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 둠에서 걸어보기까지

 

인간이 걷는 인간(homo ambultus)이라는 진실을 아는 일만으로 생기는 의미란 없다. 거기에 마음을 두어야 비로소 의미가 생성되기 시작한다. 관심을 가지는 일. 주의를 기울이는 일. 유심히 대하는 일. 그리고 상상하는 일.

 

상상은 사랑 기미다. 사랑 기미는 엄두 낼 수 있게 한다. 엄두 내어 걷기 시작하면 사랑은 몸에 시시각각 각인된다. 몸에 각인된 사랑은 상상을 무한히 갈래지게 한다. 무한히 갈래진 상상 속에서 걷기 탱맑은 느낌이 소소하게 미미하게 돋아난다.

 

느낌은 몸 움직임, 그 놀림에 마음을 맡기는 상태다. 걸을 때 솟아나는 몸 느낌, 정서 변화를 그저 감각으로 마주한다. 가벼운 근육통, 숨참, 촉촉한 땀, 싱그러운 바람이 일으키는 피부 감각, 상쾌함, 잡념이 사라지는 순간 망아, 평화로움들.

 

알아차림은 자신이 걷고 있다는 사실을 찰나마다 의식하는 일이다. 무심코 잡념에 휘감겨 걷지 않고 유심히 걷는다. 몸 움직임, 진행 방향, 주위 조건과 맞닥뜨림 전체를 주의 깊게 살핀다. 해석·평가, 의미 챙기기는 하지 않는다.

 

뜻 가름은 걷기를 내 삶에 정색하고 다시 들이기로 하는 다짐이다. 어떻게 얼마나 걸을까, 나름과 깜냥으로 결 세우기다. 걷기가 이미 자연 문제에서 역사 문제로 바뀌었다는 각성을 구체적 실천으로 드러내는 행위다.

 

그리하여 마침내 걸어본다. 수단이든 목적이든 삶 그 자체든 살아 있는 날까지 걸어가 보는 거다. 십인십색 걷기에서 참다운 도가 일어나 인간이 우주에 여한 없이 배어들 수만 있다면야. 걷기는 태고 미래로서 인류 존망 열쇠를 쥐고 있다.


 

2. 역동 균형에서 일렁고요까지

 

걷기는 역동 균형을 잡아야 하는, 잡아가는 전체 몸 사건이다. 골격과 그에 연결된 근육에 각기 필요한 동작이 상호 팡이실이를 이루면서 중력을 견디고 장력을 조절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찰나마다 균형이 무너질 가능성을 지닌다. 균형을 잡으려면 상하, 좌우, 전후 전방위 유기적인 협동이 필요하다. 내부적으로도 신경-혈관-()막계 정보 교환도 긴밀해야 한다. 그 정보에 따른 에너지 분배도 적확해야 한다.

 

제대로 걷지 않으면 몸에 이상이 생긴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걷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걷기는 생명을 제대로 지키기 위한 전제임과 동시에 생명이 흔들릴 때 바로잡는 치유다. 제국 백색문명을 살아가는 현대인은 제대로 걷지 않기 때문에 생명 제반 균형이 무너져 있다. 걸으면 균형이 복원된다. 걷기가 힘들 정도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전 단계를 거쳐야 함은 물론이다. 어찌 걸으면 제대로 걷는가?

 

무엇보다 기본적이고 근원적으로 중요한 점은 자신이 걷는다는 사실을 찰나마다 깨어서 알아차리는 일이다. 알아차리지 않으면 타성적으로 걷게 된다. 현대인 대부분은 타성적 걷기에 중독돼 있다. 이 중독은 걸어야 하는데 걷지 않아서 생긴 질병이다. 알아차리고 걸으면 자연스럽게 다음 결과가 나타난다. 잘 안되면 정색하고 수행해야 한다.

 

타성 보행보다 보폭이 적절하게 커진다. 발 사이가 적절하게 조절된다. (타성 보행 경우, 남성은 지나치게 넓고 여성은 지나치게 좁은 경향이 있다.) 발끝 각도가 조절된다. (타성 보행 경우, 남성은 지나치게 벌어지고 여성은 지나치게 오므려진 경향이 있다.) 팔을 크게 흔든다. 어깨도 유연하게 전후로 회전시킨다. 얼굴을 들고, 가슴을 펴고, 허리를 세운다. 시선은 정면 또는 살짝 위를 본다. 숨이 깊고 길어진다. 걸음마다 새로운 탄성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몸 외부 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호흡, 순환, 면역, 내분비, 신경(·우뇌, 자율, ), 원시정보 체계 균형이 회복된다. 걷기 자체 역동 균형이 몸 모든 결과 겹에 퍼져 전천후 역동 균형 장이 형성된다. 우주 운동이 체현된다. 인간중심으로 말하면 건강한 몸놀림이다. 건강한 몸놀림으로서 걷기는 우리 생명을 구름에 달 가듯 흐르게 한다.

구름에 달 가듯 흐르는 걷기에 각별한 돋을새김 하나를 한다. 미토콘드리아에 헌정하기로서 걷기다. 운동과 선동일여(禪動一如)니 수승하다.

 

미토콘드리아는 우리 몸 세포보다 훨씬 더 많은 수로 세포 안에 존재하는 세포소기관이다. 세포 내 발전소라 보면 된다. 미토콘드리아는 인간으로 보면 외부 생명체인데 내부 공생한다. 인간 몸 자체가 이미 화쟁을 거쳐 무애 공존을 이룬 우주 이치 체현이다.

