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가 쏟아진다 창비시선 484
이대흠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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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의 공장은 휴무가 없습니다> 전문


그대를 사랑한다고 하기 전에 그대가 생각난 적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흙 속에서 봄싹이 오르듯 그대는 불쑥 자라납니다 없었는데 없다고 믿었는데 티눈처럼 풋내도 없이 그대는 나타납니다 하루에 일곱번은 나타납니다


그대를 몇번이나 떠올리는지 헤아리다가 멈추었습니다 세다보니 계속해서 그대만 떠올랐습니다 마치 밤의 어둠처럼 물러설 기미가 없이 그대가 있었습니다 그대를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그대가 있어서 나는 마음속 그대를 추방할 수가 없었습니다


까맣게 잊고 다른 일을 하다가

그대가 몇번이나 떠올랐는지 세어보면 일곱번이나 여덟번 혹은

서른번쯤 마음에 도장 찍듯 그대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는 것을 압니다


마음에도 프린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화면에 그대가 스칠 때마다 인쇄가 된다면

하루에 몇번이나 그대를 생각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마도


그대 얼굴 새겨진 종이가 키를 넘길 것입니다

그대를 생각하지 않는 순간이 몇번인지를 세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까맣게 잊기 위해 그대를 생각합니다

생각할 때마다 그대 얼굴은 더 선명해집니다


복사한 것도 아닌데

뽑아내도

뽑아내도 더욱 그대가 남은 것을 보니

내안에 무수히 많은 그대가 압축되어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누가 이토록 많은 그대를 생산하는 걸까요

그리움의 공장은 휴무가 없습니다


아껴서

아껴서

일곱번만 생각하려 하겠습니다마는

일곱번은 생각하지 않는 순간이 분명히 있기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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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로 세 페이지나 될 정도로 분량이 긴 시라 일부만을 발췌해서 옮겨적을까 했지만, 이 시는 도저히 그러하지 못했다. 읽으면서 감탄하고, 이곳에 옮겨 적으면서도 또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저 슬프고 애달프게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 더 좋았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프린터’에 빗대어서 ‘뽑아내도 뽑아내도 더욱 그대가 남’는다고 말하고, 또 ‘공장’에 비유를 하며 ‘휴뮤가 없’이 그대라는 사람을 ‘이토록 많’이 생산한다고 말하는 이 시가, 어쩐지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 조금의 웃음이 나기도 했다. 이 느낌을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귀엽다? 아니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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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란 감정은 일반적으로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것에 더 가깝지 않은가. 그래서 ‘그리움’의 핵심을 파고들게 되면 밑도끝도 없이 처절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이 시는 그렇지 않았다. 보다 긍정적인 기운을 발산하는 비유와 표현 덕에 읽는 이로 하여금 색다른 비유에서 비롯된 웃음과 그리움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 슬픔이라는, 이질적인 두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점은 이 시 말고도 아주 많은 시에서 느낄 수 있었고, 그런 점을 느낄 수 있었던 다른 구절들도 이곳에 옮겨 적으며 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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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호랑에서 코끼리떼가 쏟아질 때> 부분


당신에게서 문득 파닥이는 꽃을 받았습니다


5초간,

감정의 국경을 침범하지 않을 방법을 연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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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의 뒤축> 부분


슬픔은 구두 같습니다 어떤 슬픔은 뒤축이 떨어질 듯 오래되어서 달가닥 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참 오래 함께했던 슬픔입니다 너무 낡은 슬픔은 몸의 일부인 듯 붙어 있습니다 슬픔은 진즉 나를 버리려 했을 것이지만 나는 슬픔이 없는 게 두렵습니다 이미 있는 슬픔도 다하지 않았는데 새 슬픔을 장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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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예방> 부분


손이 왜 이라고 차당가

수술한 디는 인자 괜찬항가


할머니들의 대화에서는 화자와 청자가 지워졌습니다

서로의 가슴속에 든 말이 같아서 입을 연 사람과 귀를 연 사람의 구분이 없습니다 귀로 말하고 입으로 듣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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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려짐을 찬양함> 부분


네가 흘린 머리카락 한올을 책갈피에 끼워놓고

며칠을 보낸다 책을 펼 때마다 음악이 켜지듯

네가 재생되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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