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질병을 화두 삼다

 

아픈 사람은 온통 아픈 생각뿐이기 십상이다. 통증이 심하면 더욱 그렇다. 병이 중할수록 더욱 그렇다. 아픈 생각에 빠져들고 만다. 병 생각에 빠져드는 일은 병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병 악화에 에너지를 보탤까. 가볍게 답할 일 아니다. 반대 경우를 살펴보자. 낫는 생각에 몰두하는 일은 어떤가. 병 호전에 에너지를 보탤까. 가볍게 답할 일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 문제에 가볍게, 그리고 쉽게 답하는 여러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다. 가장 유서 깊은 말은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 출처가 어딘지 잘 모르지만, 불가에는 이미 진리처럼 각인된 말이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모르지 않는다. 불가 수행 범주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이 말은 개소리가 된다. 암에 걸리는 일도 마음 지음이고 암에서 놓여나는 일도 마음 지음이란 말은 얼마나 가볍고 쉬운가. 그다음 긍정주의. 모름지기 일체유심소조의 세속 판 현대 버전쯤 되겠다. 여전히 어느 제국에서 왕 노릇 하거니와 이 또한 개소리임이 분명하다.

 

이런 말도 들어왔다. 병은 그저 나한테 있게 된 무엇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해서 들어온 무엇이 아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다고 나가는 무엇이 아니다. 병이 어떻게 들어왔든 의학적 치료로 낫게 하면 그만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결곡한 합리 얼굴을 하고 있으나 이 역시 개소리다.

 

이 개소리들 촐싹거림은 질병 자체를 질병 앓는 사람에게서 떼어내어 사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질병은 사물이 아니다. 앓는 사람 삶, 그 살아 움직이는 과정 일부다. 사람에게서도 삶에서도 분리할 수 없는 사건이며 대부분 물적 근거와 영역을 지닌 실재다. 그런 실재에 걸맞은 대우는 단연 화두 삼기. 분명히 하자. 화두 들기가 아니다. 드는 짓은 남성 가부장 선객이 하는 짓이다. 우리는 화두를 선 방편 사물로 들지 않는다. 화두를 인연으로 받아들인다. 화두와 전 인격으로 관계 맺는다. 삼아지는 화두에는 우리 인생 전체가 연루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질병을 화두 삼는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질병을 처치대상 사물로 폄훼한 역사를 통렬히 반성한다. 질병은 앓는 사람이 잘못 해서 들고 들어온 몹쓸 물건이 아님을 선언한다. 질병은 마음만 먹으면 후루룩 삼켜버릴 수 있는 라면 같은 물건이 아님을 명토 박는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질병과도 질병 앓는 사람과도 평등하게 상호소통하기 위해 작고 적게 배어드는 마음(小少沁心)이며 그 몸짓이다.

 

2. 홀로 선(獨禪)이 아니라, 서로 선(共同禪)이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이 질병과 질병 앓는 사람을 화두 삼을 때, 그 선 수행은 당연히 홀로 할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둘 이상이 서로 주고받는 질문과 질문에서 답의 답을 구해간다. 질병을 앓는 사람은 질병과 말을 틈으로써 이 과정을 시작한다. 거기에 의자가 참여함으로써 삼자 서사가 형성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백색의사 홀로 선(獨禪)이므로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질병과 환자, 그리고 의자 사이 서로 선(共同禪)이다.

 

질병이 서사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있다. 때려잡지만 않는다면 질병은 스스로 말을 한다. 그 말을 들을 귀 있는 환자가 먼저 듣는다. 환자 귀가 아직 열리지 않았다면 들을 귀 있는 의자가 먼저 듣는다. 둘 다 묻지 않는다면 질병은 침묵한다. 질병 침묵을 딛고 행해지는 온갖 처치는 폭행이며 살해다.

 

환자가 서사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있다. 의자가 눈만 내리깔지 않는다면 환자는 스스로 말한다. 그 말을 들을 귀 있는 의자가 들으면 함께 질병에 귀 기울인다. 삼자가 주고받는 이야기는 벼락이 되어 함께 깨칠 틈을 낸다.

 

반제국주의 백색의학이 홀로 선으로 사회를 의료화했으므로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서로 선으로 의료를 사회화한다. 사회화된 의료는 스스로 특권 거점을 지운다.

 

3. 언어, 그 너머(頓悟漸悟)

 

서로 선은 묵언-일극-개체-집중-중심 시선으로는 할 수 없다. 서로 선은 대화-양극-전체-주의-비 중심 시선으로만 할 수 있다. 다 말한다. 다 듣는다(). (냄새) 맡는다().

