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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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에 대한 탄력적 개념을 가진 특수상대성이론이 동시성을 지지하는가? 직접은 아니다. 그럼에도 상대성이론에서 나타나는 시공간 개념은 확실히 더 탄력적이고 관계적이며 덜 고정돼 있고 따라서 동시성에서 흔히 보이는 면들을 초월하는 시공간에 더 적합하다.


이 점을 심리학으로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시공간에 고정성과 절대성을 투사한다. 여기에 투사를 걸만한 고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속도가 광속보다 훨씬 낮은 대부분 비상대적 조건에서 이 실수는 문제 되지 않지만, 원칙적으로 시공간은 특정 관찰자에게 특정한 기준 틀에 상대적이다. 그런 점에서 시공간은 본질상 정신적이다.(165~166)

 

나도 마지못해 쓰기는 하지만 본질이라는 말을 들으면 저 깊은 곳에서 거부 웅얼거림이 일어나 올라온다. 본질이 있기는 한가? 본질이라는 말 자체가 실체주의 프레임을 반영하지 않는가? 이런 질문이 불가피하다. 우선 비본질을 톺아본다.

 

시공간에 고정성 절대성을 투사하는 행위는 실수. 이 실수는 광속보다 낮은 거의 모든 속도 조건에서 문제 되지 않는다. 문제 되지 않는 실수 차원에서 시공간은 정신적이지 않다. 이는 비본질이다. 비본질이 아날로그적으로 펼쳐지는 세계에서 우리 일상은 영위된다. 본질은 디지털적으로 일상 경계를 부수고 메워서전체성을 향해 간다. 여기에 동시성이 개입한다.

 

크로노스 수평은 비본질이고 카이로스 수직이 본질이라면 대체 인간은 왜 이런 비효율적인 삶을 사는가? 말하자면 주야장천 실수로 일관하다가 예측 불허 어떤 순간에 본질과 맞닥뜨림으로써 화들짝 보정되는 삶이 과연 목적 지닌 삶이라 할 수 있는가? 무엇이 본질인지 묻기 전에 본질이 무엇인지 물으면 본질:비본질 구도 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시간 본질을 묻고 그 본질을 정신적이라고 규정하는 일은 저자가 의지하는 중도불교 사상과 일치하는가? 이 실체 아닌 실재 사이 상호의존을 뜻한다면 본질도 실체가 아니다. 실체가 아니면 끊임없이 변할 테고 끊임없이 변하는 무엇에게 본질이 있을 리 없다.

 

정신과 물질 사이 상호의존으로 논점을 한정한다. 정신과 물질은 마치 빛에서 파동과 입자처럼 상태함수 차이로 드러나는 차이일 뿐 본질적 경계를 지니지 않는다. 본질적 경계가 아닌 경계를 절대화한 터 위에 상대성을 근거로 시간 본질을 정신적이라 규정한다면 이는 궁극에서 대극 합일로 향하는 저자 취지와 어긋난다. 대극 합일과 일극 집중이 동의어가 돼버린다.

 

저자는 아리안-힌두 전통과 붓다 원음이 다르다는 엄밀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잘못된 대극 합일에 터 하고 있다. 마지막 다다를 지점은 서로 다르지만 융도 맨스필드도 유구한 사하라시아(스티브 테일러)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거인이 되었다. 본질적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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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1 1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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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2 09: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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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2 10: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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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2 17: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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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8 21: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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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9 08: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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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이자 부처님오신날인 5월 8나는 서울 둘레길 제3(일자산-고덕산)구간을 걸었다수서역에서 서하남IC 입구 교차로까지 시가지 부분을 제외했다고덕산에서 광나루역까지 시가지도 있지만한강을 도보로 건너기 위해 포함했다그렇게 20km를 7시간-점심 식사와 버섯 사진을 위해 들인 시간을 제외하면 5시간가량-에 걸쳐 걸었다이제 서울 둘레길 걷기가 마무리되었다한양 도성길북한산 둘레길관악산 둘레길에 이어 서울 둘레길까지 걸음으로써 서울 숲들에 대한 예의 대강을 표한 셈이다서울 산 지 58년 만이다.


