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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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휴전>이라는 제목 자체가 암시하는 이중성으로 치밀하게 직조된, <이것이 인간인가>에 대한 symmetry 또는 chiasmus입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포로가 된 사람들이 죽음을 전제한 닫힌 시공에서 겪는, 어둠이 짙어지는 조건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반면, <휴전>은 포로에서 놓여 난 사람들이  삶을 전제한  열린 시공에서 겪는, 어둠이 옅어지는 조건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이야기입니다. 큰 틀은 전혀 다르지요, 이렇듯. 

그러나 서로 다른 상황임에도 펼쳐지는 인간성의 파노라마는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전혀 같다고 할 수 있는 면들이 전편에 걸쳐 드러납니다. 사실, 휴전은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닙니다. 끝났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무질서하고 전쟁적 탐욕이 여전히 작열합니다.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풀어져 있고 평화적 역동이 육감적으로 준동합니다.  

이런 상황을 곰곰 들여다보면 휴전이야말로 인간의 보편적 일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주는 메타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이면서도 전쟁이 아니고 전쟁이 아니면서도 전쟁인, 역설. 이것은 <휴전> 전체를 가로지르는 통찰입니다. 이런 통찰에서 필수불가결한 캐릭터가 바로 모르도 나훔이란 인물이지요.  

" ......."하지만 전쟁은 끝났잖아요." 나는 반박했다. 그 몇 개월의 휴전 기간을 살았던 다른 많은 사람들 처럼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의미에서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은 늘 있는 거야." 모르도 나훔의 잊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라거는 우리 두 사람에게 모두 도래했다. 그런데 나는 라거를 세계의 역사와 나의 역사의 어떤 추악한 변형으로, 괴물스러운 뒤틀림으로 인식한 반면, 그는 이미 알려진 사실들의 슬픈 확인으로 인식했다. '전쟁은 늘 있다', '인간을 잡아먹는 늑대는 바로 인간이다' 라는 오래된 이야기였다....... " (77-79쪽)  

사실 인간의 역사 전체를 보면 온갖 이름의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고, 그 사이를 평화기라 하는 것보다는, 휴전기라 하는 게 맞고, 그 휴전이란 게 특정 전쟁과 관련한 표현일 뿐, 보편적 관점으로 보면 언제나 인간은 다른 인간을 잡아먹는 늑대, 즉 전쟁적 존재로 살아 온 게 맞습니다. <휴전>의 시공도 그 역사의 한 에피소드일 따름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중대 포인트. 프리모 레비는 이 엄밀한 역사적 사실에 내밀한 허구적 역설을 끼워넣습니다. 바로 모르도 나훔에서, 저 나훔이란 이름! 나훔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포로기 말기의 예언자입니다. 고대 중근동의 제국주의 질서가 급변하던 기원 전 7세기 경 활동했던 것으로 보이는 예언자로서 니네베의 멸망과 유대 백성의 해방을 선포한 나훔서를 남겼습니다.   

프리모 레비가 구태여 이 예언자의 이름을 전쟁항시론자인 그리스인에게 붙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나훔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성서의 저 나훔과 <휴전>의 이 나훔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사실을 프리모 레비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알았기 때문에 저 나훔과 이 나훔을 일치시켰을 것입니다. 이 나훔에게 저 나훔의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프리모 레비 자신의 이성의 힘과 낙관을 늘 있는 전쟁 상태에 불어넣어 '주술적 알레고리'로 작용하도록 한 문학적 장치일 것입니다.  간절한 염원이고, 곡진한 헌정일 것입니다.

히틀러의 독일제국이 일으킨 전쟁은 분명히 끝났고, 그래서 포로들은 귀환하는 도상에 있고, 그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구체적인 공포와 알 수 없는 불안에 내팽개쳐진 채입니다. 이 현실은 모르도 나훔의 현실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또 다시 포로가 될지도 모릅니다. 아우슈비치가 과거사일 뿐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불확실하고 막막한 삶의 여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파멸의 길로 들어섭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 이성을 극대화시키거나, 마치 체사레처럼, 반대로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이성을 극소화시키거나, 마치 플로라처럼, 하여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통합적인 인격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누가 이성의 힘과 낙관으로 살아남는가? 바로 프리모 레비 자신이지요. 그는 어떤 캐릭터와도 자신을 일치시키거나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는 통찰할 따름입니다. 그는 도저한 현실주의자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신뢰를 고요히 유지한 채,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中道-중도가 바로 正道이므로-적 이성으로써 그 때 그 때 삶의 과제와 마주합니다.  이 태도는 스톡데일의 역설을 떠올리게 합니다. 적어도, 그는 끝내 온전히 살아남아, 이렇듯 증언을 해주었습니다. 나훔이란 알레고리는 이 <휴전>의 시공에서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전쟁과 포로, 이 문제를 학대와 상처의 문제로 치환해내야 하는 저, 醫者인 저에게 벼락 같이 던져진  화두는 이것입니다.   

