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질병을 화두 삼다

 

아픈 사람은 온통 아픈 생각뿐이기 십상이다. 통증이 심하면 더욱 그렇다. 병이 중할수록 더욱 그렇다. 아픈 생각에 빠져들고 만다. 병 생각에 빠져드는 일은 병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병 악화에 에너지를 보탤까. 가볍게 답할 일 아니다. 반대 경우를 살펴보자. 낫는 생각에 몰두하는 일은 어떤가. 병 호전에 에너지를 보탤까. 가볍게 답할 일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 문제에 가볍게, 그리고 쉽게 답하는 여러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다. 가장 유서 깊은 말은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 출처가 어딘지 잘 모르지만, 불가에는 이미 진리처럼 각인된 말이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모르지 않는다. 불가 수행 범주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이 말은 개소리가 된다. 암에 걸리는 일도 마음 지음이고 암에서 놓여나는 일도 마음 지음이란 말은 얼마나 가볍고 쉬운가. 그다음 긍정주의. 모름지기 일체유심소조의 세속 판 현대 버전쯤 되겠다. 여전히 어느 제국에서 왕 노릇 하거니와 이 또한 개소리임이 분명하다.

 

이런 말도 들어왔다. 병은 그저 나한테 있게 된 무엇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해서 들어온 무엇이 아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다고 나가는 무엇이 아니다. 병이 어떻게 들어왔든 의학적 치료로 낫게 하면 그만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결곡한 합리 얼굴을 하고 있으나 이 역시 개소리다.

 

이 개소리들 촐싹거림은 질병 자체를 질병 앓는 사람에게서 떼어내어 사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질병은 사물이 아니다. 앓는 사람 삶, 그 살아 움직이는 과정 일부다. 사람에게서도 삶에서도 분리할 수 없는 사건이며 대부분 물적 근거와 영역을 지닌 실재다. 그런 실재에 걸맞은 대우는 단연 화두 삼기. 분명히 하자. 화두 들기가 아니다. 드는 짓은 남성 가부장 선객이 하는 짓이다. 우리는 화두를 선 방편 사물로 들지 않는다. 화두를 인연으로 받아들인다. 화두와 전 인격으로 관계 맺는다. 삼아지는 화두에는 우리 인생 전체가 연루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질병을 화두 삼는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질병을 처치대상 사물로 폄훼한 역사를 통렬히 반성한다. 질병은 앓는 사람이 잘못 해서 들고 들어온 몹쓸 물건이 아님을 선언한다. 질병은 마음만 먹으면 후루룩 삼켜버릴 수 있는 라면 같은 물건이 아님을 명토 박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질병과도 질병 앓는 사람과도 평등하게 상호소통하기 위해 작고 적게 배어드는 마음(小少沁心)이며 그 몸짓이다.

 

2. 홀로 선(獨禪)이 아니라, 서로 선(共同禪)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 질병과 질병 앓는 사람을 화두 삼을 때, 그 선 수행은 당연히 홀로 할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둘 이상이 서로 주고받는 질문과 질문에서 답의 답을 구해간다. 질병을 앓는 사람은 질병과 말을 틈으로써 이 과정을 시작한다. 거기에 의자가 참여함으로써 삼자 서사가 형성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백색의사 홀로 선(獨禪)이므로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질병과 환자, 그리고 의자 사이 서로 선(共同禪)이다.

 

질병이 서사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있다. 때려잡지만 않는다면 질병은 스스로 말을 한다. 그 말을 들을 귀 있는 환자가 먼저 듣는다. 환자 귀가 아직 열리지 않았다면 들을 귀 있는 의자가 먼저 듣는다. 둘 다 묻지 않는다면 질병은 침묵한다. 질병 침묵을 딛고 행해지는 온갖 처치는 폭행이며 살해다.

 

환자가 서사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있다. 의자가 눈만 내리깔지 않는다면 환자는 스스로 말한다. 그 말을 들을 귀 있는 의자가 들으면 함께 질병에 귀 기울인다. 삼자가 주고받는 이야기는 벼락이 되어 함께 깨칠 틈을 낸다.

 

반제국주의 백색의학이 홀로 선으로 사회를 의료화했으므로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서로 선으로 의료를 사회화한다. 사회화된 의료는 스스로 특권 거점을 지운다.

