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윌러드 마거리트 비처 지음 / 북코리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1966년에 쓴 책인데 44년이 지난 뒤에야 번역되었으니 번역자의 눈에 우연히 띄지 않았다면 한국 독자들에게는 영원히 없는 책이 될 뻔 하였습니다. 보기 드문 "다른 유(類)"의 책입니다. 저자 스스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은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책'과 다릅니다. 이 책은 처음과 끝이 따로 없으며 아무 데도 향해서 가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이라는 바다 속에 놓여 있는 수많은 장애와 암초라는 환상을 찾아낼 수 있는 실상의 지도(map of What is)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19-20쪽) 

저자는 기존의 인생 지침서 또는 자기계발서들이 '적극적 접근법'에 터 잡아 사람들로 하여금 환상을 좇게 한다고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그 환상을 깨뜨리는 '소극적 접근법'을 쓴다고 천명합니다. "~하라" "~하지 말라" 따위의 지시를 거두고 다만 실상을 있는 그대로, 지도처럼, 드러낸다는 뜻이지요. 그렇게만 하면 스스로 돕는 내부의 힘을 따라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자신이 빠진 함정에서 벗어나는 자유인, 즉 현인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프롤로그를 읽고 나면, 이 책이 매우 신랄한 내용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받습니다.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지요, 매우. 그러나 여기까지만으로도 이 책이 구사하고 있는 근본적(radical) 어법에서 대뜸 근본주의적(radicalistic) 경계를 넘나들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 여부는 읽는 이 각자의 몫이겠지만, 적어도, 부처님과 예수님 같은 범접 불가능한 큰 스승의 말씀에 근거하여 단호하게 자신의 논지를 단속하는 걸 보면 그럴만하다 하실 겁니다, 대부분.   

그리고 이 책이 오만하다 싶을 만큼 단단하고 비타협적인 주지주의에 터 잡고 있음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계몽 이성의 표독함이 하늘을 찌르지요. 죄다 쑤시고, 부수고, 해체하는 통렬함이 때로는 저자 스스로 엄히 비판하는 반항적인 습관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더럭 불러 일으킵니다. 과연 이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성숙이란, 분명코 하나의 과정인데, 그 과정에 대한 고려는 일언반구도 없이 "아테나 처럼 완전히 자란 채로 제우스 신의 눈썹에서 갑자기 튀어나온"(193쪽) 존재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거야말로 진짜 환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요. 아무튼.   

근본주의와 주지주의, 그리고 그 둘의 결합. 주류 서양사상을 떠받치는 단단한 대리석 기둥들이지요. 아폴론적 형식논리학에 터잡은, 이것은 다만 이것이고, 저것은 다만 저것이다, 더우기,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다, 이것은 진(眞)이고, 저것은 위(僞)이다, 그러니 양자택일이다, 이런 이야기지요.  

물론 이 책에서는 어른, 자립, 존재함(Being), 실재는 선이요 진이고, 아이, 의존, 존재됨(Becomming), 현상은 악이요 위이다, 그러니 어른, 자립,  존재함(Being), 실재만을 선택할 일이다, 이런 이야깁니다. 이런 개념을 근본적 진리로 삼고 다양한 변주를 펼쳐내면서 반복적으로 통속한 인생 지침과 자기 계발의 기만성을 폭로합니다.  

이런 칼 같은 이분법, 과연 관통하는 힘이 대단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이고, 아니라면  아닌 것이라는데 그 중간을 파고드는 일은 비겁해 보이지요. 더구나 유치한 긍정주의에 터 잡은 통속한 성공주의를 가차없이 해체하는 단도직입의 통찰 앞에, 그래서, 뭐, 그러는 넌 얼마나 잘났어?, 하고 물을 엄두를 내기 쉽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하여.  

번역자가 이 책과의 만남을 운명적이라 했듯, 읽는 이에 따라, 각자의 punctum이 이 책의 근본적인 신랄함과 만나면 전율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온 영혼이 내파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또한 제1부 제1장부터 제6장까지, 빠직!, 금 가는 소리를 듣다가, 제7장에서 쩡!, 제8장에서, 급기야, 와장창,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7장에서, 쩡!, 소리 내게 만든 것은, "거물(big shot)이 되고자 하는 욕망"(78쪽)이란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제8장에서, 와장창!, 소리 내게 만든 것은, "사회에서 봉 노릇 하고 있다"(90쪽)는 표현이었습니다.  

이미 뼈 속 깊이 느끼고,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누군가 비수로 앙가슴을 거침없이 찔러 옴으로써, 으악!, 소리를 지르며 감응(response)하게 된 것이지요. 최후로 철퇴 마무리. 

