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세계 - 뇌과학자가 전하는 가장 단순한 운동의 경이로움
셰인 오마라 지음, 구희성 옮김 / 미래의창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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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립보행은 곧추서서 옮겨가는 일이다. 곧추서기와 옮겨가기 가운데 무엇이 핵심일까? 곧추서기다. 다른 모든 동물도 옮겨가지만 내내 곧추서서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곧추서기는 인간 조상이 수관을 니치niche로 삼은 데서 출발한다. 인간이 곧추서는 일에서 나무는 단순한 조건이나 수단이 아니다. 나무야말로 곧추서기 DNA 발원지 아닌가. 더군다나 심지어 나무는 옮겨가기까지 한다. 인간 직립보행은 나무 본성에서 왔다고 차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걷기는 우리 유구한 진화사적 과거에서 시작되었지만, 우리 미래이기도 하다.”(241)


저자가 여기에서도 끝내 걷기를 도구 차원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는 그 생각에 반대하기보다 관통하기로 한다. 걷기는 인간 목적이며 목표로서 미래다. 그 미래는 무리 짓기, 그러니까 공동체 네트워킹이다. 공동체 네트워킹은 식물 방식이다. 식물 방식은 패자 윤리학이다. 패자 윤리학은 평범하고 평등한 생명이 상호소통함으로써 공존공영하는 화쟁 존재론을 구현한다. 화쟁 존재는 혹시 우주가 소멸한다면 그 뒤에도 잔향으로 남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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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방식 - 서로 기여하고 번영하는 삶에 관하여
베론다 L. 몽고메리 지음, 정서진 옮김 / 이상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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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을 변화시키는 잠재력을 지닌 식물 사이에서 보이는 협력 행동 가운데 군집swarming 현상이 있다. 군집은 별개 개체 간 상호작용에 기반한 공동체 행동 형태로서 작은 상호작용을 통해 복잡한 패턴을 형성하는 비상 전략이다. 이 현상은 다수 개체가 모두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간에 같은 방향으로 더불어 움직일 때 발생하는데, 능동 군집은 외부 힘 탓이 아니라 스스로 형성된다.......

  누구도 식물에서 무리 짓는 행동을 발견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식물은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식물은 실제로 움직인다. 2012년 생장하는 식물 뿌리가 활발하게 군집을 이룬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뿌리가 무리 짓는 일은 공동체 새로운 전략으로서 영양소를 분해하거나 곰팡이, 박테리아 같은 다른 생명체와 공생할 때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데도 참여한다. (113~115)

 

  인간 생태에 변화를 촉진하려면 식물이 생태계 천이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은 능력 필요하다. 인간 제도, 즉 생태계에서 문화적 변화를 이끄는 유능한 초기 리더는 선구자로서 기능한다.......

  선구자가 꾀하는 변화 목표는 많은 경우 초기에 혼돈 시기를 거쳐야 한다. 특정 생태계를 관리하기 위해 계획한 불놓기가 필요하듯, 고착된 패턴이나 현상 유지 행동을 잘라내고 변화된 결실을 향해 의도적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계획한 혼돈이 인간 생태계에도 필요할 수 있다. (116~117)

 

누군가 이제 인류에게 공동체는 사라지고 사회만 남았다고 말했다. 사회는 있을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할 때, 그 사회가 다만 개인 집합이 아닌 한, 사회도 껍데기뿐인 상황이 아닌지. 자본이 신자유주의 람보르기니 타고 달리는 세상에서 각자도생으로 내몰리는 절대다수 인민에게 이미 사회라는 말조차 허구가 아닌지. 공동체 또는 사회를 가장한 인간 집단, 정확히는 극소수 과두 집단이 인류는 물론 지구생태계 전체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상황이므로 공동체 내러티브를 재창조해야 할 역설 카이로스가 아닌지.