 

3. 언어, 그 너머(頓悟漸悟)

 

서로 선은 묵언-일극-개체-집중-중심 시선으로는 할 수 없다. 서로 선은 대화-양극-전체-주의-비 중심 시선으로만 할 수 있다. 다 말한다. 다 듣는다(). (냄새) 맡는다().

 

최후 답은 말이 아니다. 말 아닌 답에 이르려면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말은 비상하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비상한 말이 소통, 깨침, 치유, 그리고 마침내 장엄을 일으킨다. 장엄을 일으키는 비상한 말은 상스럽다. 상스러운 말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것은 비명이며 욕설이며 신음이다. 그다음이 시쳇말이다. 전문용어는 대개 상스럽지 못하니 비상하지 못하다.

 

서로 선 대화는 전문용어로 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영어(일부 라틴어), 한문 아니면 입도 벙긋 못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chill 아니고, 惡寒 아니고, 으슬으슬하다(오싹오싹하다). 한의학 진단을 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쓰는 말 가운데, ‘장마철 반지하 방이 있다. 생체진동수가 떨어져 대사 속도가 느려진 몸 상태를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할 때 쓰는 비유다. 아니고, 冷寒 아니고, 아니다. 심지어 차고 축축하다는 말보다도 오만 배 빨리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는 말로 떠는 위세나 독점하는 정볼랑은 백구한테나 던져줄 일이다.

 

고백건대 나도 역시 한자 말, 뭐 어떨 땐 영어도 쓴다. , 알아듣게 풀고, 알아들을 만할 때만 쓴다. 대부분 용어는 환자 스스로 쓰는 말을 그대로 받아서 쓴다. 환자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때는 시쳇말, 일상어부터 대신 제시하면서 말문을 튼다. 아무튼 바꿀 수 있는 의학용어는 모조리 바꾸고, 바꾸기 어려운 용어는 적절한 비유나 이미지를 동원해 소통을 도와야 한다.

 

말로 소통해서 서로 언어 감각과 뉘앙스, 그 너머 언어-()을 알아차리면 눈빛만 보고도 안다. 특히 숙의치료 하다 보면 놀라운 경험을 드물지 않게 한다. 의자와 환자 사이 구분이 무너지고 평등한 선문답 수준 언어와 직관이 오간다. 서로 새로움을 생성해낸다. 환자가 의자를 넘어서는 순간도 허다하다. 서로 치유하고 서로 자라간다. 서로 깨달아가고 서로 깨쳐간다. 서로 돈오(頓悟)의 큰 기쁨에 이르고 서로 점오(漸悟)의 괴괴함을 지난다.

 

4. 마침내 큰 수레(大乘)

 

빨빨 기어 다니며 탈 없이 크던 아기가 어느 날 갑자기 열을 펄펄 끓이며 앓는다. 젊은 엄마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할머니가 웃으며 말해준다. “아유, 우리 강아지가 걸으려나 보다!” 아기는 앓고 난 뒤 영락없이 걸음마를 시작한다. 온 가족이 함께 아기 한걸음 한걸음에 환호하며 행복감에 싸인다.

 

아기 열병과 걷기 사이에 어떤 의학적 인과가 존재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질병 자체를 환호 대상으로 이해하는 일은 아무래도 이상하지만, 질병을 삶 큰 맥락에서 해석함으로써 지혜를 얻고 행복을 예감하는 일은 하등 이상하지 않다. 질병을 두고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에 따라 인간은 사뭇 다른 결로 삶을 산다. 삶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질병은 질병을 앓는 사람과 그를 치료하는 사람과 그를 돌보는 사람을 함께 깨달음으로 이끄는 큰 수레(大乘)임이 틀림없다. 우리가 그 큰 수레를 보지 못한 채, 각기 괴로움과 시큰둥함과 마지못함으로 허정허정 걸어갈 따름이다.