".......자기가 연극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연기에서 주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유일한 관객으로 삼고 텅 빈 무대에서 연기하는 서투른 배우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91쪽)  

이 시점에서 이런 말은 여태까지 살아 온 제 인생을 한 마디로 정리한 비문(碑文), 그것도 명비문(名碑文)이었습니다! 흠, 여기가 나의 사회적 본질이군, 책을 내려놓고, 허리를 곧추 세웠습니다. 명징하게 깨어서 다시 한 번 제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언어로 비문을 써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이 통쾌로 전화하기 시작함을 감지합니다.  

다음날. 제9장 섹스와 사랑 부분을 읽다가 문득,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어? 이상하다.......그러다가 제11장 동성애 부분에 이르러 제8장에서 겪은 현상과 정반대의 충격을 받습니다. 1966년이란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제8장 이전의 통찰이라면 있을 수 없는,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야말로 '어이 털린', 이전의 모든 날카로움을 한 순간에 말아먹는, 아니 그 날카로움이, 휘릭!, 길을 잘못 들어선, 그래서 모든 언어들이 오로지 편견 덩어리가 되어 시커먼 강물에 둥둥 떠내려 가는, 그런 판이 되어버립니다.  

".......'사랑'은 그들에게 적용될 수 없는 단어임......." (119쪽) 

어허, 이런! 

그 뒤를 계속해서 읽어야 하나, 잠시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은 시종도 방향도 없는 지도와 같은 것이라 한 말을 기억했습니다. 이 부분 잘못 표시됐다고 해서 다른 부분까지 의심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싶어 계속 읽었습니다. 물론 다 읽고 나서도, 왜 그랬을까?, 의문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번역자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번역을 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사실 저자의 이분법적이고 근본주의적이고 주지주의적인 통찰은 다분히 남성가부장적입니다. 아무리 철저하고 투명해도 이 한계를 벗어나긴 어렵지요. 인간인 한. 아마도 이런 역설이 숙명적 딜레마일 것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깊고 폭넓게 알았다면 이야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까요.  

군데군데 세계가 대칭구조로 되어 있다는 통찰이 없지 않지만 그 대칭성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부분에서 실패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인간의 자립성과 의존성이라는 대칭에서 100% 자립과 100% 의존은 실재하지 않는 허구적 개념이라는 사실이 저자에게는 깊게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태어났고, 혼자서 살아가며, 혼자서 죽습니다......." (47쪽)  

과연 그럴까요? 이 표현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기보다 자립적 독립 존재인 인간의 한 측면을 강조한 것입니다. 말 그대로라면 이것은 자립이 아니라 고립입니다. 진실은 그 맞은편에 있는 상호의존적 존재로서 인간의 측면을 같은 무게로 유의하는데서 드러납니다. 인간 존재에서 의존은 다만 어린아이의 생존 전략이 아니라 생명 자체의 연기적 속성임을 인정하지 않는 한 진실은 늘 반쪽 이하입니다. 

저자가 이런 통(通) 진실에 전혀 무지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말은, 그 말이란 집에 거주하는 사유는, 한 번에 하나의 논리를 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리 옳다 하더라도, 최종 판단을 유보하는, 여백을 남겨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드려는 것입니다. 이 여백까지 자신의 논리로 채워버린 결과 저자는 도리어 자신의 통찰 한가운데 구멍을 내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치명적인.   

하지만  이 또한 저자의 몫. 그리하여, 이 책은, 장히 훌륭합니다. 자립심을 지닌 10%의 사람을 위한 헌사인지, 그렇지 못한 90%의 사람을 향한 경책인지, 집필 의도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오랜 세월 동안 뭔가 치우쳐 살았다는 앙칼진 자각을 스스로 요구하던 제게는 이른바 "관통의 고통과 통쾌"라는 역설의 일치를 맛보게 해준 고마운 안내자였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저같이 평범해서, 저자의 염장지르기 식 '갈구기'가 필요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서가 가까운 곳에 놓아두고 이따금식 아무 데나 열어 한두 군데 읽는 일이, 시크릿 류의 책을 읽는 삽질보다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곳곳에 박혀 있는 촌철살인의 경구, 독특한 어휘 사용과 재정의, 사물의 이치에 대한 예리한 포착이 저자의 범상치 않음을 웅변으로 증명해줍니다. 가령, 

".......어떤 구속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역설적으로 구속 상태에 자신이 들어가도록 기꺼이 허락하는 것입니다.......그것은 마치 수영하면서 죽은 사람이 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자신을 물에게 내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182쪽) 

과연. 책 전체 논지나 특정 부분 오류에 대한 비판과 무관하게 찰나찰나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는 언어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구태여 외면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까칠하지만 쾌통함이 있다면, 벗으로 삼는 거, 강권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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