 

오늘 여기서도 승자 필멸 패자 필생이라는 역사적 진실은 가차 없이 진리다. 승자는 강해서 무리 짓지 않으므로 사라지고, 패자는 약해서 무리 지으므로 살아남는다. 사라질 승자가 접어버린 공동체를 다시 펴면 저들의 물귀신 전략에 당하지 않고 패자는 살아남는다. 공동체 재건은 비상 전략이다. 매끈한 본성 문제로 인식할 일이 아니다. 사회·역사적 책무, 그러니까 오늘 여기서 직면한 자가 천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다. “고착된 패턴이나 현상 유지 행동을 잘라내고 변화된 결실을 향해 의도적으로 옮겨가기를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변화는 혼돈이라는 외길을 걸어 들어온다. “의도적변화는 계획한혼돈이라는 외길을 걸어 들어온다. 현재 고착된 패턴이나 현상 유지 행동을 그대로 놔두면 인류와 지구생태계가 겪을 혼돈이 너무나 커서 대 멸절은 필연이다. 그 파국을 막기 위해 혼돈을 계획한다. 계획한 혼돈은 파국보다 한발 앞서 군집 지성을 깨운다. 깨어난 군집 지성이 바로 개체 사이에서 온전하게 일어나는 네트워킹이다. 이 네트워킹 원리와 능력을 구현하는 DNA가 발원한 곳이 다름 아닌 숲이다. 숲이 아득한 옛날부터 실행해온 천이가 모름지기 그 본진이다.

 

천이를 선두에서 이끄는 낭·풀을 선구자 또는 개척자pioneer라 한다. 버드나무나 콩과식물이 대표적인 선구자다. 선구자는 곰팡이 같은 다른 생명과 공생하여 토양 생태계 전체에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다른 낭·풀이 들어와 더불어 살 수 있는 환경이 되게 한다. 그리고 표표히 떠난다. 개척, 공존, 희생(방하放下)이 선구자 낭·풀 본성이다. 이 선구자 본성을 생명 본성으로 삼아 마지막 삶 풍경을 그려 나아가고자 내가 지은 알라딘 서재 이름이 싸리·버들 글숲이다. 내가 계획한 혼돈을 기꺼이 겪을 인연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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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7-21 1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하루만에 매미가 저렇게 되는건가요? 안 그래도 요즘 창만 열면 말매미 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운지....예전의 참매미들은 다 어디 갔을까요? ㅠㅠ

bari_che 2022-07-22 08:50   좋아요 1 | URL
애벌레가 땅속에서 나와 허물 벗고 날개 달린 성체가 되기까지 대략 12~13시간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는 동안 포식자 눈에 띄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주위 조건에 상응해야 하니까 위 사진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절묘한 모습을 취합니다. 그러나 아래 사진처럼 탈피각은 이제 그럴 필요가 없지요. 선명한 대조로 눈에 잘 띄어도 이미 과거지사니까요.^^

아, 바람돌이 님 살고 게신 곳은 그런가요? 제 한의원 있는 동네는 아침에 참매미 소리부터 들립니다. ㅎ
 
걷기의 세계 - 뇌과학자가 전하는 가장 단순한 운동의 경이로움
셰인 오마라 지음, 구희성 옮김 / 미래의창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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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재론적 걷기를 거듭거듭 말하는 이유는 걷기가 어떤 다른 목적에 이용되는 도구로나 여겨지는 현실이 참담해서다. 걷기의 세계도 이 통속한 현실에 몸을 무겁게 담그고 있다. 희망 한 가닥 품어볼 만한 부분이라면 고작 이 정도다.

 

문제 해결에 대한 답을 반드시 얻어야겠다는 기대 없이 걸어라. 대신 걷기 자체 즐거움을 위해, 또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즐거움 자체를 위해 걸어라.”(213)

 

걸으면 즐거워지니까 걷는다면 이 또한 다른 목적일 수밖에 없다. 걷기 본성이 즐거움이다. 이 즐거움을 엄밀하게 표현하면 경이로움이다. 경이로운 이유는 걷기가 찰나마다 창발이기 때문이다. 창발이 지닌 경이로움은 영적이다. 영적 즐거움을 일으키는 네트워킹, 바로 그 걷기가 인간 본성이다. 본성을 도구로 전락시킨 유일한 종이 인간이다. 그러니 전복은 불가결이다.

