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성용(비폭력평화물결 대표)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 일부를 그대로 싣는다


오늘날 우리가 실천하는 서클 프로세스와 민주적 의사결정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북아메리카 선주민인 하우데노사우니(Haudenosaunee)의 지혜를 만나게 된다. '긴 집의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 하우데노사우니는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수백 년 전부터 놀라운 민주적 체계를 발전시켜왔다. 이들의 '위대한 평화의 법(Great Law of Peace)'은 단순한 정치 체계를 넘어서, 모든 목소리를 존중하고 합의를 통해 결정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공동체의 삶의 방식이었다.

하우데노사우니의 역사와 형성
하우데노사우니 연맹은 12세기 또는 13세기경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뉴욕주 북부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다섯 부족, 즉 모호크(Mohawk), 오네이다(Oneida), 오논다가(Onondaga), 카유가(Cayuga), 세네카(Seneca)가 오랜 전쟁과 갈등을 끝내고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 연맹을 결성했다. 1722년에는 투스카로라(Tuscarora) 부족이 합류하여 여섯 부족 연맹이 되었다.
연맹 형성의 중심에는 '위대한 평화주의자(Great Peacemaker)'라 불리는 전설적 인물 데카나위다(Dekanawidah)와 그의 대변인 하이아와사(Hiawatha)가 있었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고통받던 하이아와사는 평화주의자의 메시지를 받아들였고, 함께 부족들을 설득하며 다녔다. 평화주의자는 다섯 개의 화살을 묶어 보여주며 단결의 힘을 시연했다. 하나의 화살은 쉽게 부러지지만, 다섯 개를 함께 묶으면 부러뜨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장 어려운 과제는 사악하고 폭력적인 것으로 알려진 오논다가의 지도자 타다다호(Tadadaho)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머리카락은 꿈틀거리는 뱀들로 이루어져 있어 왜곡된 마음을 상징했다고 한다. 하지만 평화주의자와 하이아와사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설득했고, 결국 타다다호는 평화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평화가 확립되자 사람들은 함께 모여 백송나무 한 그루를 뽑아내고 그 구멍에 무기를 던져 넣었다. 그리고 무기 위에 나무를 다시 심고 '평화의 나무(Tree of Peace)'라고 이름 지었다. 이 나무의 네 뿌리는 네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평화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하우데노사우니의 땅으로 오는 평화의 길을 상징한다. 나무 꼭대기에는 독수리가 앉아 있는데, 이는 하우데노사우니의 수호자이자 창조주에게 보내는 전령이다.

위대한 평화의 법: 살아있는 헌법
위대한 평화의 법은 117개 조항으로 구성된 구술 헌법이다. 이 법은 왐펌(wampum) 벨트에 상징적으로 기록되었는데, 왐펌은 조개껍질로 만든 구슬로, 기억을 돕는 장치이자 이야기꾼을 위한 도구였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영어와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지만, 하우데노사우니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살아있는 헌법으로서 세대를 거쳐 전해지고 있다.
이 법의 핵심은 단결, 집단적 의사결정, 그리고 모든 개인에 대한 존중이다. 정치 체계는 대의회(Grand Council)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는데, 각 부족에서 선출된 50명의 추장(sachems 또는 hoyaneh)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오늘날의 의회와 유사하지만, 의사결정 방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합의 중심의 서클 프로세스
하우데노사우니의 가장 혁신적인 특징은 바로 합의 중심의 의사결정 방식이었다. 모든 중요한 결정은 전원 합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했다. 이는 단순히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참여자가 동의할 때까지 논의를 계속하는 것을 의미했다.
의사결정 과정은 정교하게 구조화되어 있었다. 먼저 모호크와 세네카 추장들이 안건을 논의하고 결정을 내린다. 그 다음 오네이다와 카유가 추장들이 논의하고 결정한다. 이 두 그룹의 결정은 오논다가 추장들, 즉 '불의 수호자(Fire Keepers)'에게 전달되어 최종 판단을 받는다. 오논다가는 연맹의 수도 역할을 했으며, 평화주의자가 약속한 대로 연맹의 불이 오논다가 부족의 땅에서 타올랐다.
이 과정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는 그룹이 있었다. 모호크 의회는 세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룹이 논의하는 동안 세 번째 그룹은 듣기만 한다. 만약 오류가 있거나 절차가 부적절하면 세 번째 그룹이 이를 지적한다. 이는 오늘날의 '체크 앤 밸런스(견제와 균형)' 체계의 초기 형태였다.
합의 과정은 시간이 걸렸지만, 이를 통해 모든 목소리가 들리고 모든 관점이 고려되었다. 결정에 이르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공개 토론이 필요했으며,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 과정은 계속되었다. 이는 단결을 촉진하고 모든 목소리가 존중받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이해에 기반했다.

