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연인들 - 김선우 장편소설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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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것은 시다


김선우는 내가 개인적으로 그의 생각 두어 자락을 잘 알고, 아는 만큼 절대 공감하는, 유일한 시인이다. 하여, 나는 그를 ‘천하시인’이라 부른다. 적어도 내겐 그의 시가, 시심(詩心)이 천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천하를 담고 있는 그가 천 날을 궁굴려 빚어낸 「물의 연인들」은, 그러므로 내게 소설이 아니고 시다. 그의 팽청(膨淸)한 목소리로 낭송하는 언어들에 귀 기울이면 이 시는 남모를 아름다운 환시를 공감각으로 전해준다. 


내가 본 크낙한 환시는 이 시의 비대칭적 대칭구조(unsymmetrical symmetry)다. 즉, 제2부와 제3부 사이를 경계삼아 꺾어 마주 붙이면 쪼개지면서도 포개지는 대칭성이 나타난다. 그 안은 물론 아리잠직한 환시, 즉 교차대구(chiasmus)의 직조 미학이 자리 잡고 있다. 즉, A-B-C-C'-B'-A' 구조다. 김선우가 처음부터 의도하고 이렇게 정교한 구조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그의 직관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해 그리 했다고 보는 게 맞지 싶다. 천하시인이니까.......^^


사실, 이런 건축학적 아름다움이 그야말로 내 개인적인 ‘환’시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프롤로그 첫머리에 인용된 그의 시 <아무도 살지 않아서 좋았다> 일부와 에필로그 첫머리에 인용된 그의 시 <사릿날>의 일부를 마주치게 하는 순간, 그리고 프롤로그의 속 제목 “모든 곳에서 춥고 모든 곳으로부터 먼”과 에필로그의 속 제목 “한 물방울로부터 한 물방울에게”를 마주치게 하는 순간, 나는 이 구조를 떠올렸고 그 눈으로 전체를 보았기 때문이다.


전문가적 안목에서 그렇고 아니고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가 김선우의 독자로서 그의 미학에 좀 더 내밀하게 접근할 수 있다면 뭐, 그게 단순 ‘환’시든, 오류든 괘념할 일은 아니다. 덕분에 이야기 결결을 되작거리며 읽는 맛을 깊이 즐길 수 있어서 행복했으니 이 아니 행운인가. 감성으로 휘청거리며 읽는 일도 좋지만 지성으로 곧추 앉아 읽는 일도 여간 맛있는 게 아니다. 집중해서 읽는 내 모습을 아내가 보다가 갸웃한다. “지금 고시공부 해요?” ㅍㅎㅎ



1. [A: A'] 프롤로그: 에필로그


프롤로그를 이끄는 시는 이러하다.

 

번개 친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프다

천둥 친다, 나는 여전히 당신이 아프다


번개 친 후 천둥소리엔


사람이 살지 않아서 좋았다


에필로그를 이끄는 시는 이러하다.


금이 간 뼈를 보름처럼 구부리고

파도를 밀며 끌며 오는 사랑아

죽음보다 질긴 사랑이 있어

우리가 낳은 혼례의 어린 몸들 깊으니

일곱 잠째의 밀물이 이번 생엔 없는 것이어도

다음 생의 첫 잠으로 올 것을 아네


나는 「물의 연인들」을 읽기 전 이 두 시로 「물의 연인들」을 다 읽었다. 사람이 살지 않아 좋았던 시공과 다음 생 첫 잠으로 오는 인연 사이에 줄을 이으면 거기 모든 생명, 모든 죽음, 모든 주체, 모든 조건이 깃발로 걸릴 터이므로.


그러나 천하시인 김선우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다음 발걸음을 내디딘다. 프롤로그의 본문 속 제목은 “모든 곳에서 춥고 모든 곳으로부터 먼” 끊어짐과 멈춤의 사연을 휘몰고 온다. 비록 농염하고 아련함으로 가득 찬 에피소드가 넘실거리지만 그 넘실거림은 견결한 유령, 그 죽음의 금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에필로그의 본문 속 제목은 “한 물방울로부터 한 물방울에게” 이어짐과 흐름으로 “여리고 환한 목숨의 빛”(264쪽)을 전해준다. 비록 물의 딸 수린의 다비로써 대단원의 막이 내리지만 프롤로그를 한 바퀴 뒤집어 이어붙임으로써 뫼비우스의 띠, 그 생명의 영원한 순환 길을 연다.



