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처럼 생각하기 - 나무처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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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식물에게 특히 예민한 부분인 듯하다. 꽃을 생식을 위한 구성요소, 심지어 생식기관으로 축소함으로써 해석은 너무나 단순해졌다.

  그러고 보면 식물 감각 연구에서 꽃보다 잎을 주요 대상으로 삼은 구조는 애석하다. 어떻게 다른 생물(곤충)과 은밀히 만나도록 주선하는 꽃에 성적 예민함이 없다고 상상하겠는가?......꽃은 살아 숨 쉬는 이타적 존재이자, 이를 통해 타자를 유혹하는 유일한 식물 부위다.(74~75)

 

"유혹"이라는 말을 좋은 뜻으로 쓰는 경우는 비유일 때 말고는 없다. “이타는 유혹과 어울리지 않는 정도를 넘어, 모순에 가깝다. 꽃은 어떻게 이 둘을 잇는가? 이타도 유혹도 인간의 윤리의식이 배어 있는 표현이다. 꽃을 인간의 관지로 보니까, 이타와 유혹이 서로 부딪친다. 꽃의 관지에서 보면, 생명공동체 일원으로서 투명하게 네트워킹에 참여하는 행위는 다음 둘의 맞물림이다. 타자에게 필요한 무엇을 주려고 극상으로 창조한다. 자기에게 필요한 무엇을 받기 위해 극상으로 매혹한다. 생명 이치에서 비대칭의 대칭은 자연Sollen이다. 인간의 분리 인식으로 각 세울 일 없다. 정색하고 다시 감지하면, 이타적일수록 유혹은 강렬하고, 유혹적일수록 이타는 숭고하다. 이 역설 연금술은 꽃이 태고부터 연마해 극상 풍요를 이룬 절정고수 초식이다. 이성에게 권력을 맡긴 뒤부터 인간은 이 초식에 관한 한, 전신마비가 되었다. 마비를 풀 방도가 혹시 꽃은 꽃이 아니다.”란 말과 꽃은 꽃이다.”란 말이 포개지는 찰나를 잡아채는 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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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생각하기 - 나무처럼 자연의 질서 속에서 다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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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표면인 식물은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것을 감지한다. 살아 있지만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 작은 물체의 이동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파동, 즉 공기 중에 떠다니며 분산되는 분자나 태양이 퍼뜨리는 광전자, 고요하게 미끄러지는 물 분자까지, 주변에서 놓치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다.(72)

 

  나무는 인간 뇌 또는 그와 유사한 기관이나 감각 전달 장치가 없어서 내부에 통합된 민감도를 갖춘 여러 가지 감각을 이용한다. 이런 '모듈'을 구성한 나무는 그 자체로 여러 결정면을 가진 감각 만화경이 된다.(73)

 

인간은 인간이기에 범하는 실수와 실패로 말미암은 어둠을 요란히 끌어안고 산다. 공포불안과 탐욕, 무엇보다 어리석음이라는 숙명 때문이다. 나무는 나무이기에 범하는 실수와 실패가 없어서 어둠을 고요히 끌어안고 산다. 공포불안과 탐욕, 무엇보다 어리석음이 숙명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을 어둠으로 몰아넣는 가장 본원적이고 급진적인 어리석음은 나무를 모르는 데서 온다. 뇌 일극집중 인식에 몰두하는 인간이 모듈 감각 만화경을 알 리 없으니, 나무를 지각주체로 여기지 못하고 물건 취급한다.

 

모듈 구조·사건은 뇌 또는 그와 유사한 기관이나 감각 전달 장치로 특화, 심지어 집중화하기를 거부하고, “통합된 민감도를 갖춘 여러 가지 감각을 평등하게 배치·운동한다. 평등한 네트워킹이므로 인간 감각과는 비교할 수 없이 민감하다. 도망칠 수 없는 조건에 극상 적응한 결과다.

 

도망칠 수 없어 전천후전방위 솔루션을 위한 민감도가 극대화된다. 인간은 도망치는 만큼 감각기관이 편중된다. 감각기관이 편중되는 만큼 감각이 편중된다. 편중감각은 치명적 둔감을 낳는다. 둔감이 파멸을 부른다.

