 다른 구절들도 이곳에 옮겨 적으며 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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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호랑에서 코끼리떼가 쏟아질 때> 부분


당신에게서 문득 파닥이는 꽃을 받았습니다


5초간,

감정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을 방법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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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의 뒤축> 부분


슬픔은 구두 같습니다 어떤 슬픔은 뒤축이 떨어질 듯 오래되어서 달가닥 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참 오래 함께했던 슬픔입니다 너무 낡은 슬픔은 몸의 일부인 듯 붙어 있습니다 슬픔은 진즉 나를 버리려 했을 것이지만 나는 슬픔이 없는 게 두렵습니다 이미 있는 슬픔도 다하지 않았는데 새 슬픔을 장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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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예방> 부분


손이 왜 이라고 차당가

수술한 디는 인자 괜찬항가


할머니들의 대화에서는 화자와 청자가 지워졌습니다

서로의 가슴속에 든 말이 같아서 입을 연 사람과 귀를 연 사람의 구분이 없습니다 귀로 말하고 입으로 듣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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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려짐을 찬양함> 부분


네가 흘린 머리카락 한올을 책갈피에 끼워놓고

며칠을 보낸다 책을 펼 때마다 음악이 켜지듯

네가 재생되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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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도시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41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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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일곱 편의 단편 소설이 실린 소설집이지만, 이 소설집에 대한 감상은 각 소설 별로 적는 것보다 소설집 하나를 통으로로 묶어서 정리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일곱 편의 소설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한줄평에서도 말했듯, 끝도 없이 어둡고 절망적인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그리고, 일주일>에서는 우발적인 성관계로 인해 에이즈에 감염된 직장인 여성이, <기념사진>이라는 작품에서는 시력을 잃어가는 여배우와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전과자 남자가 등장한다. 어후… 단순히 인물들의 상황을 정리했을 뿐인데도 그 절망을 감당하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다.



더군다나 이 책은 ‘단편’ 소설집이기 때문에 각 작품이 서사를 갖추어 전개되기 보다는 그저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나열하거나 장면을 보여주는 데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이런 칠흑같은 어두움을 지닌 소설들은 ‘일반적으로’ 나의 취향과 맞지 않다. 이런 류의 소설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최적인 방법으로 정용준의 에세이 <소설 만세>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 (…) 죽고 싶었다. 이렇게 소설은 끝나지만 인물에게는 소설이 끝난 이후에도 삶이 있다. 그런데 그 삶을 고려하지 않고 한순간의 감정과 감각에만 몰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끝내면 안 될 것 같다. (<소설 만세>, 87-88p)

작가와 독자들은 소설을 다 읽은 후에는 그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으나, 소설 속 인물은 소설이 끝난 후에도 그 안에서 계속 살아간다. 그런데 이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소설 속에서 온갖 불행을 안기기만 하고 아무런 꿈도 희망도 주지 않는 소설은…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불행만을 담은 소설을 평소의 나는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집은 어쩐지 그렇게 싫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드는 것 같다. 왜일까. 물론 나의 인생책 <단순한 진심>을 쓰시기도 한 조해진 작가님의 문체가 나의 감수성에 잘 맞았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한가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을 읽을 당시의 내가 공무원 시험을 한달도 채 남기지 않았던 공시생이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극도의 불안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던 때의 내가 이 책을 읽으니, 이 책과 그 당시 나의 주파수가 잘 맞았다고나 할까? 



그때를 돌이켜보면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여기서 떨어지면 년을 해야할 텐데주변의 다른 친구들은 취업도 하고 학교도 졸업하면서 저만치 앞서가는데 혼자만 이렇게 정체되는 아닐까등등 정말 인생 최대의 스트레스를 겪었던 같은데, 그런 시기의 나에게 책이 맞았던 같다. ‘우리 같이 불행해지자혹은너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등의 느낌은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불행한 소설 인물들을 보니 당시의 내가 겪고 있는 불안과 걱정에 대해 있는 일은공부외엔 아무것도 없다고, 그냥 지금 가는 길을 묵묵히 걷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지점에 도달할 있을 거라는 느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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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많이 보고 있어요 문학동네 시인선 187
안미옥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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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읽으면서 다른 시집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다. 시집을 읽는 동안과 다 읽은 뒤에도 왜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 고민을 이어가보니 답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나의 시에서 연과 연 사이의 맥락이 조금 약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시 하나를 읽을 때 어떤 연의 내용과 표현이 되게 와닿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음 연으로 가자마자 전혀 다른 내용을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어리둥절했던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런 느낌 또한 안미옥 시인만의 표현법일 것이고 또 그것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나도 시의 구절을 하나하나 뜯어가며 감미하는 재미를 느꼈다.