2. [B: B'] 제1부 유령의 시간: 제4부 흐르는 사람들


유경은 생애에 가중 소중한 두 사람, 엄마와 연인을 모두 잃고 “7년째 허깨비처럼 살고 있”(38쪽)다. “유령이 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유령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38쪽) 유령은 아무리 달려도 갇힌 존재다.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끊어진 존재다. 아무리 흘러가도 멈춘 존재다. 유령의 시간, 그 봉인된 성에서 유경은 자신에 대하여 “살인을 저지르고 싶(은데)....... 그만 죽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살아 있”(38쪽)을 뿐이다. 이 때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도와주세요. 살인을 저지를 것 같아요. 수린이 죽어가요. 우리는 유령이 되고 있는 중이에요. 모두 죽어가요. 제발 와주세요.”(36쪽)


운명의 전조”(36쪽)인 편지 한 통에 이끌려 유경은 와이강으로 간다. 와이강도 유령의 시간이 진행되고 있다. 와이강의 딸 열다섯 살 수린이 죽어간다. 그 죽음을 막기 위해, 아니 그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수린의 어린 연인 열일곱 살 해울이 죽임과,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유경이 절규한다.


저 애를 좀 도와줘. 제발. 요나스!


우리는 유령이 되고 있는 중이에요.”(227쪽)


그러나 보라, 이 유령이 저 유령과 다름을. 갇힘을 깨고 유령이 달린다. 끊어짐을 부수고 유령이 손을 내민다. 멈춤을 무너뜨리고 유령이 흘러간다. 이 유령은 流령이고 저 유령은 幽령이다. 죽어가는 “수린에게서 물소리가 난다....... 강물의 본래 모습은 흐르는 것이지. 막혀 있는 것들은 썩는다....... 기억에 갇혀버리면 유령이 되지. 기억도 흘러야 한다. 나는 이제 흘러야 한다.......”(257쪽) 그렇다. 흘러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흘러서 살아야 한다.


고요의 터널을 빠져나오며 물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용조용 지저귀듯이 흘러나와 와이산과 와이강의 곳곳으로 스며들며 번져가는 물소리 속에서 유경이 말한다.


그렇지.......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258쪽)



3. [C: C'] 제2부 가면을 쓴 달: 제3부 붉은 물 자국


살고 싶은데 살아지지 않는다. 사람이고 싶은데 사람이 되지 못한다. 유령의 조건이다. 유령인 유경의 조건은 엄마 한지숙의 자살, 그보다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연인의 황망한 죽음이다. 행복과 사랑의 관건이던 두 사람을 잃고 “푸르스름”(67쪽)한 “가면을 쓴 것 같은 달”(85쪽)에 홀려 피에로는 떠돌고만 있다. “달로도 지구로도 돌아가지 못한다.”(84쪽)


살기 위해서, 유경이 아프고 또 아프게 바라보아야 할 것은 과거를 비추는, 유령의 후광인 푸르스름한 달이 아닌, 현재를 드러내는, 인간의 조건인 붉은 강물이다. 지저귀는 기계들로 파헤쳐져 와이강이 흘리는 피, 그 “붉은 물 자국”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한다.


토막 나고 파헤쳐지고 적출되는 와이강이 유경의 머릿속에서 유린, 구타, 강간, 폭행, 모멸, 증오, 살인 같은 단어들을 마구 끄집어내고 있다. 악몽 속에서 유경을 움켜잡은 억센 손아귀가 유경을 끌고 다니며 패대기치듯이, 무서운 말들이 서로 엉킨 채 피 흘리기 시작한다. 엄마를 짓밟으며 그 남자가 퍼붓던 온갖 더럽고 잔인한 말들이, 왜 이 강변에서, 왜 또 이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악령들처럼 달라붙는지. 공포가 밀려든다.”(129쪽)


그리고


죽여 버리고 싶다, 저 새끼. 그런 자기 마음이 무서워 유경은 오줌을 지린다.”(84쪽)


급기야


흰 유령이 또 하나 쓰러지는 것 같은데, 오줌을 지린 것처럼 유경은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84쪽)


그렇다. 이 비인간적 도발에 대한 적의, 즉 살의야말로 인간생명에 대한 결곡한 자세다. 그 결곡함은 날카로운 공포가 된다. 공포는 살아 있는 것의 축축하고 질펀한 몸 반응, 즉 아랫도리 젖음으로 나타난다. 아랫도리 젖음은 “공포를 직감한 존재들의 울음”(167쪽)이다, 눈물이다.