 

처음에는 제3구간을 아예 빼려고 생각했다지도를 면밀하게 살피고 나서야 만만치 않은 숲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일자산은 134m고덕산은 86m 남짓이니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숲은 언제나 예상 밖 풍경을 지니고 있다일자산 초입부터 버섯들이 나를 열렬히 맞아주었다능선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하남시 쪽으로 완만한 경사에 묘지들이 가득하다놀랍게도 그 묘지 사이사이가 죄다 텃밭으로 꾸며져 있었다텃밭에 묘를 썼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이상하기도 하고 정겹기도 한 묘한 풍경이었다알 수 없는 평안함에 환희를 더해준 존재는 있는 듯 없는 듯 자리 잡은 막걸리집이었다아까시꽃 향기가 자욱한 숲속나는 가져간 구운 감자를 빈-양념을 제거한- 김치에 싸서 점심으로 먹으며 막걸리를 반주로 곁들였다그 많은 둘레길 걷기 마지막에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숲과 곰팡이가 내린 축복이다.






고덕산은 낮디낮은 그야말로 야산이다이름조차 없었으나 조선을 받아들이지 않고 칩거한 어느 고려 선비 높은 덕을 기려 이름을 붙였다 하니 산이 갑자기 야젓해 보인다지금이야 우습게 들리지만 6백 년도 훨씬 전이라면 여기는 은둔지로서 손색없다매봉(85m) 자락을 거둠으로써 고덕산은 한강에게 길을 내어준다둘레길 아니었다면 아무도 걷지 않았을 섶 길을 지나 한강 둔치로 나섰다미루나무가 줄지어 있어 어린 시절 떠나온 강원도 평창 신작로를 떠올리게 한다드디어 한강이다걸어서 한강을 건너기는 참 오랜만이다. 20대 초반 한남동 강 건너편 배밭(압구정동)에 배 먹으러 간다며 3한강교를 건넌 이후 처음이지 싶다광진교 위에서 흐르는 강물서쪽 하늘 아래 펼쳐진 도시그리고 그 너머 관악산을 무심히 본다숲에서 숲으로 이어온 여러 둘레길 여정을 강에서 끝낸다인생 또한이와 같지 않겠나.






곰팡이 ritual을 멈출 수는 없다다시 어딘가 숲으로 가야 할 테다어찌할까아무 생각이 아직은 없다서두를 까닭도 없다이 여정에서 내 인생 마지막 이야기를 해야 하므로 곡진한 헌정과 걸판진 놀이가 맞물리도록 풍경을 그려내야 하겠지그러려면 내 영혼의 감각이 더 섬밀해져야 함은 물론이겠지만숲도 더 깊어져야 할까산이 높다고 숲이 깊지는 않다명산보다 뒷산이라는데멀리 있는 명산에 괜한 욕심 들일 일은 없겠다어떤 지관이 일자산 와 살피더니 낮아도 이 산은 약산이다.’라고 했다던 막걸리집 주인 말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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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5-10 13: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늘쫑(?) 안주로 막걸리를 드셨나봅니다. ˝약손˝처럼 그 ˝약˝의 ˝약산˝일까요? 말씀하신대로 꼭 높아야만, 차타고 멀리 가서 만나야만 명산이 아닌데, 저도 생각을 좀 바꿔서 가까운 데 자주 다녀야겠습니다.

bari_che 2022-05-10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기본안주로 마늘종을 주는데 꿀맛이 따로 없었습니다.^^
‘약‘ 그 ‘약‘ 맞습니다.
숲뿐 아니라 모두 내 발이 가 닿을 수 있어야 내 삶이겠지요. 그냥 가서 걸으시면 그저 좋습니다~ㅎ
 