 

인간은 몸과 뇌를 치유하기 위해, 창의적으로 사고하기 위해 걷기를 도구 삼아 진화하지 않았다. 거꾸로다. 걷기 위해, 더 잘 걷기 위해 인간은 몸과 뇌를 네트워킹 체계로 진화시켰다. 대체 이 이치가 그토록 심오하고 복잡한가. 아님에도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이 한사코 걷기를 도구화하는 까닭은 걷기 자체가 아름답거나 가치 있는 무엇을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긍정적 뉘앙스로 표현했지만, 기껏해야 걷기는 활동적인 나태함”(196)일 뿐이다. 활동적인 나태함으로 대뇌 중심주의에 봉사할 따름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수많은 사람이 건강에 좋다니까, 두뇌활동에 좋다니까 걷는다. 그런 걷기는 트레드밀 걷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트레드밀 걷기는 형벌이다. 형벌 걷기 하는 사람을 걷는 인간homo ambultus라 하지 않는다. homo ambultus는 걷기 자체가 목적인, 천명인, 본성인 사람이다. 이 각성이 한꺼번에 일어날 때가 임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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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의 생명사 - 38억 년 생명의 역사에서 살아남은 것은 항상 패자였다! 이나가키 히데히로 생존 전략 3부작 3
이나가키 히데히로 지음, 박유미 옮김, 장수철 감수 / 더숲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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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치열한 경쟁 끝에 공존의 길을 찾아내 다른 생물과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경쟁하기보다 서로 도와야 살아남을 수 있다.” 치열한 자연에서 속씨식물이 내린 결론이다. 서로 돕는 공생관계를 위해 속씨식물은 무엇을 했을까. 곤충에게 꽃가루를 주고 꿀을 주었다. 새들에게는 달콤한 열매를 준비했다. 자기 이익보다 먼저 상대방 이익을 위해 베풀어주는 일이 바로 공생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방법이다.

  신약성서에 이런 말이 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리라.” 이 말을 설파한 예수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 아득히 먼 옛날, 속씨식물은 이미 이 경지를 넘어서 있었다. (패자의 생명사165~166)

 

서로 돕는다느니, 심지어 먼저 베풀어준다느니 하는 표현은 인간에게나 해당한다고 생각하므로 식물이 그런다고 하면 우리는 으레 수사학 수준으로 치부한다. 더군다나 기독교도라면 예수보다 속씨식물을 높이는 이런 말에 실재성을 부여할 리 만무다. 이미 너무 진부한 진실이어서 거듭하기 뭣한 말이지만, 이런 태도는 오만도 아니고 그냥 치기puerility일 따름이다.

 

서로 돕고, 먼저 베푸는 일을 통속윤리 맥락에서 읽으면 인간적인 미덕으로 들린다. 윤리를 생존하기 위한 수리數理로 이해할 때 비로소 패자 미학에 깃들 수 있다. 서로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결핍, 기다리고만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곤경에 내몰린 생명이 결단하는 결곡하고 곡진한 행위가 이 말고 달리 있겠는가. 참 생명윤리는 인간 이전에 이미 엄존하고 있었다.

 

인간 이전 참 생명윤리는 자연Sein과 당위Sollen 사이 간극이 없다. 정신과 신체, 이론과 실천 사이 괴리도 없다. 정신이 과잉 진화한 인간만이 이 간극과 괴리를 떠안고 있다. 그래서 명령이 필요하다: “주라”. 심지어 보장도 필요하다: “주리라”. 이 예수 명령을 옹글게 따를 때만 인간은 식물 생명윤리 경지에 온전히 오를 수 있다. 어찌하면 옹글게 따를 수 있는가?

 

패자 정체성을 찐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여야 한다. 진화 정점이니 만물 영장이니 하느님 형상이니 하는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류는 패자로서 수관tree crown으로 쫓겨나 생존하는 동안 나무 덕분에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직립보행은 축복이어서 저주가 되었다. 공생을 팽개치고 말았으니 말이다. 외길은 나무, 즉 속씨식물로 열린다. 거기가 에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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