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두구의 저주 -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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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정복자들이 스스로가 한 부족을 말살할 권리를 가진다고 생각했다면, 서구 제국주의 교리가 실제 그 방향으로 전진해왔기 때문이다. 철학자면서 과학자고 잉글랜드 대법관(총리)을 지낸 정치인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 저서에 이 교리를 명확히 제시해 놓았다.···성전에 관한 공시에서 베이컨은 서구 기독교도가 특정 집단을 말살하는 일이 왜 합법적인지 그 까닭을 소상히 나열했다.···이 교리는 18세기 말 국제법을 성문화한 스위스 법학자 에메르 드 바텔에 의해 공식화됐다.···

  이 교리는 서구 기독교도에게 그들 눈에 잘못됐거나 괴물처럼 보이는 인종을 공격하고 말살할 수 있는 사실상 천부적 권력을 부여했다.···

  베이컨 이론은 낡은 듯 보이지만, 오늘날까지도 제국주의 작동 방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근본적으로 그는 잘 통치되는 국가는 뒤떨어지고” “자연법과 국제법을 위반하는 국가들을 침략할 수 있는 절대권을 가진다고 주장한 셈이다. 물론 이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의 근본 교리로서, 최근 수십 년 동안 서구 열강이 일으켰던 골라 벌이는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속해서 인용됐다.(39~41)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시아 동쪽 끝 우리에게조차 익숙한, 심지어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 한마디만으로 존경도 받는 인물이다. 게다가 네 우상 이론, 귀납법 이야기를 보태면 제법 근거가 두둑해진다. 급기야 근대 과학의 순교자라는 찬사까지 붙으면 꼭 기려야 할 인물로 새겨진다. 그 프랜시스 베이컨이 서구 제국주의 원조 논객이라는 사실을 처음 대했을 때, 나는 그 자체가 충격이라기보다 비단 프랜시스 베이컨뿐만 아니라 걸출한 서구 지식인 대부분이 제국주의 앞잡이거나 뒷배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부터 들어서 소름이 돋았다. 문학·미술·음악가를 포함한 서구 문화 뭇별들이 제국주의 단물 또는 떡고물을 받아먹으며 빚어낸 영광이 오늘날 지정학적 차별을 낳았다는 생각으로 번지자 가차 없는 허망함과 슬픔이 몰려들었다. 물론 이 생각과 감정은 지나치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경험한 인간 본성, 그 생태학은 이 치우침이 정반대 치우침을 깨닫게 하는 데 필수불가결하다고 말해준다. 식민지를 겪은, 여전히 그 후기구조 아래 놓인 국가나 부족 사람들은 이 날카롭고도 묵직한 치우침 세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제 삶에 어둠이 드리워진 사실과 그 곡절을 모르고 한 생을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큰 저주인가. 저주에서 벗어나려 고통으로 향한다.

 

우리가 직면하는 고통은 프랜시스 베이컨 너머에 그 근원이 닿아 있으니, 바로 서구 기독교다. 제국주의 정복 행진 선두에는 선교사가 있었으며 후미에는 성서가 있었다. 성서는 비기독교도 이방인을 말살할 절대 권한으로 후원했다. 그래서 그 살육행위는 성전이 되었다. 성전이기 때문에 죄책감 전혀 가지지 않고 더없이 잔혹하게 죽여서 가죽을 벗기고 시신을 우물 속에 쑤셔 박을 수 있었다. 서구 기독교가 이 역사적 문제를 옹글게 인식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했는지, 현재 자행되고 있는 성전을 반대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일부 기독교도가 그럴는지는 모르지만, 기독교 교리나 구조상 그런/그럴 일은 없어 보인다. 설혹 이 제국주의 전쟁이 끝난다 해도 서구 기독교는 또 다른 형태로 제국주의를 선동하고 후원하리라 본다. 서구 기독교는 타자를 악마화하고 박멸하는 일극 집중 구조 재생산 프레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제국주의는 기독교 번역본이다. 이 논리로 미리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번역본이다. 이 논리로 또다시 미리 말하자면 서구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번역본이다. 오늘날 지구 위기에서 서구 민주주의가 무력한 까닭은 기독교와 형용 모순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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