📖 <홈> 부분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화를 냈다

우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이 같은 것이라는 걸

몰랐다 

참을 줄 아는 사람은 계속해서 참았다




📖 <선량> 부분


내가 겪는 시간을 모르는 채로

누군가 했던 말이

숨이 찬 순간마다 떠오른다


강하다고 믿고 싶었겠지만

나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




📖 <여름 끝물> 부분


불행과 고통에 대해선 웃는 얼굴로밖에 말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다짐한 사람




📖 <비생산> 부분


들어봐

이제부터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시작할 거야


중요한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시작되지 내가 어제 혼자 거실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




📖 <컨테이너> 부분


나중이 되어서야 알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건 나중이라는 시간이 가진 재능. 알 수 없는 일들에 둘러싸여 가만히 나중을 기다리면서.




좋았던 구절들이 워낙 많아서 구절 하나하나에 대한 감상을 적기 보다는 필사노트인 것처럼 여러 구절들을 적어놓기만 했다, 나의 감상보다는 자체만을 보며 개인적인 감상을 즐기길 바라는 마음에. 글을 읽는 사람들은 내가 적은 시구들 중에서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구절을 읽으며 생각지 못한 위로와 감동을 받기를 바란다. 내가 요즘 시집을 많이 읽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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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기 문학동네 시인선 181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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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전체 다섯 개의 부로 나누어져있는데, 그중 4부와 5부에 와닿는 시들이 특히 많았다. 4부에서는 ‘제주 4.3사건’의 참혹함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시들이 많아서 이해하기가 보다 쉬웠고, 5부에는 그런 참혹함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인간의 내면을 믿고 말하고 싶어하는 느낌의 시들이 내 마음과 잘 맞았다. 




📖 <순례자> 부분


나는 보았다. 그들. 총을 든 검은 개 누렁 개

닮은 얼굴을 향한 적의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검은 부리가 물고 날아가는

눈동자들을


나는 생각한다. 얼마나 가련한 존재인가. 꼬리도 없는. 거짓을 감추기 위해 꼬리마저 지운 족속들은

인간. 동족을 사냥하는 생물. 제 종족을 살육하는 종




이 시에서 등장하는 ‘검은 개’와 ‘누렁 개’라는 시어는 4.3 사건 당시의 주민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은어로, ‘검은 개’는 경찰을 ‘누렁 개’는 토벌대를 뜻한다고 한다. 이 점을 알기 전에 시를 읽을 때와 알고 난 후에 읽을 때의 감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닮은 얼굴을 향한 적의’는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죽고 죽이는 행동들을 비꼬기 위한 표현이었다. 그리고 그 점을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인간’을 ‘동족을 사냥하는 생물, 제 종족을 살육하는 종’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유족들의 입장을 다루는 시 또한 있는데, 바로 아래 인용할 ‘설움이 나를 먹인다’라는 시이다.




📖 <설움이 나를 먹인다> 부분


설움에게 잘도 얻어먹고 다녔구나

울음의 연대라고 생각했던 것

실은 당신 것으로 연명해온 일

셔울 광화문 보리차도

곱은 손 녹이던 핫팩도


경찰 버스 아래

언 아스팔트에 누웠던 유가족

맨몸의 바리케이드도

슬픔이 시민의 보호자였다




그러나 허은실 시인은 인간의 잔혹한 측면을 고발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앞선 한줄평에서 언급한 시구도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따뜻한 본성 내지는 이타적인 마음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는 위로 또한 덧붙인다. 그 지점이 내게 큰 감동을 주었고 위로가 되었다. 인류애 없이 그저 삭막하고 각박한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세상은 절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이지 않은가.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내면 또한 존재하기에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그런 마음이 느껴졌던 시구를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 <첫눈> 부분


아— 해봐요 응?

마른 입술에

떠넣어주던 

흰죽 


세상에는 이런 것이 아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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