"인간의 정의가 상처를 없애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상처는 마르지 않는 악의 샘이다. 그것은 가라앉은 자들의 몸과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고 그들을 비굴하게 만들고 영혼의 빛을 꺼뜨린다. 상처는 압제자들에게는 악명으로 되돌아가고 생존자들 속에서는 증오로 영속한다.  모든 이의 한결같은 바람과는 반대로 복수에 대한 갈증으로, 도덕적 굴종으로, 거부로, 피로로, 체념으로, 수천 가지 방식으로 돋아나는 것이다." (20쪽) 

그리고 귀환열차가, 어떻게, 하필, 독일의 뮌헨에 이르렀을 때, 그 거리에서 프리모 레비가 뮌헨의 독일인들과 맞닥드렸을 때,  그 장탄식. 

"그들 각자가 우리에게 당연히 질문을 할 것이라고,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얼굴에서 읽을 것이라고, 겸손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고 아무도 대면해서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귀머거리, 벙어리에 장님이었다. 의도적인 무지의 요새 속에 있는 양 자신들의 폐허 속에서 피신해 방어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강하고, 아직도 증오와 멸시를 할 수 있는, 오만과 죄의 그 오래된 매듭에 묶인 포로들이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봉인된 얼굴들의 저 이름 없는 군중 사이에서 다른 얼굴들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유명한 얼굴들을, 모를 수 없고 기억하지 않을 수 없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유명한 얼굴들을, 명령을 내리고 복종을 하고 죽이고 굴욕을 주고 타락하게 만든 그 얼굴들을 찾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부질없고 어리석은 시도였다......." (323-324쪽) 

정교하게 배치한 수미쌍관. 인간의 도덕성이라는 당위(Sollen)가 상처라는 현실(Sein) 앞에서 이토록 무력하지 않느냐고 던지는 준엄한 질문. 이 질문은 끝내 그의 절연한 죽음과 맞닿아 있는 한없이 무거운 주제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과 또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상처를 '쌩얼'로 대면해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여 그 화두를 깨쳐야만 합니다. 어찌하든. 

인간의 도덕성으로는, 이성과 의지로는, 대뇌 전전두엽으로는 상처를 없앨 수 없다면 과연 무엇으로 상처를 없앨 수 있단 말인가요? 아니, 상처란 본질적으로 없앨 도리가 전혀 없는 것인가요?  대체, 상처는 무엇인가요? 

管見一場. 상처는 감성의 문제입니다. 감성은 몸과 밀착된 마음입니다. 하여 이성과 의지로는 상처를 없앨 수 없습니다. 감성으로 쓰러진 자, 감성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감성으로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우는 유일한 길은 그 감성의 결을 알아차려주는 것입니다. 공감, 공현, 동조, 지지.......다 같은 결의 마음이지요. 어루만짐, 챙김, 보살핌.......다 같은 결의 실천입니다.  

이 마음과 실천은 영락없는 여성, 특히 어머니의 그것입니다. 이게 답 아닐까요? 프리모 레비가 여성적, 모성적 접근 방식을 택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인간과 역사 전체에 대해서도. 왜냐하면 어머니란 이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이것이 인간인가> 15쪽)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희망이 전혀 없는 게 백 번 천 번 맞다 하더라도 어머니는 인간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그 인간의 기원이기 때문이지요. 절망임에도, 아니 절망이어서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인 인간을 어루만지고, 챙기고, 보살핍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할 수 있는 일일까요? 그 이상의 무엇이 아름답고 거룩한 일일까요? 

그러나 프리모 레비는, 그 자신은 어머니가 아닙니다. 이성과 의지를 꿰뚫고 도달한  어머니의 저 숭고한 감성, 그것을 프리모 레비가 지닐 수 있었을까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최대한 동원하여 삶을 살아냈습니다. 언어를 통한 증언은 세계를 감동시켰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이름 값-프리모!-을 다했습니다. 그 이상의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는 자기에게 남은 모든 것을 던져 마지막 증언을 한 것입니다. 목숨!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지만 그 충격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을까요? 아니, 어떻게, 그런 증언을 한 그가 그렇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허탈감뿐이라면, 이는 그의 죽음을 모독하고 또 모독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의 죽음은 그의 삶에 비추어 받아들여져야만 합니다. 그의 삶을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것이라면 그의 죽음도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이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합니다. 그가 서구의 이성의지주의 문명의 아들이었기에 목숨을 던져 그 한계, 그 벼랑 끝에서 뛰어내렸다는 사실. 인간 위기, 그 백척간두에서 갱진일보한 것이라는 사실.  그 다음은?  

우리 차례입니다. 그가 남긴, 인간세상을 '엄마의 바다'로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엄마는 양육자입니다. 바로 이 양육자적 관점만이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온통 분열적 질병으로 뒤덮여 있는 오늘날 인간 세계는 실상을 알고 보면 본질은 하나입니다. 제대로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들이 어른 흉내를 내면서 작패(作悖)질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힘이 센 어린아이는 남에게, 힘없는 어린아이는 자신에게....... 

진실로 진실로, 또 진실로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인간인가>와 <휴전>을 끌어안고  생각합니다, 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심경을. 그는 혹시 우리에게 자기 목숨을 먹을 것으로 준 게 아니었을까요? 그가 혹시 인류 최초의 남성 어머니 아니었을까요?  다시 한 번 이 구절이 가슴을 울리며 다가옵니다.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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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10-19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리모 레비를 사랑하는 또 한 사람입니다. 나훔과 관련한 해석은 탁견인 듯 합니다.
리뷰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