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두구의 저주 -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
아미타브 고시 지음, 김홍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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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일본 낭인 파견대 일원이 네덜란드군을 공격해 암보이나(동인도회사 거점)를 점령하려는 영국군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고문 끝에 음모를 인정한 낭인은 그 도시에 거주하는 영국인 일부가 연루돼 있다고 자백했다.···이 일은 결국 영국인 10···에 대한 참수형으로 이어졌다.

  주로 영국 동인도회사 노력에 힘입어, 이들 처형은 이내 영국 국가적 상상력에서 이례적일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제국 기원 신화가 되어 영국 팽창과 공격을 위한 보증서로 꾸준히 애용되는 이야기로서 말이다.

  ···300년 넘는 기간 동안 영국 팸플릿, , 정기 간행물, 연극, 소설, 역사책, 학교 교과서, 수필, 또는 삽화에 암보이나가 등장하지 않은 채 지나간 10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존 드라이든, 조너선 스위프트, 다니엘 디포, 그리고 수없이 많은 문인도 작품 일부에 그 신화를 집어넣었다. 처음에 그 신화를 날조한 주체는 영국 동인도회사였지만, 그 이야기가 오랫동안 퍼져나가고 널리 영향력을 끼치게 만든 주체는 바로 지독한 쇼비니즘에 물든 영국 문단이었다.(63~65)

 

정치를 제외한 모든 분야가 정치와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루 난삽하게 논쟁해왔다. 참여 문학: 순수 문학 논쟁이 그 대표적인 예다. 각기 주장하는 내용을 상세히 들출 필요는 없다. 주장하는 대로 실천하는지가 관건이다. 순수 문학 한다면서 일제를 찬양했던 서정주 행태를 보면 그가 말한 순수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서정주가 식민지에서 식민지인으로 문학 하면서도 이랬는데 하물며 제국 시민인 존 드라이든, 조너선 스위프트, 다니엘 디포가 쇼비니즘에 물든 일쯤이야 무슨.

 

내가 스스로 부역자임을 통렬하게 인정했을 때 가장 먼저 그리고 크게 떠오른 생각은 이렇다.

 

나 정도가 부역자라면 서구 제국주의가 발호해 전 세계를 살육하고 있을 때 제국 시민이었던 위대한 지성 걸출한 예술가는 무엇이었을까? 오랫동안 그 사상과 작품을 흠숭하고 배워왔던 이성과 감성 스승들이 대부분 제국주의를 반향 또는 발향한 반역자가 아니었을까?”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너무도 자명할 수밖에 없는 그 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저들에게 꽂히는 실망 때문이 아니었다. 치욕이 되고야 말 내 영혼 때문이었다. 나 같은 무지렁이에게조차 드리운 부역 그늘이 얼마나 짙은지를 감지할 때 들이닥칠 모멸감 때문이었다. 내 삶에서 부역을 들어내면 남아 있을 무엇도 없으리라는 아뜩함 때문이었다. 야속하게도 이런 내 생각은 적나라한 풍경으로 내 눈앞에 전시되고 말았다. 종교, 철학, 미술, 문학···결결이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계속해서 일어날 일이다. 옹골차게 응시해야 한다.

 

물론 세계는 단순하지 않다. 모든 존재가 역설로 구성되고 운동한다. 선악은 간단명료하게 분화되지 않는다. 범주는 관념일 뿐, 차이는 다만 상태함수 문제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상태함수를 맹렬하게 풀어내야 한다. 다니엘 디포 쇼비니즘과 강용원 부역은 같지 않다. 서정주 부역과 강용원 부역도 같지 않다. 이 차이에서 천명이 갈라진다. 이 갈림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씨름일 수도 있고 싸움일 수도 있다. 싸움에는 생사가 걸린다. 살아도 진 싸움이 있고, 죽어도 이긴 싸움이 있다. 내 마지막 싸움에서 나는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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