유경의 눈에 눈물이 고여 오기 시작한다.


꿈꾸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필요한 건 꿈이 아니라 행동이에요. 복수할 거예요.


그리고 유경의 몸이 발끝부터 떨려오기 시작한다. 별안간 해울이 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유경은 예감할 수 있었다. 맞닥뜨려야 할 순간이 오고 있다는 것을. 그 예감의 순간으로 오래 유랑한 바람이, 한 물방울이, 마침내 당도하고 있다는 것을.”(170쪽)


마침내


그리고....... 유경이 본다.


엽서의 맨 하단에 적힌 그의 이름.......


요나스 노드스트롬.


.......


“연우”


그랬다. 너였다. 이연우. 요나스 노드스트롬. 이리 와 봐. 요나스, 요나스, 요나스!

.......


어느 날 사라졌고 다시 돌아오지 못해 영영 길을 잃은 줄 알았던 이름이다. 가장 사랑하는 이름부터 차례로 지워나가 마침내는 유경 자신의 이름까지 지워지려 한 마지막 순간에 나타난 이름이다. 연우의 엽서 위로 유경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붉은 눈물 한 방울.


그토록 찾고 싶어 한 이름을 손에 쥐고 유경은....... 가만히 쓰러진다.”(171-172쪽)


그렇게 쓰러진 것은 유경의 유령이고, 그 유령의 시간이다. 그렇게 쓰러진 것은 유령의 조건인 가면을 쓴 푸르스름한 달이다. 이제 유경의 그 붉은 눈물 한 방울은 수린이 토해 낸 “붉은 흙탕물”(215쪽)로 이어진다. 해울의 젖은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흙탕물”(215쪽)로 이어진다. 이 붉은 생명 감각은 문득 이런 각성의 순간을 낳고야 만다.


그 때 유경은 처음으로 자신이 와이강의 미래를 걱정했다는 걸 깨닫는다.”(219쪽)


다!



0. 이것은 물이다


아마도 천 날 동안 김선우는 오감, 아니 제육감(第六感)까지 모두 일깨워 물과 마주하였을 것이다. 물의 모습을 보고, 물의 살갗을 만지고, 물의 냄새를 맡고, 물의 목소리를 듣고, 물의 맛을 마시고, 또한 설명할 길 없는 물의 기운을 느끼고....... 동시에 그 물이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물인, 무경계의 세계에서 노닐었을 것이다. 하여 자신이 물이고 물이 자신인 경지에 이르고야 펜을 일. 단. 놓았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돌아갑니다. 우리는 모두 돌아옵니다. 수많은 다른 모습들로.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여기로. 한 방울로부터 한 물방울에게로. 그렇게 우리는 오고 갑니다.”(261쪽)


이렇게 김선우는 수린이 되고 해울이 되고 엄마가 되고 요나스가 되고, 끝내 와이강이 된다. 이렇게 김선우는 내가 된다. 물론 또 이렇게 나는 김선우가 되고 와이강이 된다. 김선우는 시인으로서 문학을 통해 생명의 고통, 그에 대한 사랑을 고민한다. 나는 의자(醫者)로서 의학을 통해 생명의 고통, 그에 대한 치유를 고민한다. 특정 부류 인간의 무지, 탐욕, 폭력으로 강이, 물이 살해되는 현실에서 어떻게 의학을 세우고 치유를 펼쳐야 할까. 이미 파헤쳐졌고, 여전히 파헤쳐지고 있으며, 그 상태에 갇혀 붉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강에게, 물에게 나는 더 이상 “울지 않기 위해”(147쪽) 무엇을, 어찌 해야 할까.


소심한 소시민인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사. 실. 상. 없다. 파괴는 너무 크고 눈물은 너무 붉다. 지금 여기서 나는 문득 김선우의 또 다른 유경, 저 「캔들 플라워」의 지오를 떠올려본다.