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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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리학에서 무엇인가가 우연히 발생했다고 말할 때는 우리가 기본적인 인과 역학에 무지하다는 뜻이다. 양자사건이 비인과적이라고 말할 때는 어떤 근본적인 인과 구조도 개별사건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심리학에서도 우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일은 인과론에 대한 암묵적이거나 은폐된 약속이 있다. 그러나 융이 동시성 경험이 비인과적이라고 말할 때는 그 사건에 대한 인과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양자물리학과 같다. 그러나 동시성이 의미에 대한 비인과적 표현이라고 말할 때, 그는 목적인이나 목적론을 암시한다. 여기서부터 분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융이 양자역학에서 영감을 얻어 배타적인 결정론 노예 상태인 우리를 해방시켰지만, 그보다 더 나아간 비인과는 어떤 물리학에서도 도움 받을 수 없다.(148~149-인용자가 의미 왜곡 없이 내용을 압축함.)

 

비인과라 하면 상식적으로는 필연: 우연 대극에서 말하는 우연을 떠올린다. 우연이 인과에 속한 특수조합일 뿐이라는 진실을 마주하면 비인과가 아연 어려워진다. 우연이 비인과가 아니라면 비인과는 대체 뭔가. 더군다나 융 동시성에는 양자물리학도 말 못하는 비인과가 있다는데.

 

융 동시성이 말하는 비인과는 의미요건을 수반한다. 의미는 목적인이나 목적론과 맞물린다. 물리학이 연구하는 우주에 목적이 있나. 목적이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나. 우주 목적을 말하려면 물리학 너머 생물학이 필요하다. 생물학은 창발로써 단도직입 비인과를 품는다. 융에게도 맨스필드에게도 생물학은 없다. 그들에게 생물학은 인간학이기 때문이다. 인간학으로 비인과를 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정신이다. 최종 도달지점은 다르지만, 두 사람은 정신주의로 과학적 물질주의 인과를 돌파한다. 이 돌파는 물질주의는 몰라도 이분법은 돌파하지 못한다. 대극합일이라 하지만 결국 정신작용으로 환원한다. 물질주의가 빠졌던 환원주의를 다른 방향에서 똑같이 범하고 있다.

 

이런 오류는 정신을 인간 차원에 가두는 데서 발생한다. 인간 차원에 갇힌 정신은 결코 물질-정신 이분법을 벗어날 수 없다. 이분법을 벗어나는 데는 "다시" 생물학이 필수다. 인간 이전 생명에서는 물질과 정신, 의식과 무의식 이분법이 작동하지 못한다. 이분법이 작동하지 못하는 생명에게서 찰나마다 일어나는 창발, 그러니까 네트워킹은 그 본성이 비인과다; 동시성이라 이름 한 경험을 구태여 따로 할 필요조차 없다. 아니, 우리는 비인과 동시성 경험을 통해 지반 묵타 또는 생불로 오그라들지 않고 낭·, 돌꽃, 곰팡이, , 버금바리(박테리아), 으뜸바리(바이러스)가 구현하고 있는 인과비인과 생명 네트워킹으로 번져간다.

 

세계는 인과와 비인과가 “1: 9”로 비대칭대칭을 이루며 운동한다. 인간 관지에서 말하자면 우리는 장구한 미분리비인과 시대를 거칠게 찢고 나와 잠시 인과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잠시 동안에 비인과 지혜를 미신으로 몰아붙이며 지구생태계는 물론 인간 자신마저 멸절위기로 내던져버렸다. 비인과 지혜를 복원해야 산다. 복원은 부정을 부정하는 작은 긍정이 아니다. 부정을 품어 달여 낸 큰 긍정이다. 큰 긍정은 모든 생명으로 하여금 더불어 비인과 동시성을 살도록 하는 큰 수레大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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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 살피재 숲 길가에 핀 작디작은 꽃을 봤다. 익히 아는 노린재나무여서 일별하고 지나치려는 찰나 여섯 장 꽃잎에 눈길이 꽂혀 멈춰 섰다. 내가 잘못 알았나? 서둘러 한의원에 도착해 꽃잎 여섯 장인 봄꽃을 이리저리 찾아봤으나 없다. 내 기억을 분명히 하려고 오늘 아침 다시 그 꽃을 찾았다. 아뿔싸! 내 눈을 사로잡은 그 아이 딱 한 송이가 꽃잎 여섯 장으로 이루어졌다.


