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 꺼낸 걷기 이야기 핵심에 놓여 있으면서, 그 흐름 전반을 관통하는 종자 논리가 형식 논리일 수는 없다. 걷기 동작 그 자체가 용납하지 않는다. 걷기 이야기 종자 논리는 A이기도 하고 non A이기도 한 무엇, A도 아니고 non A도 아닌 무엇을 인정하는 다치(多値) 논리다. 다치 논리는 무한한 비대칭 대칭을 품는다. 비대칭 대칭은 평등한 상호 소통을 전제한다. 상호 소통은 반제국주의 녹색의학과 제국주의 백색의학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형식 논리에 터 한 이종 의학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종 의학이 모든 증상을 병으로 오인하고, 모든 병을 적, 그러니까 non A로 오인해서 무조건 때려잡는다는 사실 또한 논리적 필연으로 알고 있다. 이런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구조상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안을 수밖에 없다.

 

첫째, <19. 녹색 면역은 제국주의 이종의학을 넘어선다>에서 이미 상론했듯 자가면역 이론 구조가 취약하다. 이론이 취약하니 치료 구조도 그러하다. 역설 이론을 세울 수 없는데 어떻게 역설 치료가 가능하겠는가. 그러니까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예컨대 혈소판 감소가 자가면역으로 발생하면 비장을 제거한다, 이런 식으로 치료한다. 이는 물론 치료가 아니다. 쌍방향 면역 조절이란 개념 자체가 없으므로 양의사도 그들에게 치료(?)받는 환자도 속수무책이다. 아니, 무엇보다 말을 못 알아듣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쌍방향 면역 조절 이론을 알고 있으며 치료 또한 가능하다. 이는 결정적 차이다.

 

둘째, 상호소통이 그 자체로 의학이라는 인식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세계를 다만 질량과 에너지로 인식하고 만다. 질량은 구조, 에너지는 물리화학적 기능이다. 이 둘에 문제가 생긴 사태가 질병이므로, 구조를 조정하고 기능을 개선하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질병과 질병을 앓는 인간을 분리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모든 질병은 그 질병을 앓는 사람 삶 한가운데서 일어난다. 질병을 치료하는 데 삶 문제를 소거할 수는 없다. 삶 문제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곡절과 의미를 담은 소식이다. 질병에 관한 소식을 주고받는 그 자체가 의학이라는 진실을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모른다. 그 작은 일부를 플라세보라는 이름으로 비틀어댈 뿐이다. 백색의사들은 질병 자체에 대한 정보조차 소상히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픈 사람 아픈 삶에 일절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의학 서사 근원 주체인 아픈 사람을 도리어 철저히 소외시킨다. 이는 다만 의학적 구조 오류가 아니다. 범죄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질병과도 질병 앓는 사람과도 소통한다. 질병 자체로 가치로우며, 질병 앓는 사람 자체도 가치롭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 이는 절대적인 차이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 알 수 없다. 제국 백색문명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 살아남을 수도 있다. 치료라는 대의명분이 있으니까. 이런 제국주의 백색의학에서 질병과 질병 앓는 사람을 구해내는 유일한 길은 저들을 아예 입에 담지 않고 고요히 반제국주의 녹색의학 팡이실이를 진행하는 일뿐일는지 모른다. 입에 담을수록 사악한 구조는 그 말을 먹잇감 삼아 끈질긴 생명력을 더해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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