 

바야흐로 한 생각 크게 돌이킬 때가 왔다. 질병 인식 패러다임 전체를 뒤집어엎어야 한다. 인류가 당면한 생명 위기는 창궐하는 질병 탓이 아니라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질병을 잘 못 인식하고, 거기 터 하여 치료 약이랍시고 뿌려대는 화학합성물질 때문이다. 이제 질병은 백색 독극물로 때려잡을 적이 아니다. 인류 구원 서사를 실을 큰 수레다. 이 큰 수레를 끌 주체는 백색 요법 포르노와 독극물을 거절한 질병 인민이다. 만국의 아픈 이여, 연대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 꺼낸 걷기 이야기 핵심에 놓여 있으면서, 그 흐름 전반을 관통하는 종자 논리가 형식 논리일 수는 없다. 걷기 동작 그 자체가 용납하지 않는다. 걷기 이야기 종자 논리는 A이기도 하고 non A이기도 한 무엇, A도 아니고 non A도 아닌 무엇을 인정하는 다치(多値) 논리다. 다치 논리는 무한한 비대칭 대칭을 품는다. 비대칭 대칭은 평등한 상호 소통을 전제한다. 상호 소통은 반제국주의 녹색의학과 제국주의 백색의학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형식 논리에 터 한 이종 의학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종 의학이 모든 증상을 병으로 오인하고, 모든 병을 적, 그러니까 non A로 오인해서 무조건 때려잡는다는 사실 또한 논리적 필연으로 알고 있다. 이런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구조상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안을 수밖에 없다.

 

첫째, <19. 녹색 면역은 제국주의 이종의학을 넘어선다>에서 이미 상론했듯 자가면역 이론 구조가 취약하다. 이론이 취약하니 치료 구조도 그러하다. 역설 이론을 세울 수 없는데 어떻게 역설 치료가 가능하겠는가. 그러니까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예컨대 혈소판 감소가 자가면역으로 발생하면 비장을 제거한다, 이런 식으로 치료한다. 이는 물론 치료가 아니다. 쌍방향 면역 조절이란 개념 자체가 없으므로 양의사도 그들에게 치료(?)받는 환자도 속수무책이다. 아니, 무엇보다 말을 못 알아듣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쌍방향 면역 조절 이론을 알고 있으며 치료 또한 가능하다. 이는 결정적 차이다.

 

둘째, 상호소통이 그 자체로 의학이라는 인식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세계를 다만 질량과 에너지로 인식하고 만다. 질량은 구조, 에너지는 물리화학적 기능이다. 이 둘에 문제가 생긴 사태가 질병이므로, 구조를 조정하고 기능을 개선하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질병과 질병을 앓는 인간을 분리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모든 질병은 그 질병을 앓는 사람 삶 한가운데서 일어난다. 질병을 치료하는 데 삶 문제를 소거할 수는 없다. 삶 문제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곡절과 의미를 담은 소식이다. 질병에 관한 소식을 주고받는 그 자체가 의학이라는 진실을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모른다. 그 작은 일부를 플라세보라는 이름으로 비틀어댈 뿐이다. 백색의사들은 질병 자체에 대한 정보조차 소상히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픈 사람 아픈 삶에 일절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의학 서사 근원 주체인 아픈 사람을 도리어 철저히 소외시킨다. 이는 다만 의학적 구조 오류가 아니다. 범죄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질병과도 질병 앓는 사람과도 소통한다. 질병 자체로 가치로우며, 질병 앓는 사람 자체도 가치롭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이는 절대적인 차이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알 수 없다. 제국 백색문명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 살아남을 수도 있다. 치료라는 대의명분이 있으니까. 이런 제국주의 백색의학에서 질병과 질병 앓는 사람을 구해내는 유일한 길은 저들을 아예 입에 담지 않고 고요히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팡이실이를 진행하는 일뿐일는지 모른다. 입에 담을수록 사악한 구조는 그 말을 먹잇감 삼아 끈질긴 생명력을 더해갈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걷기를 꺼낸 까닭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걷기는 인간이 우주 운동을 체현하는 방식이다. 걷기로서 인간은 걷기로써 인간이며 우주다. 이 인간됨을 제국 백색문명이 망가뜨렸다. 망가진 인간됨을 복원한다는 뜻을 지니고, 걷기를 마음에 두는 일에서 반제국주의까지 이야기를 펼쳐보았다. 꼭 한 가지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남아 있다. 가짜 걷기 이야기다.

 

규칙적 운동 장소 하면 대뜸 헬스클럽을 떠올리는 현상은 오늘날 도시인에게 자연스럽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러닝머신은 단연 총아다. 총아 태생은 어둠이었다. 리베카 솔닛이 걷기의 인문학에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러닝머신, 그러니까 트레드밀은 19세기 교도소에서 죄수들을 순치하기 위해 만든 징벌기구였으니 말이다.