여성의 역할: 클랜 어머니의 권한
하우데노사우니 사회의 또 다른 혁명적 특징은 여성의 중심적 역할이었다. 사회는 모계 혈통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여성만이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지도권 역시 모계를 통해 세습되었다.
'클랜 어머니(Clan Mothers)'라 불리는 여성 지도자들은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추장을 선출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남성들이 정치를 수행했지만, 탄핵권과 거부권은 여성들의 모임이 가지고 있었다. 이는 18세기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여성 참정권의 형태였다.
정주 지역의 땅과 자원에 대한 책임은 여성에게 있었고, '숲'에 대한 책임은 남성에게 있었다. 이러한 명확한 책임 구분은 공유 자원을 관리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
하우데노사우니의 통치 체계가 미국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1988년 미국 의회는 하우데노사우니 헌법이 미국 헌법과 권리장전에 미친 영향을 인정하는 결의안 331호를 통과시켰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존 러틀리지는 헌법 제정 회의에서 다양한 이로쿼이 조약의 발췌문을 낭독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두 체계 사이의 차이점도 지적한다. 하우데노사우니에서는 모든 결정이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미국 헌법은 다수결을 채택했다. 하우데노사우니는 처음부터 여성에게 정치적 권한을 부여했지만, 원래의 미국 헌법은 여성과 노예에게 투표권을 부정했다. 하우데노사우니의 대표는 씨족 수를 기반으로 했지만, 미국은 인구를 기반으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방제, 대의 민주주의, 견제와 균형, 개인의 권리 존중, 평화를 향한 헌신과 같은 핵심 원칙들은 분명히 공명한다. 하우데노사우니의 위대한 평화의 법은 실천적 민주주의의 초기 사례로서, 민주주의가 서양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평화와 환경을 위한 철학
위대한 평화의 법은 단순히 정치 체계가 아니라 삶의 철학이었다. 이는 평화, 사랑, 정의를 중심으로 한 가치 체계를 제공했다. 하우데노사우니는 폭력의 순환을 끝내고 평화와 단결의 문화를 조성했다. 배경이나 출신에 관계없이 모든 개인이 공동선을 위해 함께 일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하고 관련성이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일곱 세대 원칙(Seventh Generation Principle)'이다. 위대한 평화의 법은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간은 환경을 보호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자신의 결정이 자연 세계에 미칠 장기적 영향을 고려해야 하며, 모든 생명체의 상호연결성을 인식해야 한다.
하우데노사우니 환경 태스크포스는 이 원칙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세 가지 질문을 제안한다.
"우리의 결정이 평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우리의 결정이 자연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우리의 결정이 미래 세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감사의 의식
하우데노사우니의 모든 회의와 중요한 행사는 '감사의 말씀(Thanksgiving Address)'으로 시작한다. 이는 창조의 각 요소가 자신의 의무를 계속 수행하여 생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의식적 연설이다. 이러한 감사의 표현은 공동체 의식과 책임감을 강화하는 강력한 방법이었다.
감사의 의식은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우리가 건강한 생태계, 공기, 물, 햇빛, 그리고 창조의 나머지 부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도구였다. 이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강조하는 서구 전통과 대조를 이루며, 공동체적 책임과 상호의존성을 중심에 둔다.

개방적 경계와 포용성
위대한 평화의 법은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원칙을 담고 있었다. 평화의 나무의 네 뿌리는 네 방향을 향하며, 위대한 평화의 법을 따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을 환영했다. 사람들은 어느 부족에서나 완전한 권리를 가졌으며, 높은 직위를 맡을 권리를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권한도 지정된 절차를 통해 개인에게 부여될 수 있었다.
하우데노사우니 외부의 부족이나 개인이 씨족으로 입양되기를 원하면, 일정 길이의 조개 구슬 끈을 서약으로 제공했다. 그러면 부족의 추장들이 제안을 고려하고 결정을 제출했다. 입양이 확정되면, 추장들은 국민에게 "이제 우리 국민은 그러한 사람, 그러한 가족 또는 그러한 가족들이 영원히 출생 국가의 이름을 버리고 땅의 깊은 곳에 묻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완전한 통합과 새로운 정체성의 수용을 의미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김창록(경북대 법전 교수)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그대로 싣는다