 

최후 답은 말이 아니다. 말 아닌 답에 이르려면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말은 비상하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비상한 말이 소통, 깨침, 치유, 그리고 마침내 장엄을 일으킨다. 장엄을 일으키는 비상한 말은 상스럽다. 상스러운 말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것은 비명이며 욕설이며 신음이다. 그다음이 시쳇말이다. 전문용어는 대개 상스럽지 못하니 비상하지 못하다.

 

서로 선 대화는 전문용어로 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한다. 제국주의 백색의학은 영어(일부 라틴어), 한문 아니면 입도 벙긋 못한다. 반제국주의 녹색의학은 chill 아니고, 惡寒 아니고, 으슬으슬하다(오싹오싹하다). 한의학 진단을 하면서 내가 가장 많이 쓰는 말 가운데, ‘장마철 반지하 방이 있다. 생체진동수가 떨어져 대사 속도가 느려진 몸 상태를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할 때 쓰는 비유다. 아니고, 冷寒 아니고, 아니다. 심지어 차고 축축하다는 말보다도 오만 배 빨리 알아듣는다. 못 알아듣는 말로 떠는 위세나 독점하는 정볼랑은 백구한테나 던져줄 일이다.

 

고백건대 나도 역시 한자 말, 뭐 어떨 땐 영어도 쓴다. , 알아듣게 풀고, 알아들을 만할 때만 쓴다. 대부분 용어는 환자 스스로 쓰는 말을 그대로 받아서 쓴다. 환자가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때는 시쳇말, 일상어부터 대신 제시하면서 말문을 튼다. 아무튼 바꿀 수 있는 의학용어는 모조리 바꾸고, 바꾸기 어려운 용어는 적절한 비유나 이미지를 동원해 소통을 도와야 한다.

 

말로 소통해서 서로 언어 감각과 뉘앙스, 그 너머 언어-()을 알아차리면 눈빛만 보고도 안다. 특히 숙의치료 하다 보면 놀라운 경험을 드물지 않게 한다. 의자와 환자 사이 구분이 무너지고 평등한 선문답 수준 언어와 직관이 오간다. 서로 새로움을 생성해낸다. 환자가 의자를 넘어서는 순간도 허다하다. 서로 치유하고 서로 자라간다. 서로 깨달아가고 서로 깨쳐간다. 서로 돈오(頓悟)의 큰 기쁨에 이르고 서로 점오(漸悟)의 괴괴함을 지난다.

 

4. 마침내 큰 수레(大乘)

 

빨빨 기어 다니며 탈 없이 크던 아기가 어느 날 갑자기 열을 펄펄 끓이며 앓는다. 젊은 엄마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할머니가 웃으며 말해준다. “아유, 우리 강아지가 걸으려나 보다!” 아기는 앓고 난 뒤 영락없이 걸음마를 시작한다. 온 가족이 함께 아기 한걸음 한걸음에 환호하며 행복감에 싸인다.

 

아기 열병과 걷기 사이에 어떤 의학적 인과가 존재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질병 자체를 환호 대상으로 이해하는 일은 아무래도 이상하지만, 질병을 삶 큰 맥락에서 해석함으로써 지혜를 얻고 행복을 예감하는 일은 하등 이상하지 않다. 질병을 두고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에 따라 인간은 사뭇 다른 결로 삶을 산다. 삶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질병은 질병을 앓는 사람과 그를 치료하는 사람과 그를 돌보는 사람을 함께 깨달음으로 이끄는 큰 수레(大乘)임이 틀림없다. 우리가 그 큰 수레를 보지 못한 채, 각기 괴로움과 시큰둥함과 마지못함으로 허정허정 걸어갈 따름이다.

 

바야흐로 한 생각 크게 돌이킬 때가 왔다. 질병 인식 패러다임 전체를 뒤집어엎어야 한다. 인류가 당면한 생명 위기는 창궐하는 질병 탓이 아니라 제국주의 백색의학이 질병을 잘 못 인식하고, 거기 터 하여 치료 약이랍시고 뿌려대는 화학합성물질 때문이다. 이제 질병은 백색 독극물로 때려잡을 적이 아니다. 인류 구원 서사를 실을 큰 수레다. 이 큰 수레를 끌 주체는 백색 요법 포르노와 독극물을 거절한 질병 인민이다. 만국의 아픈 이여, 연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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