 

파멸의 위기가 둔감에서 온다는 말은 실로 섬뜩하다. 웃으며 다른 사람 죽이는 사이코패스가 결국 자기 자신 죽이는 이치다. 파멸을 코앞에 둔 인류는 살해 쾌감 빼고 모든 감각을 지워버린 초 중증 사이코패스다. 본원적이고 급진적인 민감 혁명을 일으켜야만 한다. “나무觀世音菩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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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생각하기주해리뷰1. <강신제>에서 메타길 버드나무 이야기를 했다. 얼마 뒤 버드나무 두 그루가 더 내게 나타났다. 나는 이제 그 길을 버드나무 길이라 부른다. 지난 토요일 오후 그 버드나무 길을 따라 퇴근하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두 그루 가운데 조금 더 큰 갯버들의 우듬지를 포함한 상단부가 모조리 잘려나갔다. 그 갯버들의 위치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길가가 아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이 이따금씩 드나드는 이른바 개구멍옆이다. 개구멍 드나드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나무는 가차 없이 희생되었다. 나는 그 가운데 하나를 집으로 가져와 빈병에 꽂고 물을 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과는 달리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치상 그럴 수밖에 없고 내가 몰랐을 따름이다. 나는 거듭된 낫 자국이 선명한 부분에서 그 낫 자국을 살리고 나머지를 다듬어 소박한 목걸이를 만들었다. 신영神珱-신물神物인 목걸이-인 셈이다. 나무사람 또는 사람나무로 어찌 살아야 할지를 찰나마다 감지하는 약속이자 빙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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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우 한 분이 선물하신 카네이션 일부가 어쩌다 떨어져 나왔다. 아까워서 공진단 케이스를 분 삼아 물 주고 세웠더니 앙증맞다. 간호사가 너무 예쁘다며 얼른 제 자리 앞에 가져다 놓는다. 선물이 아기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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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5-08 2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작은 공진단 케이스에 카네시션 한송이 너무 어울려요.

bari_che 2021-05-09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공진단보다 더 귀한 보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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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타상 지음, 구영옥 옮김 / 더숲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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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사회생활 모델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나무가 보여주는 대립 없는 공생, 즉 나무에게 매우 이로운 이 공생을 숙고해볼 필요는 있다. 나무가 발휘하는 이 협업 기능은 극에 달한 사회적 불평등과 과열 경쟁, 그리고 과대평가된 개인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영감을 줄 수 있으리라 본다.(71)

 

나무가 지닌 깊은 진실과 경이를 생생하게 전해주던 중에 한 말 치고는 아쉬운바 적지 않다. “나무가 사회생활 모델을 제시할 필요는 없다고 하더라도라는 말을 한 까닭이 뭘까? “세상에 헛된 주문을 걸어서는 안 된다”(101)고 한 말과 같은 맥락일까? 모델 대신 택한 숙고영감은 우리에게 어떤 실재로 다가올 수 있을까?

 

극에 달한 사회적 불평등과 과열 경쟁, 그리고 과대평가된 개인주의가 우리 시대정신이 된 까닭은 인간이 만든 정치제도 가운데 가장 우수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다. 근대 민주주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했다고 하는 헌법을 따르는 아메리카합중국이야말로 극에 달한 사회적 불평등과 과열 경쟁, 그리고 과대평가된 개인주의 끝판 왕이다. 아메리카합중국 헌법은 이로쿼이연방 정신을 벤치마킹했다. 물론 가장 본원적이고 핵심적인 정신은 뺀 채다. 그런 고의적 누락이 가져온 폐해는 광기에 해당하는 범죄였다. 그 가운데 가장 천인공노할 사항은 원주민에게 행해진 홀로코스트다. 유럽인이 처음 도착했을 당시 원주민 인구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2천만에서 1억까지 추정한다. 그 중간을 잡더라도 6천만이다. 6천만이 1920년에 이르면 22만이 된다. 이 학살은 나치가 유태인에게 저지른 범죄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자신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쳐준 스승을 살해로 보답한 정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데 어떻게 극에 달한 사회적 불평등과 과열 경쟁, 그리고 과대평가된 개인주의가 판을 치지 않을 수 있겠나.

 

이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이로쿼이 정신 복원이다. 이로쿼이 정신은 나무에게서 왔으므로 당연히 나무 정신, 대립 없는 공생의 복원이다. 복원할 때, 숙고니 영감이니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단도직입으로 모델이라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종적 차이는 무의미하다. 인간 몸 자체는 모듈이 아니지만 신자유주의 삶은 완전한, 아니 네트워킹도 군집지성도 일어나지 않을 만큼 극단적인 모듈이다. 인간에게서 모델을 찾으면 안 된다. 더군다나 지금 인간이 당면한 위기는 인간끼리만 주고받는 민주주의로는 감당할 수 없다. 종적 민주주의 실천이 화급한 과제다. 나무 협업이라는 모델이야말로 근원적radical이고 급진적radical인 모델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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