1. 정부의 가공할 법률안이 던져지며 중수청 논의가 산으로 가고 있다.
‘수정’ ‘보완’이라는 미명 아래 왈가왈부로 난장판이 될 조짐이다.
중심 잡자!
2. 출발점은 ‘검찰의 실패’다
해결책은 ‘검찰에 대한 통제 강화’다.
구체적 방법은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떼내는 것’이다.
3. 새로 만들려고 하는 중수청은 수사기관이다.
그런데 이미 수사기관인 경찰이 있고 국수본이 있다.
왜 또 수사기관을 만들겠다고 이 소란인가!
그냥 검찰의 수사권을 경찰에 넘기면 끝나는 것 아닌가!
4. ‘공룡 경찰’이 될 것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그 문제는 ‘경찰 통제’로 풀어야지 ‘검찰 유지’로 풀어서는 안 된다.
다시 되새기자.
‘검찰의 실패’가 출발점이다.
5. ‘검찰의 수사 능력’을 보존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거 입증되었나?
정반대의 증거를 거듭 확인하지 않았나!
경찰 수사 사건 무죄율 1% 미만, 검사 직접 수사 사건 무죄율 5% 내외다.
조국 일가 수사를 보라.
검찰은 사악한 수사를 했다.
김학의 수사를 보라.
검찰은 해야 할 수사를 하지 않았다. 혹은 범죄를 덮는 것을 수사라고 했다.
다시 되새기자.
‘검찰의 실패’가 출발점이다.
6. 검사의 권한 유지 기구로 전락할 중수청 필요없다.
이런 흐름 속에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만들면 안 된다.
중수청 법률안은 모두 폐기하라.
7. 논의의 물꼬를 수사권을 모두 가지게 될 경찰의 충실화와 확실한 국민적 통제 방안 마련으로 돌리자.
1) 검찰의 수사인력과 예산을 떼어내서 경찰로 이관하자.
2) 경찰에 전문수사관(세무사, 회계사, 변호사 등 전문 자격증 소지자)을 대폭 늘리고 대우하자.
3) 국가경찰위원회를 의결기구로 격상하고 진정한 국민 대리기구로 구성하자.
4) 국수본은 중요 범죄만 수사하게 하고, 생활안전에 관한 사항은 자치경찰에게 넘기되 주민의 통제를 받게 하자.
5) 검찰은 경찰에 대한 감시기구로 거듭 나게 하자.
8. 검찰 수사권 완전 폐지의 후속조치도 필요하다.
1) 검찰수사관 전원을 경찰에 재배치하자.
2) 검사들도 원하면 경찰로 가게 하자. 검사가 가지 않아 남게 되면 신규채용 하지 말고 검사정원법 개정해서 정원을 줄이자.
9. 검찰에 남게 되는 기소권과 공수유지권도 국민이 철저히 통제하게 하자.
1) 기소 요건을 법률로 정해 해당하면 반드시 기소하게 하자.
2) 기소 여부 결정과 공소 유지의 과정에 국민이 결정권을 가지고 참여하게 하자.
10. 검찰, 검사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주장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유지하려는 모든 주장은 반개혁이다.
민주당 국회의원 중에도 그런 주장을 하는 자들이 있다.
철저히 감시하고 통제하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26-01-15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발점은 ‘검찰의 실패’다
그 문제는 ‘경찰 통제’로 풀어야지 ‘검찰 유지’로 풀어서는 안 된다.
새겨야 될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이 들수록 친구들과 자주 어울려야 한다는 말을 나는 그다지 귀담아듣지 않는다. 고등학교든 대학교든 동창들과 만나면 흔히 나누는 이야기 화제도 방향도 워낙 달라서 재미없음을 넘어 부아가 치미니 어울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특히나 정치 문제에서 내 또래들은 거의 전부가 나와 반대편에 서 있다. 언쟁하기는커녕 아예 말 섞고 싶지 않다. 내내 침묵하고 있다 돌아설 때 드는 생각을 기억하고 냉정하게 거절해 온 지 제법 된다.