"아무튼 지오가 본 청계천은 번듯하게 치장된 인공의 슬픔이 가득할 뿐 자연의 생기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 본 이후 무의식적으로 계속 청계천을 바라보는 걸 외면해 왔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물의 높이로 누워 있어보니까 청계천의 마음이 느껴졌다. 물이 살려고 하는 기척, 깊이깊이 호흡하며 살아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기척이 아프게 느껴지면서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길 없이 답답하게 가둬놓았지만 길 없는 그 길에서  뭔가 살 길을 모색하며 수로변의 풀들을 살리고  아주 작은 생명들을 살리기 시작하고 있는 청계천 물의 절박한 마음이 느껴져서 한없이 미안했다. 생명의 의지를 가진 물에게 함부로 "뭐야, 죽은 물이잖아?"라고 말해버린 게 너무 부끄러워서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캔들 플라워」270-271쪽)   

 

슬픔에, 길 없는 가둠에 일방적으로 제압당해서 놓친, 생명의 기척에 대한 감각을 가차 없이 되찾는, 저 부끄러운 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죽으라고 자신을 가둔 지옥에서 다른 생명을 살림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되 깨워 천국을 빚어가는 역설, 비대칭의 대칭이 부끄러운 마음을 되찾은 지오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다. 나, 오늘, 지오의 부끄러움으로 가만히 누워, 죽음 한가운데서 생명의 기척을 열어가는 저 강, 저 물의 마음으로 흘러가보리라. 와이강 편지에서 유경이 들은 연우의 목소리, 그 두 마디 말의 순서를 바꾸어 오늘과 내일의 강이, 물이 만나는 곳에 놓아두리라.


나는 고통스럽다.


나는 기쁘다.”(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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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에 시달리던 딸아이가 조금 여유를 찾은 듯 어제, 일요일 이른 밤 영화 한 편 예매를 해놓았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함께 영화를 보았습니다. <26년>.


개인적으로 저는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바른 인식 덕분에 70년대 중반학번으로서는 늦깎이로 삶의 방향을 바꾼 사람입니다. 하여 영화 시작 이전부터 뻐근하고 뜨거운 흉통이 제게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영화 중후반부부터는 신열이 온 몸을 휘감으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찰나, 특정 인간을 죽여야만 한다는 간절한 염원 때문에 두 손을 으스러지도록 맞잡은 생애 최초의 경험으로 빨려들고 말았습니다. 누군들, 가슴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이다 이내 단 하나의 비원(悲願)으로 비수 끝처럼 예리해진 생명 감각이 온 영혼을 정적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총성과 함께 칠흑이 된 화면이 뜬 바로 그 순간, 저는 냉정하게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영화 아닌 현실, 그것이 아닙니다. 염원 아닌 현실, 그것도 아닙니다. 오직, 있어야 하는데 있지 않은, 바로 그 현실입니다. 그 현실로 돌아오자 제 눈에는 전혀 다른 의미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영화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영화도 사회행위의 일부입니다. 그 사회행위는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의미와 재미가 어우러져 또 하나의 사회행위를 이끌어내기 마련입니다. <실미도>를 보십시오. <도가니>를 보십시오. 이제 <26년>의 차례가 아닐까요. 마지막 장면 그 젊은, 아니 어린 의경의 눈초리를 불씨로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해피엔딩 아닌 것이 퍽 다행스럽습니다. 해피엔딩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민중에게 허위의식을 심어줍니다. 현실이 그렇지 않음에 대하여 눈감게 만듭니다. 그렇게라도 위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위안은 중독일 따름입니다. 중독인 위안이 현실을 더욱 어둡게 합니다. 아프디 아프게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당하지 않습니다.


돌아와서 트위터에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5.18은 12.19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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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9 1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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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1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5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6 16: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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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물의 연인들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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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를 살아가는 醫者의 한 사람으로서 현재 의학이 지니고 있는 오류와 한계를 껴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고민을 담아 간결하게 21세기 의학론을 세 번에 나누어 썼습니다. 그 마지막 글이 하필 김선우의<물의 연인들>로 시작하여 끝을 맺었기에 여기에 실었습니다. 이 글 앞의 두 편 글은 http://bari_che.blog.me/에 실려 있습니다.

 

 

 

 