 

아무 제재 없이 걷기만 하면 되는 이 기구가 어떻게 징벌의 공포를 몰고 올 수 있는가? 죄수들이 두려워한 까닭은 가혹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 반복 동작을 지속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순 반복 동작 지속이 형벌 본질을 지닌다는 사실을 놓고, 리베카 솔닛은 시시포스 신화를 거론한다. 여기에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으리라.

 

문제는 지금 우리가 그 단순 반복 동작을 자진해서 한다는 데 있다. 물론 목적은 건강이다. , 이 목적이라면 당시 교도소 측에서도 똑같이 지녔던 바다. 비대칭 대칭을 이루는 또 다른 교도소 목적 하나는 무엇인가. 죄수들 정신을 순응적으로 만들기 위함, 바로 그거였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스스로 알아서 제국 백색문명에 순응하려고 트레드밀 위를 달린다는 말이 아닌가. 아뿔싸!

 

그렇다. 트레드밀 위에서 몸을 튼튼히 하는 행위는 마음을 제국 백색문명 충직한 노예로 만들려는 목적 때문이다. 단도직입으로 말한다. 이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걷기다. 이는 반우주적 운동이다. 이 순간,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당장 그만두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트레드밀 위 걷기는 엄밀히 말해서 가짜 걷기다. 앞으로 나아가는 환상이 있을 뿐, 제자리 걷기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앞으로 나아갈 때 쓰는 근육과 다른 근육을 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실제 앞으로 나아갈 때 마주하는 시공간적 변화가 거세되어 있다. 가상적 조건을 설치하는 짓은 더욱더 큰 속임수일 따름이다. 중독 메커니즘이다. 인간을 포기하고 알량한 몸 이득을 위해 땀 흘릴 일, 결코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실을 추가한다. 이런 제자리 걷기를 반복하면 소뇌 감수성이 손상된다!

 

백색 가짜 걷기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녹색 진짜 걷기를 곧바로 시작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네이버 지도에 나오는 관악산 중앙계곡으로 향한다. 일명 수영장 계곡이라고도 부른다. 전에는 계곡 아래 서울대 수영장이 있었다. 물을 그 계곡에서 끌어왔음에 틀림없다. 진입로 계단길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인적이 끊어져 오히려 없어진 상태보다 더 을씨년스럽다. 게다가 출입을 금하며 위반 시 벌금을 낼 수도 있다는 경고판을 보니 살짝 정나미가 떨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깊숙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한눈에 보아도 작은 계곡이다. 물은 이미 말라버린 상태다. 조금 더 들어가자 물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물을 통제하려 쌓은 석축이 무너져내린 곳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다. 물길에 그런 식으로 손댄 석축이 여러 군데 보인다. 인간이 편의에 따라 변형시킨 숲 풍경을 나는 극도로 싫어한다. 숲에서 인간은 길, 그것도 최소한을 내야만 한다. 오늘은 능선까지 가지 않는다. 제의 공간으로 삼을만한 곳을 찾은 다음 훌쩍 뒤돌아 내려온다.



올라올 때 처음 물소리를 들은 곳에 이르러 건너편으로 넘어간다. 옆 계곡으로 가는 산자락을 돌기 위해서다. 물론 방향만 그럴 뿐 지도에도 없는 소로를 따라가면 목적지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다행히 전파천문대가 나오고 포장도로를 따라가니 저수지 계곡 입구가 나온다. 계곡 입구부터 술판 벌이는 사람들 왁자한 소리가 들려온다. 무심히 지나쳐 소음이 사라질 무렵에 이르자 물 흐르는 널따란 바위가 나온다. 여기도 제의 공간 후보지다.



 

물속에 발을 담가 체내에 쌓인 정전기를 흘려보낸 뒤 훌쩍 뒤돌아 내려온다. 이번에도 다시 옆 계곡으로 가는 산자락을 돈다. 마침 그 길은 한번 가본 길이다. 관악사 운동장 뒤로 난 관악 지리계곡으로 들어간다. 폭포에 이르러보니 이끼 위로 졸졸거리며 소량 물이 흘러내릴 뿐이다. 그 너머에서 저수지 계곡보다 더 큰 소음이 들려온다. 마침 일정에 따른 이동 시각이 돼서 여기도 제의 공간 후보지로 일단 낙점해 놓고 훌쩍 뒤돌아 내려온다.



