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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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아직 설정되지 않아서 주체가 법을 설정해야만 하는 경우가 도착증이다. 그들은 법을 자유롭게 위반하는 자가 아니라 법을 설정하기 위해 애쓰는 자들이다.(206쪽)

 

‘나는 나’라는 완강한 자기 동일성이 있는 곳에서 주체에 대한 물음은 없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치명적인 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현실이 전반적으로 가상화(virtualization)되면서 실재(the Real)에 대한 열망은 강해졌고 그것은 도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사라져가는 ‘나’를 확인해야 했고 구별되지 않는 ‘나’를 증명해야만 했을 것이다.·······‘나’를 말할 수 없다는 불가능의 상황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210-211쪽)

 

 

도착倒錯이란 일반적으로 ‘뒤바뀌어 거꾸로 된 상태’를 뜻합니다. 좀 더 세밀히 사전적 의미를 구성하면 ‘본능이나 감정 또는 덕성의 이상異常으로 사회나 도덕에 어그러진 행동을 나타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정신의학적으로는 성性도착을 가리킵니다. 핵심은 ‘정상을 벗어남’ 그것입니다.

 

무엇이 정상일까요? 우리가 대개는 아무 성찰 없이 정상이다, 이상이다, 하지만 사실 그 개념의 대부분은 근거가 없습니다. 심지어 과학이나 의학의 옷을 입고 진리처럼 존중 받고 있는 정상·이상 개념조차도 우스꽝스러운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혈압 이야기를 예로 들어볼까요.

 

수축기 혈압 120mmHg 미만이고 확장기 혈압 80mmHg 미만-정상혈압

수축기 혈압 120~139mmHg이거나 확장기 혈압 80~89mmHg-고혈압 전 단계

수축기 혈압 140~159mmHg이거나 확장기 혈압 90~99mmHg-1기 고혈압

수축기 혈압 160mmHg 이상이거나 확장기 혈압 100mmHg 이상-2기 고혈압

 

이 기준은 대체 누가 무엇에 근거하여 만들었을까요?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종족·연령·남녀·나이와 같은 개인차가 분명히 존재할 터인데 대체 누구를 기준으로 만든 것일까요? 이런 기계적 수치 기준을 근거로 정상·이상을 구별하는 것이 과연 정상일까요? 이 기준은 다국적 제약회사의 로비가 만들어낸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머지않아 수축기 혈압 110mmHg 미만이고 확장기 혈압 70mmHg 미만을 정상혈압이라 할 것입니다.

 

정상 여부는 질병 유무로 직결되고 그것은 다시 생사 문제로 이어집니다. 이런 사안에서부터 ‘이야기’ 수준의 거짓 기준이 군림하기 시작하여 정치경제적·사회역사적 거대 담론으로까지 ‘이야기’의 폐해는 확산됩니다. 한 공동체의 도덕성이 해이 정도와 그 ‘이야기’ 지배 정도는 정비례할 것입니다.

 

우리사회의 경우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거짓말이 분명한 ‘이야기’를 헌법기관이 대놓고, 공적으로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지경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유언비어는 헌법기관이 퍼뜨리는데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허위사실 유포라며 잡아들이는 일은 이미 흔한 풍경이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진실, 그것도 치명적인 진실이 실종된 자리에서 주물鑄物로 태어나는 ‘정상적인’ 나는 곡절의 여부와 상관없이 도착적입니다. 이 진실을 깨달은 사람이 스스로 그 도착적 상태를 벗어나고자 애쓸 때, 이를 도리어 ‘도착적’이라 합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그러니까, 그 ‘도착적’인 애씀을 당당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도착倒錯을 통해서만 도착到着할 수 있는 도저到底함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시방 “도착증을 실연(實演)하면서 도착증과 실연(失戀)하는 것”(211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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