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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두구의 저주 -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2년 12월
평점 :
향신료에 따르는 금전적 이득은 천문학적이어서 때로 항해에 쏟아부은 초기 투자금 4배를 웃돌 정도였다. 이 수익은 나중에 네덜란드 황금기로 알려진 17세기에 그 나라에서 미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도록 뒷배 노릇을 했다. 향신료는 이따금 당대 미술 작품, 특히 엄청난 인기를 누린 회화 장르인 ‘정물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먹을 수 있게 준비된 말 없는 식품 집합”을 화폭에 담는 정물화는 ‘자연’을 거대 비활성 자원 덩어리로 바라보는 식민지 시선-그 장르에 붙은 프랑스 이름 나튀르 모르트(Nature Morte 죽은 자연)를 통해 한층 더 명확해지는 틀 짓기-을 완벽하게 반영한다.
이처럼 자연을 비활성 상태로 치환한 폭력은 네덜란드 황금기 미술에서 결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예술사가 줄리 버거 호크스트라서는 역사가 점점 더 끔찍해짐에 따라 정물화는 호화스러움을 더 고집하게 된 듯하다고 지적했다. 네덜란드 황금기 미술을 다룬 책은 수없이 많지만 반다 제도 제노사이드를 언급한 책은 거의 없다.(59쪽)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후반까지 100년가량을 네덜란드 황금기라 부른다. 인류 최초 주식회사, 원조 초국적기업, 자본주의 산실, 사실상 국가였던 동인도회사가 견인한 네덜란드 경제력에 유럽 전체가 머리를 조아렸던 시기다. 그런데 이 시기 네덜란드는 검소한 삶을 강조하는 칼뱅파 개신교가 득세했기 때문에, 부를 노골적으로 과시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종교화를 포함한 대형 그림이 퇴장하고 작은 그림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이 조건에 부합한 그림이 바로 정물화였다. 비활성 자연이나 그 가공물을 도구적 알레고리로 배치해 경제적 과시와 종교적 엄숙 사이 모순을 절묘하게 타개한 정물화가 대세로 자리 잡는 일은 당연해 보였다.
그린 사람이든 사서 거는 사람이든 그 그림이 담아내는 세계 인식, 그 인식을 낳게 한 제 나라 폭력을 알고 있었을까? 아미타브 고시에 따르면 네덜란드가 반다인을 상대로 말살 정복을 벌였다는 사실을 서구인들이 똑똑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60쪽) 이 대목은 다시 프리모 레비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이렇게 말했다.
“·······라거에 대한 진실을 확산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족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집단 범죄의 하나이며 히틀러의 테러로 인해 독일 민족이 다다른 비겁함을 가장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다. 관습 속으로 들어와 버린 비겁함, 너무나 깊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도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비겁함이다.·······의심 여지없이, 끔찍한 진실에 대한 책임이 있기 (또는 있었기) 때문에 그 진실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침묵할 만한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악행을 알고 있었던 잠재적 ‘민간인’ 증인들 역시 의도적인 무지와 두려움으로 침묵했다. 특히 전쟁 마지막 몇 해 동안 라거들은 복합적이고 확장된, 지역사회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스며든 체계를 구축했다.·······실제로 그곳은 폐쇄적인 세계가 아니었다. 크고 작은 공산품 기업과 농산품 회사, 군수공장들이 수용소가 공급하는 공짜나 다름없는 노동력으로부터 이윤을 뽑아갔다.”(14~15쪽)
“의도적인 무지”. 그렇다. 안다는 사실에 입을 다물기로 작정했다는 말이다. 자기들이 누리는 호사가 다른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 자연을 살육하고 빼앗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는 말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모르는 척하기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무시하고 적극적으로 누락시키고 주체적으로 구성하기다.
유럽인들이 자랑스럽게 거짓 서사를 구성할 수 있었던 힘은 살육 경험으로써 다른 인종과 자연을 비활성 자원으로 보는 세계관을 세우고 그 대상들을 기계적, 사실적으로 관찰·변용·소유할 능력과 권한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확신한 데서 나왔다. 이 확신을 구가하고 증강하는 주요 방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정물화였다. 정(still)물은 세상을 다 가진 황금기 유럽인에게 언제까지나(still) 변함없이(still) 묵묵히(still) 축복과 명예를 기려줄 ‘빼·박’(still) 증거로 여겨졌다. 지금도 정물화를 그리고 사는 유럽인은 뭘 생각할까? 반다인 또는 북·남미 원주민 가운데 정물화를 그리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대한민국은 천지빼까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