관악산 북쪽 계곡 셋을 순례한 까닭은 내가 숲에 드나드는 목적과 부합하는 지성소가 있다면 찾아보기 위해서다. 낙성대 입구로 내려와 점심을 먹으며 아니라는 잠정 결론을 내린다. 다음 주쯤 내가 들고 나기로 정한 13, 14번째 마지막 계곡까지 가본 뒤 최종적 결론을 내리기로 한다. 관악산이 지닌 의미를 생각하고 숲이 건네는 말을 다 듣고서야 갈 길을 알 수 있으리라. 나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백악산으로 향한다. 백악산은 내게 상수다.



청와대 전망대에서 늘 하는 제의를 마친 뒤 다른 시선으로 서울을 내려다본다. 산 숲에 오는 까닭 하나를 홀연 깨달은 덕분이다. 산 숲에 서면 국적 없는 콘크리트 건물이 숲을 밀어내고 육중하게 들어찬 전경을 더 넓게 볼 수 있다. 그 점령이 얼마나 파괴적이며 절멸적인지 맹렬하게 실감할 수 있다. 거대한 부역 백색 도시를 통째로 직시할수록 내 우울증은 한층 건강하게 깊어진다. 이 깨달음만으로도 오늘 숲 걷기는 다시없는 축복이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마음 둠에서 걸어보기까지

 

인간이 걷는 인간(homo ambultus)이라는 진실을 아는 일만으로 생기는 의미란 없다. 거기에 마음을 두어야 비로소 의미가 생성되기 시작한다. 관심을 가지는 일. 주의를 기울이는 일. 유심히 대하는 일. 그리고 상상하는 일.

 

상상은 사랑 기미다. 사랑 기미는 엄두 낼 수 있게 한다. 엄두 내어 걷기 시작하면 사랑은 몸에 시시각각 각인된다. 몸에 각인된 사랑은 상상을 무한히 갈래지게 한다. 무한히 갈래진 상상 속에서 걷기 탱맑은 느낌이 소소하게 미미하게 돋아난다.

 

느낌은 몸 움직임, 그 놀림에 마음을 맡기는 상태다. 걸을 때 솟아나는 몸 느낌, 정서 변화를 그저 감각으로 마주한다. 가벼운 근육통, 숨참, 촉촉한 땀, 싱그러운 바람이 일으키는 피부 감각, 상쾌함, 잡념이 사라지는 순간 망아, 평화로움들.

 

알아차림은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을 찰나마다 의식하는 일이다. 무심코 잡념에 휘감겨 걷지 않고 유심히 걷는다. 몸 움직임, 진행 방향, 주위 조건과 맞닥뜨림 전체를 주의 깊게 살핀다. 해석·평가, 의미 챙기기는 하지 않는다.

 

뜻 가름은 걷기를 내 삶에 정색하고 다시 들이기로 하는 다짐이다. 어떻게 얼마나 걸을까, 나름과 깜냥으로 결 세우기다. 걷기가 이미 자연 문제에서 역사 문제로 바뀌었다는 각성을 구체적 실천으로 드러내는 행위다.

 

그리하여 마침내 걸어본다. 수단이든 목적이든 삶 그 자체든 살아 있는 날까지 걸어가 보는 거다. 십인십색 걷기에서 참다운 도가 일어나 인간이 우주에 여한 없이 배어들 수만 있다면야. 걷기는 태고 미래로서 인류 존망 열쇠를 쥐고 있다.


 

2. 역동 균형에서 일렁고요까지

 

걷기는 역동 균형을 잡아야 하는, 잡아가는 전체 몸 사건이다. 골격과 그에 연결된 근육에 각기 필요한 동작이 상호 팡이실이를 이루면서 중력을 견디고 장력을 조절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찰나마다 균형이 무너질 가능성을 지닌다. 균형을 잡으려면 상하, 좌우, 전후 전방위 유기적인 협동이 필요하다. 내부적으로도 신경-혈관-()막계 정보 교환도 긴밀해야 한다. 그 정보에 따른 에너지 분배도 적확해야 한다.