21세기 의학론: 인간과 자연의 아픔을 한꺼번에 보듬는다



나는 시인 김선우를 ‘천하시인(天下詩人)’이라 부릅니다. 그의 시(詩)가, 시심(詩心)이 내겐 천하이기 때문입니다. 그 천하시인 김선우가 최근 소설, ‘엄밀히는’ 소설-시 하나를 냈습니다, <물의 연인들>. 이 소설-시는 인간과 강(물(방울))이 이어져 있다는 도저한 미세 생명감각을 시적 감수성으로 빚어낸 절창입니다. 4대강사업으로 강(물(방울))이 죽어가는 모습에 충격을 받은 김선우가 자신의 충격, 즉 생명의 아픔과 슬픔, 그 상처(trauma)를, 그리고 어찌 할 것인가, 아니 어찌 할 수밖에 없나, 하는 고뇌를 살갑고도 깊게 가늘고도 넓게 펼쳐낸 영혼의 “타투”인 작품입니다. 김선우는 아파서 글을 썼고, 씀으로써 아픔을 견뎌냈습니다. 이 글은 필자(筆者)인 김선우의 고통이며 치유입니다. 나는 그 글의 속살을 어루만지며 김선우의 아픔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글은 의자(醫者)인 나의 고통이며 치유입니다. 김선우의 “물방울”과 나의 “물방울”은 이렇게 이어져 있습니다. 아니! 김선우의 “물방울”과 나의 “물방울”, 그리고 물방울(!)은 이렇게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합니다. 나는 김선우의 문학에 실려 물방울(!)에게 다다가고 물방울(!)이 됩니다. 마침내 물방울(!)입니다. 물방울(!), 바로 이것이 나의 21세기 의학론의 마지막 화두입니다. 물방울(!)로 대표되는, 인간을 둘러싼, 엄밀히는 품은, 인간의 존재 조건인 자연을 향하여 열린 의학이야말로 인간이 빚어내야 할 마지막 의학이라는 깨달음. 그 깨달음을 궁굴려 내 삶이 되게 하고 우리 모두의 삶이 되게 하는, 그 참다운 깨침. 그 깨침을 얻으려면 의학은 인간의 눈으로, 인간만을 들여다보는 울타리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종(種)적 배타성,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한 지금 인간이 맞닥뜨리고 있는 파멸 상황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상황을 만든 것이 바로 저 4대강사업처럼 인간의 탐욕을 위해 자연을 침습, 파괴, 수탈한 행위와 명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이 인간 위한답시고 자연을 괴롭힌 것이 도리어 인간 파멸이라는 최후 질병을 몰고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정녕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면 자연에 행한 침습, 파괴, 수탈을 멈추어야 합니다. 자연을 치유해야 합니다. 아니 자연이 스스로 치유해 나아가는 데 겸손하게 시중들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가 의학적 관점과 자세의 설 자리입니다. 인간 생명의 조건인 자연의 시선으로 질병과 치유를 바라보는 관점과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과 자연의 아픔을 한꺼번에 보듬는, 새로운, 최후의 의학이 가능합니다. 이 최후의 의학은 문명의 산물인 의학에서 문명을 비판하는 의학으로 차원을 높인, 의학의 의학, 곧 메타의학입니다. 메타의학의 감수성으로 서면, 김선우가 말한바, “목숨 가진 것들은 모두 눈물 냄새를 풍긴다.......”는 진실을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 눈물 냄새를 맡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김선우가 수없이 떠올린 ‘여리고 환한 목숨의 빛’이란 말을 가슴에 품어 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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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배웅하며


요즘 아이들 95%가 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를 혹시 접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이들이 욕하는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최근 청소년들과 상담치료를 하면서 알게 된 내용은 의자(醫者)로서, 아니 그 이상으로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고등학생끼리는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생끼리도 가입해서 활동하는 부모, 교사 욕하기 사이트 수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 작게는 몇 십 명 정도 크기에서 많게는 몇 천 명에 이르는 큰 것도 있다고 합니다. (2-3만 명 되는 것도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의 손 전화 단축키에 저장된 엄마, 아빠의 호칭부터 일단 욕으로 되어 있습니다. 회원끼리 대화할 때 엄마, 아빠라는 호칭을 써도 안 된다고 합니다. 부모 당사자가 이런 사실을 알면 큰 충격을 받을 테지만 저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럴만한 상황 그럴만한 시공간에서 일어난 지극히 자연스러운 증후라고 생각합니다.


욕의 표면에는 보통 분노와 경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와 경멸의 이면은 공포와 불안, 그리고 그 침전물인 우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결국 아이들의 욕은 이 사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사회 전반을 거머쥐고 있는, 특히 지배집단 어른들에 대한 공포와 불안, 그리고 우울의 감정을 담은 것입니다.


좀 더 명쾌하게 연결하지요. 아이들의 욕은 우울증의 대표 증상입니다! 아이들이 욕하는 문제를 성품이나 윤리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길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지금 아프다고 울부짖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최소한의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자, 어떻게 하시렵니까? 인제 아이들의 울부짖음에 어른이, 부모가, 엄마가 답을 할 차례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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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쌤, 엄마한테 꼭 말씀해주세요!