 

미토콘드리아는 인간 생명 유지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미토콘드리아 활성이 떨어지면 치명적인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암, 치매, 뇌졸중을 포함한 130가지 질병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미토콘드리아 활성을 높이려면 그 개체수를 증가시켜주어야 한다.

 

미토콘드리아 개체수를 증가시키려면 적색근육을 자극해야 한다. 특히 미토콘드리아가 많이 들어 있는 등과 허벅지 근육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평소에 등을 곧게 편 자세를 유지하는 일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더 중요한 일은 걷기다. 허벅지 근육을 자극하려는 거다.

 

미토콘드리아에 바치는 걷기는 몇 가지 적정 요건이 있다. 무엇보다 배고픈 상태. 체온을 효율적으로 높이기 위해서다. 그다음은 속도다. 30분 걸어 3km 답파할 정도면 좋다. 그다음은 운동량이다. 일주일에 5일이 적당하다. 마지막으로는 역시 허리를 펴는 거다.

 

금상첨화가 되는 팁 두 가지. 복식호흡을 병행한다. 걷는다는 사실을 찰나마다 알아차린다. (허벅지와 등 근육에 주의를 기울여도 좋다. , 심장, 간을 묵상해도 좋다.)

 

[사족] 내 미토콘드리아 걷기에는 의미 실재가 하나 더 붙는다: 노동.

 

미토콘드리아 걷기가 각종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원리 핵심에는 체온 상승이 있다. 체온이 상승하는 현상은 생체진동수가 높아지는 현상이므로 효과가 광범위하다. 그 효과는 정신적 질환에도 당연히 미친다.

 

연구에 따르면 (미토콘드리아) 걷기가 세로토닌 전구물질인 트립토판 분비를 촉진한다고 한다. 논란 여지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세로토닌은 몸·마음, 의식·무의식, ·우뇌의 역동 균형과 관련되는 신경전달물질이므로, 정확히 비대칭 대칭 운동인 걷기가 이런 효과를 내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세로토닌이 선형적으로 우울장애와 인과관계를 이루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걷기가 일으키는 역동 균형 작용이 우울장애를 치유할 수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우울장애도 결국은 불균형 문제고, 불균형 문제는 생체진동수 저하 문제기 때문이다. 다른 정신장애에도 이런 이치는 두루 통한다.

 

걷기가 인간에게 개체 단위로 미치는 지상(!) 효과는 일렁고요. 일렁고요는 역동 균형을 이른바 도() 차원에서 묘사한 말이다. 말하자면 구원이요, 견성이다. 걸어서 우주에 깃든다. 걸어서 우주와 합일한다. 홀로 가능한가? 가능하다. ! 찰나적으로만. 이 상태를 홀로 영속화하려 할 때 깨달은 마귀가 된다. 깨달은 마귀가 되지 않으려면 진정으로 깨쳐야 한다. 진정으로 깨치는 길은 구원의 확신으로 홀로 구원받는 길은 없다는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다; 견성으로 홀로 부처 되는 길은 없다는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다. 이 진부한 진리가 진부해지지 않으려면 찰나마다 새로운 발걸음을 떼어야 한다.

 

새로운 발걸음은 더불어 걸음으로 나아가는 몸짓이다. 누구와 더불어 걷는가? 이웃이다. 이웃은 누군가? 작은, 적은, 아픈, 슬픈, 수탈당하는, 죽임당하는 식민지사람이다. 작은, 적은, 아픈, 슬픈, 수탈당하는, 죽임당하는 식민지자연이다.

 

 

3. 혁명에서 개벽까지

 

걷기는 혁명하는 녹색 행위다.

 

2017310일은, 평범한 시민의 걷기만으로, 대통령직 도둑질해서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박근혜를 심판한 날이다. 5천 년 우리 역사에 이런 일은 없었다.

 

적지 않은 잘난 인간들이 혁명은 아니네, 한계가 있네, 비폭력 자랑할 일 아니네, 민노총 없었으면 안 될 일이었네, 운운···훤화하지만 잘난 입에서 언제나 나오는 후렴구다. 시민 비무장은 더없이 강력한 무장이다. 걷는 시민은 다시없는 전차군단이다. 촛불 파도는 어디에도 없는 해일이다. 목말 탄 아이도 함께 지른 함성은 ‘B52’ 굉음 너머다.

 

걷는 인간(homo ambultus)이 걷는 인민(populus ambultus)을 경험할 때, 혁명이 된다. 제국과 식민지가 엎어진다. 부역과 독재가 무너진다. 이 일에 끝은 없다.

 

걷기는 반제국주의 전사를 깨우는 녹색 격문이다.

 

걷기 혁명은 인간 사회를 넘어선다. 인간이 걷는 땅은 사람만을 위한 터전이 아니다. 바이러스(으뜸 바리)와 박테리아(버금 바리)와 곰팡이(균류)와 말(조류)과 돌꽃(지의류)과 이끼(선태류)와 망초와 백합과 지렁이와 개구리와 도마뱀과 여우를 위한 터전이기도 하다. 제국과 부역 인간이 땅을 착취하고 독점하는 짓을 지금처럼 계속하게 놔둘 수는 없다. 우리는 그 각성으로 걷는다.

 

각성한 우리는 걸어서 땅을 공유하고 있는 뭇 생명들과 이어진다. 우리는 걸어서 우리 너머 뭇 생명이 반제국주의 전사임을 인정한다. 우리는 걸어서 녹색 전사를 깨운다. 모든 녹색 전사가 세우는 통일전선으로 제국과 부역 국가를 무너뜨리고 팡이실이 공동체를 복원한다. 팡이실이 공동체 복원이야말로 각성한 무지렁이 부역자가 최후로 최상으로 할 수 있는 근원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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