돌연변인가 보다 하고 일어서는데 가슴 한복판에서 딱! 하는 소리가 난다. "돌연변이는 없어! 다른 곡절이 있을 뿐이야!"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히듯 서서 한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100회 어린이날이다. 내게는 평일(!)이라 7시 조금 넘어 출근해 인적 없는 한의원을 지키고 있다. 어린이날은 방정환이 일제 치하에서 우리 어린이한테 민족정신을 고취하려 제정했다. 30년 쯤 뒤에 유엔은 어린이에 대한 보편 복지를 목적으로 세계 어린이날을 만들었다. 1120일이다.

 

대한민국 어린이날은 세계 어린이날과 다른 곡절을 지니고 있다. 그 다른 곡절은 여기, 누가 기억하며 묻는가? 매판본진이 다시금 권력을 쥔 오늘, 누가 우리 어린이한테 자주민주정신을 고취하나? 다시 들여다보는 작디작은 꽃잎 여섯 장이 마냥 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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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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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성 경험은 본질상 인과 아닌 의미로 연결된 객관·외부적 사건과 주관·심리적 사건을 필수 요소로 지닌다.(56-인용자가 독립된 두 문장을 의미 왜곡 없이 압축함.)

 

융도 맨스필드도 동시성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융은 맨스필드가 제외한 개념까지 포함한 채 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맨스필드는 정의라는 표제를 단 단락에서도 정의를 내리지 않고 위에서 인용한 특성을 제시하면서 동시성을 이해하는데 어려운 점을 톺았다.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그는 가장 먼저 의미를 거론했다.

 

의미가 그냥 말이나 글이 지닌 뜻을 가리키지는 않을 텐데 애당초 의미로 번역한 자체부터 문제다. 번역서를 읽는 독자는 이게 왜 논란이 되는지조차 알아차릴 수 없다. 전체 문맥을 살피건대 이 의미는 객관·외부 사건과 주관·심리 사건을 연결시키는 필수 고리다. ‘의미가 결여된 초자연·비일상 사건은 동시성 경험일 수 없다. 그리고 그 의미가 단순한 정보나 지식 정도여서도 안 된다. 보상을 통한 개성화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의미는 전체성으로 나아가는 발달과정에서 요긴한 메시지로 작용하는 무엇이다.

 

관건적 의미를 느슨하게 대한 결과 동시성은 접근도 이해도 쉽지 않게 되고 말았다. 이 상황을 추스른 다음, 맨스필드는 부정어법으로는 정의를 내릴 수 없으므로 이렇게 정리만 했다.

 

1. 동시성은 주관적인 것만이 아니다.

2. 동시성은 마술이 아니다.

3. 동시성에서 의미는 자아가 만든 산물이 아니다.

 

정리를 토대로 동시성 요건에서 누락된 부분만 더 이야기한다. 자아가 지닌 능력이나 소원 따위가 원인으로 작동해 빚어진 결과를 동시성이라 하지 않는다. 사건도 의미도 전체성이 그려진 네트워킹 풍경 속 맥락이 발현시킨다. 신학적으로는 은총이며, 경제학적으로는 선물거래에 해당한다. 이 인간적 묘사를 넘어선 생물학 차원에서라면 창발에 참여하는 창발이다.

 

다들 피한 정의를, 무릅쓰고 내린다면, 동시성은 의식 편향에 빠진 사람에게 무의식이 비인과적으로 다가와 전체성을 향해 발달하도록 주객·내외를 소통시키는 창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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