[질문]


저는 3~4년간 우울증을 앓아왔고, 지금은 우울증으로 인해 학업에 실패하고, 대학진학도 포기하고, 사람에 대한 기피현상이 심해져서 일반적이 사회생활이 힘들 정도입니다. 사람자체가 싫어 친구들과 연락을 끊은 지도 1달이 넘어가고, 가족들과의 상태는 우울증을 겪으며 급속히 나빠졌고, 저는 지금 가족들, 특히 엄마에 대한 많은 실망과 배신감들로 괴롭습니다.


자살충동을 자주 느끼고, 자살시도는 한번 있었고, 자살에 대한 생각들도 많이 합니다. 삶이 허무하기만 하고, 공허한 마음만 듭니다. 가끔은 세상 속에 있는 제가 투명한 막에 휩싸여 둥둥 떠다닌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인간이 작게 보이고, 저는 그보다 작게 보입니다. 열등감이나 외로움과 같은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들로 힘이 듭니다.


대학 진학을 다시 결심했지만 공부는 잘 되지 않고, 나아갈 방향도 잡지 못하겠습니다. 흥미가 있는 것도 없고, 절 그나마 오래 붙잡아 두는 것은 판타지, 무협 같은 소설이나 만화책 그리고 TV를 보는 것뿐입니다. 그것조차 좋아하는 감정보다는 지루하고, 재미없지만 그저 멍하게 보는 수준입니다. 이것조차 안하면 제가 정말 인간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요. 어느 것도 제게 긍정적인 마음이나 관심은 끌지 못하고, 그래서인지 꿈도 없습니다. 무언가를 시도해보려고 해도, 인간관계나 여러 능력 면에서 저는 너무 작아져서 생각에 그칠 뿐입니다. 갈수록 소심해지고, 신경질적이게 됩니다. 잘해나가고 싶지만, 사람들 말처럼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도움의 손길이 너무도 필요하지만 주위에는 그럴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병원에는 두 달 정도 다녔지만 의사선생님과 만나면 자꾸만 긴장을 하게 되고, 말을 잘 하지 못했었고, 여러 상황들로 상담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병원을 다니고 싶지만 가족 특히 엄마에게서 또다시 같은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 두려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엄마나 가족들은 제가 유별나다고 생각하고, 공부하기 싫어 핑계를 대는 거라 생각합니다. 저를 전혀 이해해 주지 못하고, 그런 가족들과 대화하는 것이 저에게는 상처일 뿐입니다.


지금 병원을 다닌다면 돈 때문에 가족들에게 말해야할 텐데, 아니 적어도 한사람에게는 말해야할 텐데 가족 중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습니다.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지켜질 보장도 없고요. 알바를 해서라도 병원비를 구하고 싶지만, 알바 할 때 부딪힐 사람들을 생각하면 포기하게 됩니다. 도움이 필요하지만 주위에는 그런 사람이 없고, 병원을 다니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주위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나아질 방법이 필요합니다. 가족들에게 알리는 게 가장 좋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에 갔었지만 부모님에 대한 제 실망만 커졌을 뿐입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가족들에게 알리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울증이란 병에서도, 그리고 제 인생에서도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답변]


1. 그야말로 사면초가시군요. 글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제 인생의 어떤 길목들과 겹쳐지는 바람에 가슴이 자꾸 가라앉는 걸 느꼈습니다. 이 상황에서 어떤 위로의 말이 귀에 들어 오겠습니까만 그래도 곁에 계신다면 등 한 번 따스하게 도닥여 드리고 싶은 마음은 꼭 전하고자 합니다.


2. 지금 상태를 이론이든 임상사례든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그닥 마땅해 보이지 않네요. 스스로 아시는 바대로 깊이 있는 대화/상담치료와 약물치료를 시급히 받으셔야 합니다. 이런 때일수록 판단은 간결하게 하셔야 해요. 이것저것 고려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핵심 하나만 붙잡으세요. 우울증에 사로잡힌 자신의 생명을 구출하는 일밖에 달리 선택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돈 걱정하다가 생명 놓치는 일을 선택하실 것입니까? 아직은 이 땅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 속에 의사도 있는 법입니다. 돈 없다면 치료 안 하겠다는 의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3. 용기를 내셔서 직접 연락을 주시면 좋겠군요. 도와드릴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사시는 곳이 어딘지 등 상세한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제 안타까움도 막연할 수밖에 없거든요. 자, 일단 그 힘부터 내 보세요. 홧팅!


