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의 에티카 - 신형철 평론집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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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가 자연을 소비하는 것은 서정적 자아가 타자를 타인으로 소화하는 메커니즘의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르시시즘적인 자아의 (시적) 권력이 완고하게 유지되는 한 타자의 타인화, 자연의 가상화는 연쇄적으로 발생할 것이다.·······자연을 통해 상처를 서정적으로 치유하는 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허위적이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의 덧남으로서 존재할 때, 즉 존재의 상처를 보편적인 것으로 일반화하지 않고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외상(外傷)적 기억으로 특수화하는 데 기여할 때 자연은 윤리적일 수 있다.·······자연을·······주체라는 미지의 장소를 환기하고 타자성의 심연을 가시화하는 어떤 영역, 그래서 자아의 자기 동일성과 타인과의 허위적인 소통을 추문으로 만드는 어떤 영역, 진정한 윤리가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상처의 영역으로 남겨두자·······말하자면, “어쩔 수가 없는” 영역으로 말이다.(198-201쪽. 괄호 처리-인용자)

 

여름휴가철이 절정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정뜨게 돈푼깨나 있는 사람 중에는 고급 호텔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한 모양이지만, 열에 아홉은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휴가를 떠납니다. 아니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치유하러 간다고 까지 말합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자연을 휴식과 치유의 공간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이런 생각은 그 생산이 대부분 도시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종의 착각일는지도 모릅니다. 산이 강이 바다가 고된 노동의 현장인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궁벽한 향촌의 가난과 옹색함에 신물 난 사람한테는 도시의 편리함과 쾌적함이 도리어 휴식이고 치유일 것입니다. 산이 강이 바다가 그 자체로 하필 인간에게 휴식과 치유를 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산이다 강이다 바다다 하는 자연을 치유 근거로 삼는 저 통속한 서정은 확실히 자기 기만적이고 허위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정치경제적 사회역사적 소요騷擾에서 도망쳐 자연을 소요逍遙할 때 얻어지는 안온을 치유라고 한다면 이 가능성은 100%입니다. 여태껏 소비되어 온 자연은 이런 의미의 자연입니다.

 

이 자연은 극단화된 자연입니다. 자아가 단일화/동일화한 타인의 연장선상에 있는 자연이 그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비화/신성화한 자연입니다. 이 극단은 얼핏 보면 마주보고 있는 대극對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연을 도구로 만들어 자아에게 ‘포갠’ 것이므로 같은 자아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구입니다. 자연은 인간과 완전히 포개지지 않습니다. 실제 대극은 자연을 해체하여 인간과 소외/절연시키는 태도입니다. 자연과 인간 사이를 완전히 ‘쪼갠’ 것입니다. 이 또한 허구입니다. 자연은 인간과 완전히 쪼개지지 않습니다.

 

자연은 자아와 타인의 맺힘에서 주체와 타자의 풀림으로 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조건 또는 장場으로 존재합니다. 조건 또는 장으로서 자연은 당사자도 아니고 기계적 수단도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조건 또는 장으로서 자연은 당사자 ‘사이’에 서 있습니다. 아니, ‘사이’입니다. ‘틈’입니다. 이 사이/틈이라는 시공에서 천변만화의 사건/운동이 일어납니다. 사건/운동이 없으면 삶은 없습니다. 삶이 있는 한 자연은 자아/주체, 타인/타자의 당사자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는” 영역입니다. 이 어쩔 수가 없는 영역인 자연에서 “주체라는 미지의 장소를 환기하고 타자성의 심연을 가시화하는·······그래서 자아의 자기 동일성과 타인과의 허위적인 소통을 추문으로 만드는·······진정한 윤리가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상처”의 사건/운동이 일어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 서정입니다.

 

참 서정은 예쁘지 않습니다. 미움을 안고 있습니다. 참 서정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추함을 품고 있습니다. 참 서정은 역설입니다. 역설은 고정된 상태가 아닙니다. 경지가 아닙니다. 늘 움직입니다. 동사입니다. 동사로서 참 서정은 치유(나음) 또는 성장(자람)의 도정道程 자체입니다. 그 도정이 풍기는 냄새며 빛이며 소리며 맛이며 닿음이 참 서정입니다. 냄새며 빛이며 소리며 맛이며 닿음으로서 서정은 상처를 정확히, 남김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러니까 참 서정은 진실의 다른 이름입니다.

 

 

555명(2014.5.17.안행부 중대본 허위 발표)의 잠수요원을 동원하고도 300명의 국민을 바다에 빠뜨려 죽인 진실 밝히기를 거부한 국가수장이 여의도 한 영화관에서 「명량」을 보았다고 합니다. “충성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며 12척의 전함으로 300척 왜군 전함을 격파한 이순신의 언행을 그는 어찌 새겼을까요. 아마도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며 감격에 겨워했을 것입니다. 팽목 앞바다, 저 자연, 우리에게 과연 윤리적일까요. 이렇게 비극은 깊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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