 

제대로 걷지 않으면 몸에 이상이 생긴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걷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걷기는 생명을 제대로 지키기 위한 전제임과 동시에 생명이 흔들릴 때 바로잡는 치유다. 제국 백색문명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제대로 걷지 않기 때문에 생명 제반 균형이 무너져 있다. 걸으면 균형이 복원된다. 걷기가 힘들 정도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전 단계를 거쳐야 함은 물론이다. 어찌 걸으면 제대로 걷는가?

 

무엇보다 기본적이고 근원적으로 중요한 점은 자신이 걷는다는 사실을 찰나마다 깨어서 알아차리는 일이다. 알아차리지 않으면 타성적으로 걷게 된다. 현대인 대부분은 타성적 걷기에 중독돼 있다. 이 중독은 걸어야 하는데 걷지 않아서 생긴 질병이다. 알아차리고 걸으면 자연스럽게 다음 결과가 나타난다. 잘 안되면 정색하고 수행해야 한다.

 

타성 보행보다 보폭이 적절하게 커진다. 발 사이가 적절하게 조절된다. (타성 보행 경우, 남성은 지나치게 넓고 여성은 지나치게 좁은 경향이 있다.) 발끝 각도가 조절된다. (타성 보행 경우, 남성은 지나치게 벌어지고 여성은 지나치게 오므려진 경향이 있다.) 팔을 크게 흔든다. 어깨도 유연하게 전후로 회전시킨다. 얼굴을 들고, 가슴을 펴고, 허리를 세운다. 시선은 정면 또는 살짝 위를 본다. 숨이 깊고 길어진다. 걸음마다 새로운 탄성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몸 외부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호흡, 순환, 면역, 내분비, 신경(·우뇌, 자율, ), 원시정보 체계 균형이 회복된다. 걷기 자체 역동 균형이 몸 모든 결과 겹에 퍼져 전천후 역동 균형 장이 형성된다. 우주 운동이 체현된다. 인간중심으로 말하면 건강한 몸놀림이다. 건강한 몸놀림으로서 걷기는 우리 생명을 구름에 달 가듯 흐르게 한다.

구름에 달 가듯 흐르는 걷기에 각별한 돋을새김 하나를 한다. 미토콘드리아에 헌정하기로서 걷기다. 운동과 선동일여(禪動一如)니 수승하다.

 

미토콘드리아는 우리 몸 세포보다 훨씬 더 많은 수로 세포 안에 존재하는 세포소기관이다. 세포 내 발전소라 보면 된다. 미토콘드리아는 인간으로 보면 외부 생명체인데 내부 공생한다. 인간 몸 자체가 이미 화쟁을 거쳐 무애 공존을 이룬 우주 이치 체현이다.

 

미토콘드리아는 인간 생명 유지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미토콘드리아 활성이 떨어지면 치명적인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암, 치매, 뇌졸중을 포함한 130가지 질병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미토콘드리아 활성을 높이려면 그 개체수를 증가시켜주어야 한다.

 

미토콘드리아 개체수를 증가시키려면 적색근육을 자극해야 한다. 특히 미토콘드리아가 많이 들어 있는 등과 허벅지 근육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평소에 등을 곧게 편 자세를 유지하는 일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더 중요한 일은 걷기다. 허벅지 근육을 자극하려는 거다.

 

미토콘드리아에 바치는 걷기는 몇 가지 적정 요건이 있다. 무엇보다 배고픈 상태. 체온을 효율적으로 높이기 위해서다. 그다음은 속도다. 30분 걸어 3km 답파할 정도면 좋다. 그다음은 운동량이다. 일주일에 5일이 적당하다. 마지막으로는 역시 허리를 펴는 거다.

 

금상첨화가 되는 팁 두 가지. 복식호흡을 병행한다. 걷는다는 사실을 찰나마다 알아차린다. (허벅지와 등 근육에 주의를 기울여도 좋다. , 심장, 간을 묵상해도 좋다.)

 

[사족] 내 미토콘드리아 걷기에는 의미 실재가 하나 더 붙는다: 노동.