[두 번째 질문]


안녕하세요. 답변을 읽기 전까지 많은 망설임 끝에 읽고, 또 이런 글을 쓰기까지 한 10번은 썼다 지웠다....... 반복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글이 안 써지는지.......


저는 돈이 아깝다거나, 돈이 아까워 치료를 받지 않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절대 해본 적이 없습니다. 상담하는 일이라고 해도 될까요? 그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짐작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제 상황에는 치료가 필요하다는 걸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 자신이 느끼고도 있고, 그 치료에 응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제 자신도 진지하고 끈기 있게 치료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돈이 없어 걱정하는 게 맞지만 뭐랄까....... 돈 구할 데는 있지만 뭐든 하기 전에 숨이 턱 막힌다는 게 문제이지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알바를 하거나,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거나 가족 중 누구 한사람에게라도 말하여 금전적 지원을 받는 것....... 셋 다 딱 이거다 마음 내켜 할 만한 게 없고, 그나마 알바가 차라리 낫지만....... 이 생각 저 생각 안하려 해도 망설여지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저는 조그만 거에도 상처받고, 또 그 상처받는 거에도 스트레스 받고, 그 스트레스 받는 것에 또 제 자신에게 실망하고....... 그렇게 진행될 것들이 눈앞을 스치니 깜깜하기만 합니다.


저는 **에 살고 있고, 작년까지는 고2때부터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서울에는 친 언니, 오빠가 있어서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았는데 외지 살다보니 건강도 나빠지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다시 **로 온 것입니다.


직접 연락한다는 것이 전화말씀이신지? 02-***-**** 이리로 하면 되나요? 선생님이 직접 받으시나요? 아니면 간호사 언니들이.......?


오늘 따라 말투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제가 느끼기로 공격적인 것도 같고....... 왜이런지 잘 모르겠지만 혹시 선생님도 그렇게 느끼셔서 기분이 상하시지는 않을지 걱정이네요.


[두 번째 답변]


1. 그렇게 망설이면서도 글을 쓰고, 또 읽으시는 일 자체로 이미 치유의 길에 들어서신 것입니다. 우선 그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격려하시면 내면의 힘이 생길 것입니다. 조금 더 용기를 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를 향해 글을 쓰고, 또 그 상대방의 글을 읽는 일,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어려워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많이 망설이고, 또 고치고.......그럽니다. 무슨 일이든 시작할 때 숨 막히고 가슴 조이며 오만 생각 다 하게 되는 거, 웬만한 사람들 다 그래요.


자, 일단 심호흡 한 번 하세요.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세요. 저 많은 사람들이 **님보다 훨씬 강하고 유능하고 행복해 보이겠지만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을 테지요. 중요한 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입니다.


물론, 고통은, 당하는 사람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법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예민하고, 힘들고, 숨 막히는 느낌이 들게 되었는지 연유를 잘 생각해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직시함으로써 문제는 해결을 향하여 본격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2. 스스로 공격적이 된 사실을 알아차리신 것도 훌륭해요. 하지만 대뜸 상대방 걱정으로 넘어간 대목이 문제네요. 왜냐하면 상대방도 자신처럼 상처 받지나 않을까, 사실상은 그랬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돈 이야기를 꺼낸 것은 결코 **님이 돈 아끼느라 치료를 안 받으시려 한다거나, 돈 안 내고 어디 치료 받을 데 없나 두리번거린다는 의미에서가 아니었습니다. 전체 문맥을 살피면 능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님이 스스로 공격적이라고 느끼실 만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신 것은 상대방의 현실적인 배려를 나름대로 공격으로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반응은 약도 되고 독도 됩니다. 약이 되도록 하는 게 우리 공통 목표 맞지요?


그럼, 아시는 바, 그 번호로 전화를 주세요. 제가 드릴 수도 있지만 스스로 전화하시는 것 자체도 하나의 치유행동이며, 성숙한 사회행동이기 때문에 그리 권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면 간호사가 그 즉시 저를 바꿔 줄 겁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그 때 나누기로 하지요. 힘!


2008년 초, 이 소녀와 실제로 만나 밥까지 먹여가며 하는 무료 상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뒤 몇 차례 이메일을 주고받았지요. 그러나 획기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바로 엄마, 다른 하나는 돈. 바로 이게 우리사회의 좌우 아킬레스건입니다. 그중에서도 우선은 엄마.