 

최근에 그나마 말 통하는 친구 하나한테서 전화가 왔다. 다른 친구 이름을 대면서 굳이 내게 연락해달라 하고 모임을 제안했다 한다. 나는 역시 그런 문제가 있어서 갈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친구는 무슨 근거에선지 이번에는 그런 일 없을 거라며 웬만하면 나오라고 당부한다. 출발 직전까지 망설이다가 에멜무지로 가 봤다. 정말 희한하게 그날은 정치 얘기도 없고 시답지 않은 미셀러니도 없고 혼자 십 분, 이십 분 떠드는 놈도 없다.

 

기분이 해낙낙해져선지 빠른 속도로 소주잔을 비워갔다. 모임 뒷부분 쪽 기억을 어디다 흘리고 왔다. 아침에 확인하니 기억 말고도 하나 더 흘린 게 있다. 목도리다. 음식점에 전화해 물은바 어제 밤엔 유실물이 없었단다. 혹시 나중에라도 찾으면 연락한다기에 길에다 흘렸나보다 하고 미련을 거두었다. 한, 나중에 연락한다는 말이 어쩐지 마음에 남는다. 그 음식점 일반전화기에 내 전화번호가 남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서다.

 

때마침 그 근처로 갈 일이 생겨 행여나 하고 들러보았다. 직원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있다고 대답하고 아무 말 없이 건네준다. 좀 이상스럽게 느껴져 다른 가능성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냥 내 추측에 따라 포기하지 않은 결과라 여긴다. 뭘 잃을 때, 나는 보통 알끈하지 않고 그냥 놓아버린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거의 모든 일을 홀로 가말며 살아온 오랜 습성 탓이다. 이 습성을 깨뜨린, 사소하나 인상 깊은 사건이었다. 묘한 흥이 돋는다.


 

사실, 나는 목도리를 두 가지 이유에서 아주 좋아한다. 첫째, 목 앞이 다 드러나 허전한 느낌을 견디기 힘들어해서다. 아마도 어린 시절 거의 방치된 상태로 양육되면서 겪은 마음 스산함과 실제 추위에 대한 두려움에 그 곡절이 닿아 있지 싶다. 폴라(polo neck) 옷을 입고도 목도리를 할 정도다. 둘째, 일상 삶과 직업 수행에 영성을 담는다는 내 식 제의 복장이다. 이를테면 미사 집전하는 사제가 목에 두르는 영대(stole) 같은 구실이다.

 

첫째 이유는 상처에 보이는 반응(reaction)인 셈이고, 둘째 이유는 내 삶에 보이는 감응(response)인 셈이다. 통속한 논리로 따지면 이 둘은 공존해서는 안 된다. 원효 성사 일심(一心) 사상을 따르는 내 논리로 따지면 이 둘은 공존해야 맞다. 그래야 겸허와 자긍이 무애자재(無碍自在)인 삶일 수 있다. 그 목도리 찾기를 이제 내 생애에서 기릴 만한 한 사건으로 자리매김한다. 글 쓰는 인제에도 나는 바로 그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기이하든 당연하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최근까지 전혀 내 관심 밖이었다. 이는 필경 자칭 과학이라 하는 양의학에 코웃음 날리는 심사가 허울 대한민국에도 그대로 번져서지 싶다. 전혀 엉뚱한 계기로 처음 그곳을 찾았다. 옥상 공원 전망 좋다는 말을 듣고 거기서 백악산과 경복궁을 볼 심산이었다. 내려오다가 별생각 없이 역사관을 일별했다. 아무 느낌이 나지 않는 나열처럼 다가왔다. 겉만 훑은 채 내려왔다. 입구에서 어떤 충격과 맞닥뜨리기 전까지 나는 이곳에 다시 올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을 일거에 뒤집어버린 충격은 이명박이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건립하도록 했다는 모멸 어린 사실이었다.