 

미토콘드리아 걷기가 각종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원리 핵심에는 체온 상승이 있다. 체온이 상승하는 현상은 생체진동수가 높아지는 현상이므로 효과가 광범위하다. 그 효과는 정신적 질환에도 당연히 미친다.

 

연구에 따르면 (미토콘드리아) 걷기가 세로토닌 전구물질인 트립토판 분비를 촉진한다고 한다. 논란 여지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세로토닌은 몸·마음, 의식·무의식, ·우뇌의 역동 균형과 관련되는 신경전달물질이므로, 정확히 비대칭 대칭 운동인 걷기가 이런 효과를 내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세로토닌이 선형적으로 우울장애와 인과관계를 이루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걷기가 일으키는 역동 균형 작용이 우울장애를 치유할 수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우울장애도 결국은 불균형 문제고, 불균형 문제는 생체진동수 저하 문제기 때문이다. 다른 정신장애에도 이런 이치는 두루 통한다.

 

걷기가 인간에게 개체 단위로 미치는 지상(!) 효과는 일렁고요. 일렁고요는 역동 균형을 이른바 도() 차원에서 묘사한 말이다. 말하자면 구원이요, 견성이다. 걸어서 우주에 깃든다. 걸어서 우주와 합일한다. 홀로 가능한가? 가능하다. ! 찰나적으로만. 이 상태를 홀로 영속화하려 할 때 깨달은 마귀가 된다. 깨달은 마귀가 되지 않으려면 진정으로 깨쳐야 한다. 진정으로 깨치는 길은 구원의 확신으로 홀로 구원받는 길은 없다는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다; 견성으로 홀로 부처 되는 길은 없다는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다. 이 진부한 진리가 진부해지지 않으려면 찰나마다 새로운 발걸음을 떼어야 한다.

 

새로운 발걸음은 더불어 걸음으로 나아가는 몸짓이다. 누구와 더불어 걷는가? 이웃이다. 이웃은 누군가? 작은, 적은, 아픈, 슬픈, 수탈당하는, 죽임당하는 식민지사람이다. 작은, 적은, 아픈, 슬픈, 수탈당하는, 죽임당하는 식민지자연이다.

 

 

3. 혁명에서 개벽까지

 

걷기는 혁명하는 녹색 행위다.

 

2017310일은, 평범한 시민의 걷기만으로, 대통령직 도둑질해서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박근혜를 심판한 날이다. 5천 년 우리 역사에 이런 일은 없었다.

 

적지 않은 잘난 인간들이 혁명은 아니네, 한계가 있네, 비폭력 자랑할 일 아니네, 민노총 없었으면 안 될 일이었네, 운운···훤화하지만 잘난 입에서 언제나 나오는 후렴구다. 시민 비무장은 더없이 강력한 무장이다. 걷는 시민은 다시없는 전차군단이다. 촛불 파도는 어디에도 없는 해일이다. 목말 탄 아이도 함께 지른 함성은 ‘B52’ 굉음 너머다.

 

걷는 인간(homo ambultus)이 걷는 인민(populus ambultus)을 경험할 때, 혁명이 된다. 제국과 식민지가 엎어진다. 부역과 독재가 무너진다. 이 일에 끝은 없다.

 

걷기는 반제국주의 전사를 깨우는 녹색 격문이다.

 

걷기 혁명은 인간 사회를 넘어선다. 인간이 걷는 땅은 사람만을 위한 터전이 아니다. 바이러스(으뜸 바리)와 박테리아(버금 바리)와 곰팡이(균류)와 말(조류)과 돌꽃(지의류)과 이끼(선태류)와 망초와 백합과 지렁이와 개구리와 도마뱀과 여우를 위한 터전이기도 하다. 제국과 부역 인간이 땅을 착취하고 독점하는 짓을 지금처럼 계속하게 놔둘 수는 없다. 우리는 그 각성으로 걷는다.

 

각성한 우리는 걸어서 땅을 공유하고 있는 뭇 생명들과 이어진다. 우리는 걸어서 우리 너머 뭇 생명이 반제국주의 전사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걸어서 녹색 전사를 깨운다. 모든 녹색 전사가 세우는 통일전선으로 제국과 부역 국가를 무너뜨리고 팡이실이 공동체를 복원한다. 팡이실이 공동체 복원이야말로 각성한 무지렁이 부역자가 최후로 최상으로 할 수 있는 근원 행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