사회적, 경제적 자립이 되지 않은 아이들에게 엄마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우주 자체지요. 엄마가 앞장서면 모든 길이 열립니다. 엄마가 가로막으면 모든 길이 닫힙니다. 이 소녀 가슴에는 분명히 이런 소원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제발, 우리 엄마가 제 상황을 꼭 알았으면 해요! 그런데 상황은 뒤집혀 있습니다. 2010년 벽두에 13살짜리 소녀하고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질문]


안녕하세요아직13살인데이런글올려도될지모르겠네요

마음상담실이라고해서올리는건데요

친구들이다들절싫어해요왕따는아니구요그냥대놓고

제가싫다고말하네요그리고엄마도많이아프세요

엄마가혼자일하세요왜냐면부모님이이혼했거든요

저정말마음도아프고힘드네요

친구들은저정말많이싫어하구요저이제중학교올라가는데요

입학식날친구들이절어떻게볼지걱정되네요

방금도많이울었어요엄마아픈것만생각하면진짜눈물나구요

친구들도절싫어하구요어떻해야되죠위로말씀듣고싶네요

정말자기전에안우는날이없습니다힘드네요


[답변]


1. 13살 소녀도 인격이며 생명입니다. 아플 수 있습니다. 위로 받을 권리도 있습니다. 이렇게 온라인으로나마 도움을 청해주셔서 고마워요. 그 용기와 진정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2. 부모의 이혼에 따른 상처, 어머니에 대한 걱정, 그리고 친구들 때문에 느끼는 소외감....... 누군가 감싸주지 않으면 홀로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군요. 우선 무조건의 위로를 전합니다. 다만 섣부른 격려는 일단 보류하지요. 이 상황에서 힘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부추김인지 잘 아는 까닭입니다.


그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 한 가지만 쉽게 말씀드려 볼까 해요. 이렇게 글을 쓰신 것처럼 되풀이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도록 하세요. "나 아파, 나 슬퍼, 나 외로워!"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듣고 스스로 고개를 끄덕여주세요. 아플만하고 슬플만하고 외로울만하다고 스스로 지지해주세요.


아파해선 안 돼, 슬퍼해선 안 돼, 외로워해선 안 돼, 이러지 마세요. 아니, 나 인제 안 아파, 안 슬퍼, 안 외로워, 이러진 더더욱 마세요. 부정하고 외면할수록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은 더 깊어지기 때문이지요. 따뜻하게 자신의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을 안아주고 다독여주세요.


부정하고 외면하는 것은 상처에 대하여 병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것은 치유를 위해 감응하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표현이죠?^^ 하지만 무슨 뜻으로 드리는 말씀인지 알아차릴 수 있죠?^^ 좋아요! 일단 이렇게만 하더라도 마음의 힘이 조금씩 생긴답니다.


3. 오늘은 요기까지. 다시 한 번 위로의 마음을 전해드려요. 쌤이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럼.......^^


13세 초등학생 소녀가 아픈 엄마를 진심으로 걱정합니다. 그래서 눈물 흘립니다. 자기 자신의 우울증을 의심하면서도 엄마를 살피는 마음이 제 온 영혼을 적셔 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 긴 제 임상 기간 동안 딸이나 아들을 위해 이렇게 간절한 마음을 전해 온 엄마가 전혀 없었다는 기억이 새삼 저를 전율하게 합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도대체 어찌하여 우리가 이런 삶을 살게 된 걸까요?


물론 엄마들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갈 일, 아닙니다. 아니 엄마들이 더 힘들겠지요. 그들이 산 세월, 얼마나 신산했는지 모르는 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 또한 어디선가 흘러왔을 것입니다. 책임이 있다 해도 온통 뒤집어씌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각성은 고통을 겪은 자에게서 먼저 일어나는 법입니다. 먼저 각성한 자가 먼저 길을 여는 것, 또한 이치입니다. 엄마들의 각성은 잘못한 것에 대한 윤리적 책임 때문이 아니라 왜곡되고 억압된 자신과 자녀의 영혼을 본디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생명적 의무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마들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진실을 보아야만 합니다. 내 자식이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내 자식이 발달불균형 상태에 처해 있습니다. 내 자식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의 핵심에는 사회 체제가 있습니다. 이 사회 체제를 주도하고 있는 헤게모니 블록을 상대로 내가, 이 엄마가 싸워야 합니다. 혼자서는 안 됩니다. 연대해야 합니다. 생명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들이 죽어가면서 사무치게 엄마를 부르고 있습니다. 절통한 마음으로 제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쌤, 엄마한테 꼭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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