 

이명박이 입김이 쐬어진 대한민국 역사라면 분명한 뒤틀림이 도사리고 있을 터이다. 다음 주에 나는 작심하고 다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찾는다. 좀 더 정색하고 좀 더 천천히 더듬어간다. 나중에 다시 보면서 정확히 판단하는 데에 필요한 자료를 사진에 담는다. 문제점을 나누어 정리하기 전에 가장 큰 느낌 한 가지를 먼저 이야기한다. “이 역사박물관은 박정희에게 바친 오마주라고 할 만하다.” 토건형 머리에 박정희를 우상으로 굳건히 모신 이명박이라면 대한민국 역사 중심에 그를 좌정시킬 명분은 충분하다. 이는 동작동 국립현충원 전체 형국이 박정희 묘소를 기축으로 짜인 느낌을 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느낌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곳에 드리워진 저급하고 치졸한 음모 그림자를 감지한다. 박정희를 부풀리면 당연히 우그러뜨리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시간 순서를 따라 그저 눈에 띄는 대로만 제시하더라도 이렇다: 3·1혁명, 임시정부, 국권 상실기 동안 개인 또는 조직이 한 무장 투쟁, 군정, 이승만 정권 성립 과정과 실정, 박정희 쿠데타 과정과 실정, 전두환 반란·집권 과정과 실정. 중요한 진실은 아예 누락시킨 흔적이 뚜렷하다. 무엇보다 서사 전체에 흐름과 동이 없고 시대별 배열에서 멈춘 부박한 풍경 때문에, 자꾸만 혀를 차게 된다. 올바른 생각하는 사학자 단 한 명이라도 이 일에 참여시켰을지 의문이다.

 

목소리 지니지 못한 무지렁이라 아무 힘도 쓸 수 없으니 더는 오지 않으리라 다짐이나 하며 돌아선다. 깊은숨 쉬고 나서 되돌아보다가 기이한 표지석을 본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라고 붓글씨로 쓰고 서명했는데 대한민국역사박물관글씨와 서명한 글씨가 다르다. 누가 써주거나 집자한 글씨에 서명만 한 거다. 실소를 금하기에는 사태가 너무 어맹뿌스럽다. 본명 음각, 아호 양각 형식 갖춘 낙관이 있다는 사실마저 웃음을 자아낸다. 글씨 수준으로 봐서 진품인지 의심스럽기도 하거니와 아호가 청계라는 사실에 더욱 배꼽이 요동한다. 나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홀가분하게 작별할 며리를 찾았으니 미련 없다.


 

나와서 소주 한잔 마시며 관련 자료를 검색하다가 더 확실한 증거와 맞닥뜨린다. ‘기레기출신으로 엄청난 관운을 누린 김진현이란 자가 쓰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펴낸 잡서 대한민국 100년 통사 1948~2048이다. 제목 자체가 황당하다. 대한민국이 1948년에 출발했다는 뉴라이트 주장에다가 역사라면서 2048년은 또 뭔가. 이승만과 박정희를 두둔하고, 5·18을 반동·반역이라 매도하고, 심지어 민주주의조차 왜곡했다. 사진 자료에서 독도를 삭제했다. 역사학과 아무 관련 없는 부역 정권 전직 관료에게 대한민국 역사 집필을 맡긴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측은 명백한 매국·반란 집단이다. 이참에 갈아엎어야 한다.


 

지난 3년여 제국주의를 한무릎공부하며 강력한 시간속에서 뒹굴었다. 제국에 부역해 떵떵거리며 주류로 군림해 온 매국 엘리트가 얼마나 어떻게 나라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지 속속들이 알아버린 이 시간은 맹렬하게 아프고 쓰라린 독극물이었다. 그 와중에 일제에 무릎 꿇은 악귀 명신이 패거리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고 나는 그때부터 이제까지 광장을 배회하고 있다. 오늘로 네 번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밟고 치욕을 곱씹으며 나 또한 무지렁이나마 불가피한 부역자임을 통감한다. 통감으로 묻는다: 각성한 부역자가 설 곳은 어딘가. 그곳을 제대로 찾아왔는가. 거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기이하든 당연하든, 내 제국주의 공부 길과 부역자 각성은 숲에서 열렸다. 눈 덮인 골짜기에서 길을 잃고 생사를 넘나들다가 홀연히 깨달은 진실이었다. 이후 자연과 문명, 숲과 인간 사회·역사 사이를 가로지르며 예 엎드리고 낙 놀았다. 그 과정에서 시나브로 헨둥하게 내가 풀빛 무당이라는 일심에 도달했다. 내가 설 곳은 그러므로 마주 가장자리, 그러니까 변두리다. 사람 성공에 온통 녹아들 수도, 숲 번성으로 통째 스며들 수도 없는 운명이 자리 잡아야 할 틈새다. 그 틈새라야 옹글고도 괭한 화쟁(和諍) 무애자재(無碍自在) 삶을 닦아갈 수 있다. 여생은 그렇게 겸허와 자긍을 함께 안아 기려 보련다.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