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 양자역학, 불교 영혼 만들기
빅터 맨스필드 지음, 이세형 옮김 / 달을긷는우물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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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리학에서 무엇인가가 우연히 발생했다고 말할 때는 우리가 기본적인 인과 역학에 무지하다는 뜻이다. 양자사건이 비인과적이라고 말할 때는 어떤 근본적인 인과 구조도 개별사건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심리학에서도 우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일은 인과론에 대한 암묵적이거나 은폐된 약속이 있다. 그러나 융이 동시성 경험이 비인과적이라고 말할 때는 그 사건에 대한 인과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양자물리학과 같다. 그러나 동시성이 의미에 대한 비인과적 표현이라고 말할 때, 그는 목적인이나 목적론을 암시한다. 여기서부터 분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융이 양자역학에서 영감을 얻어 배타적인 결정론 노예 상태인 우리를 해방시켰지만, 그보다 더 나아간 비인과는 어떤 물리학에서도 도움 받을 수 없다.(148~149-인용자가 의미 왜곡 없이 내용을 압축함.)

 

비인과라 하면 상식적으로는 필연: 우연 대극에서 말하는 우연을 떠올린다. 우연이 인과에 속한 특수조합일 뿐이라는 진실을 마주하면 비인과가 아연 어려워진다. 우연이 비인과가 아니라면 비인과는 대체 뭔가. 더군다나 융 동시성에는 양자물리학도 말 못하는 비인과가 있다는데.

 

융 동시성이 말하는 비인과는 의미요건을 수반한다. 의미는 목적인이나 목적론과 맞물린다. 물리학이 연구하는 우주에 목적이 있나. 목적이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나. 우주 목적을 말하려면 물리학 너머 생물학이 필요하다. 생물학은 창발로써 단도직입 비인과를 품는다. 융에게도 맨스필드에게도 생물학은 없다. 그들에게 생물학은 인간학이기 때문이다. 인간학으로 비인과를 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정신이다. 최종 도달지점은 다르지만, 두 사람은 정신주의로 과학적 물질주의 인과를 돌파한다. 이 돌파는 물질주의는 몰라도 이분법은 돌파하지 못한다. 대극합일이라 하지만 결국 정신작용으로 환원한다. 물질주의가 빠졌던 환원주의를 다른 방향에서 똑같이 범하고 있다.

 

이런 오류는 정신을 인간 차원에 가두는 데서 발생한다. 인간 차원에 갇힌 정신은 결코 물질-정신 이분법을 벗어날 수 없다. 이분법을 벗어나는 데는 "다시" 생물학이 필수다. 인간 이전 생명에서는 물질과 정신, 의식과 무의식 이분법이 작동하지 못한다. 이분법이 작동하지 못하는 생명에게서 찰나마다 일어나는 창발, 그러니까 네트워킹은 그 본성이 비인과다; 동시성이라 이름 한 경험을 구태여 따로 할 필요조차 없다. 아니, 우리는 비인과 동시성 경험을 통해 지반 묵타 또는 생불로 오그라들지 않고 낭·, 돌꽃, 곰팡이, , 버금바리(박테리아), 으뜸바리(바이러스)가 구현하고 있는 인과비인과 생명 네트워킹으로 번져간다.

 

세계는 인과와 비인과가 “1: 9”로 비대칭대칭을 이루며 운동한다. 인간 관지에서 말하자면 우리는 장구한 미분리비인과 시대를 거칠게 찢고 나와 잠시 인과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잠시 동안에 비인과 지혜를 미신으로 몰아붙이며 지구생태계는 물론 인간 자신마저 멸절위기로 내던져버렸다. 비인과 지혜를 복원해야 산다. 복원은 부정을 부정하는 작은 긍정이 아니다. 부정을 품어 달여 낸 큰 긍정이다. 큰 긍정은 모든 생명으로 하여금 더불어 비인과 동시성을 살도록 하는 큰 수레大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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