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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두구의 저주 -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2년 12월
평점 :
영국 동인도회사가 구성한 암보이나 이야기는 아무 잘못 없는 영국 무역상이 ‘대학살’을 당했다고, 영국인이 무고하게 희생당했다고 호소하는 내러티브였다.···
이런 의미에서 대학살은 백인·기독교인 순교를 지칭할 뿐 당시 북·남미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자행된, 유럽인이 다른 종족을 살육한 대량 살상에는 쓰이지 않았다.···
결백과 순교라는 환상, 이 해로운 유물이 지금보다 더 선명하게 가시화한 적은 없다. 오늘날 백인 피해자 의식에 관한 신화는 영미 정치 체제를 뒤흔들 만큼 강력한 형태로 다시금 부상하고 있다.(64~67쪽)
어쩌면 여기가 근본 지점일지 모른다. 이 내러티브는 자기가 학살 가해자면서 학살당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도착 또는 투사가 어떤 깊은 연원을 지니는지 말해준다. “결백과 순교”는 인류 죄악을 대신 걸머지고 십자가 위에서 죽임당한 메시아,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정된 표상이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유대인은 대표적 죄악 표상이다. 북·남미 원주민을 포함한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색인종은 그 연장이다. 그 죄악 인종들에게 포위되어 있으니 성전을 수행해 박멸해야 한다. 제국주의 논리 고갱이다.
그 논리대로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실패한 메시아다. 죄악 무리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죄악을 척결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반대로 메시아 사역을 성공이라고 한다면 서구 백인은 메시아처럼 실제로 순교해야 맞다; 다른 종족을 말살하지 않아야 한다. 이 간단한 이율배반을 과연 저들이 몰랐을까. 이는 앞서 말한 의도적 무지와 궤가 같다. 결백도 순교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 오직 살육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그리 날조했다면 둘 사이 모순은 없는 셈이다. 날조해서라도 모순 없는 상태를 만들고야 마는 폭력성이 바로 저들의 견고한 죄악 본성이다.
달리 생각해보자. 자신들이 정말 결백한 순교자라고 생각하는 오류와 죄악 세력을 말살할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하는 오류 사이 모순을 익히 알면서도 거기서 오는 이득을 극대화해왔다면 이는 심각한 질병 상태다. 정신 분열이든 해리성 정체 장애든 다중 인격 장애든 명칭과 무관하게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정신병이다. 문제는 극단적 죄악 본성과 극단적 정신병 상태가 결국 만나고야 만다는 데 있다. 바로 이 국면으로 진입하는 세계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앵글로아메리카 프레임에 휩쓸린 제국 지배층 행태는 꼭 똑 병든 악귀 자체다.
가장 잔혹한 살인은 광신도 초범이 저지른다. 신께서 분부한 일을 수행한다는 확신과 무경험에서 오는 어설픔이 맞물려 마구 찌르고 자르고 째고 뚫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잘못된 살인 자체도 문제지만 죽임당하는 사람이 겪는 극대화된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서구 제국주의가 일으킨 제노사이드는 모두 이런 잔혹함으로 물들었다. 참된 철학이라면 이 잔혹함 한가운데서 윤리를 구성해야 한다. 참된 종교라면 이 잔혹함 한가운데서 구원을 구성해야 한다. 참된 의학이라면 이 잔혹함 한가운데서 처방을 구성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