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1장 본문입니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是故 君子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 君子愼其獨也.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天下之大本也 和也者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하늘이 명하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性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道에서는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道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그 보이지 아니하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들리지 아니하는 곳에서 두려워한다. 숨은 것에서 가장 잘 나타나며 미세한 것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있을 때 조심한다.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정(情)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상태를 ('속'이라는 의미로서) 중(中)이라 하고 나타나서 모두 절도에 맞게 된 상태를 화(和)라 한다. 中이란 천하의 큰 뿌리이고 和란 천하에 통하는 도리이다. 中과 和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  

 

2. 제1장은 주희가 썼다고 합니다. 처음엔 어기와 내용의 기획성을 보고 그냥 후대의 편집 의도 때문에 선두에 놓인 것이라 추정했는데 나중에 대가들의 주석을 보니 주희 작품이라는군요. 그리고 주석들은 대부분 문장의 웅혼함과 압축미에 찬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런 제압 효과를 염두에 두고 주희는 깊은 고뇌 끝에 이 부분을 <중용> 텍스트의 도론(導論)이자 당당한 본문 제1장으로 배치했을 것입니다.  

 

주희의 의도대로 제1장부터 읽으면 <중용>은 주희의 독법으로 읽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그 의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맨 뒤로 돌리면 전혀 다른 독법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부족하나마 우리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관성을 유지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면 당최 주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3. 제1장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마치 <중용> 전체의 대미(大尾)인 제33장을 요약, 선취(先取)한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性과 道와 敎를 정교한 논리 관계로 제시하여 중용에 단도직입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性과 道와 敎를 수직적 구조로 선명하게 구획함으로써 중용을 중세적 신분 질서 속에서 파악하도록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천(上天)의 작용은 소리가 없고 냄새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다(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라고 한 제33장의 대승(大乘)적 결론을 비틀고 깎아서  "그 홀로 있을 때 조심한다(愼其獨也)"는 소승(小乘)적 결론으로 축소해버렸습니다. 홀로 있을 때 조심하는 것은 중용의 개별적 성찰이자 전 사회적 실천의 발단입니다. 물론 불가결한 고갱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결론으로 삼을 수는 없지요. 이 일은 작정하고 그리 한 것이 아니라면 삼척동자도 하지 않을 짓입니다. 이런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후대 아류들은 신독(愼獨)을 선비의 최고 덕목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愼獨은 백성과 쌍방향 소통하기 위한 조건일 뿐이거늘!  

 

뒷부분은 더욱 노골적입니다. 중용을 말하는 텍스트의 도론(導論)에 아예 대놓고 중화(中和)로 못을 쳐버립니다.  후대 사람들이 아무리 中和와 중용을 일치시키려 애를 써도 주희가 구태여 中和란 용어를 쓴 연유를 알지 못하는 한 허깨비 놀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희의 중용은 그의 중화입니다. 중화는 中을 중세적 관료주의 틀 안에서 실천하는 것(和)입니다. 아니 和는 中을 관철시키기 위한 중세적 관료주의 시스템(節) 자체를 가리킵니다.  中은 천자(天子)이자 중화(中華)적 질서입니다.  

 

그 끈질긴 명사적 어법! 게다가 그 '자랑스런' 이기(理氣)와 체용(體用)의 이분법!  

 

최후로 깔끔하게 정리합니다.  

 

"中과 和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그야말로 초안정 시스템입니다. 하늘과 땅은 그저  제자리를 지킵니다(位)! 만물도 中의 뜻대로 사육됩니다(育)! 우리는 맨 마지막 문장에도 주희의 주도면밀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이 빚어짐, 즉 화(化)를 빼버리고 育만을 남긴 것은 변화를 불온하게 여기는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4. 우리는 제1장을 제33장 뒤에 읽음으로써  이런 자유, 이런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던져줍니다. 사회정치적 헤게모니 블록이 제공한 인지(認知) 도식(scheme)에 갇혀 사고하면 결국 그들이 기획하는 그들만의 안정체제 안에서 꼼짝 없이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중용>은 주희로 말미암아 공자의 손을 떠났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중용>을 주희의 손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제를 안고 <중용>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한국 사회를 사는 우리가 말하는 중용은 무엇일까요? 직접적인 답을  뒤로 미루고 최근 마주한 에피소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답이 자명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헤게모니블록의 핵심에서 방사능 위험성을 퍼뜨리는 '좌빨'이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이 흘러나왔지요. 그들은 대체 뭐가 무서운 걸까요? 그들에게 주희의 中和를 들이밀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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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철학의 역사 프라즈냐 총서 1
D. J. 칼루파하나 지음, 김종욱 옮김 / 운주사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1. 제 독서의 흐름에서 불교사상은 매우 중요합니다. 종교로서 불교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붓다의 생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입니다. 붓다에 대한 관심은 원효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원효에 대한 관심은 한국적 상담의 틀과 내용을 찾는 과정에서 생겼습니다. 한국적 상담의 틀과 내용에 대한 관심은 제 인생 전체가 걸린 화두의 구체적 소산입니다.  

서양 논리에 터 잡은 사회과학 가녘에서 서성인 20대, 서양 논리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신학 언저리에서 서성인 30대, 그 20년 세월을 거쳐, 40대부터 우리 논리를 직접 찾아 나서면서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20대부터 누군가에게 상담자 노릇을 하면서 살아 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기에, 상담은 말이고, 말은 생각이고, 생각은 논리라는 사실에 깊이 연루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여 가능한 모든 길을 걸어가면서 제 자신과 생태적으로 같은 사람들의 생각과 논리와 말을 물었습니다. 그러다 최근 몇 년 사이, '폭풍' '종결자'를 찾았습니다. 다름 아닌, 원효!   

원효만으로, 사실, 저는 족합니다. 그는 세계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붓다를 넘어선 '붓다'입니다. 다만, 우리사회도, 또 대부분의 우리 불자들도, 더군다나 세계 불자들도 이를 모를 뿐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붓다를 면밀하게 찾는 까닭은, 이미 세계성 또는 보편성을 인정받고 있는  붓다 사상의 진실, 그 타당성이 어떻게 원효와 만나는지 보기 위해섭니다.  

그 목적을 위해 불교 경전 자체는 물론, 그것을 철학적으로 해석한 문헌, 인도 사상 전체 맥락에서 살피는 문헌 등을 읽어 왔습니다. 그들 가운데 몇 가지는 이미 소개한 바 있습니다. 최근에 발견한 칼루파하나의 이 <불교철학의 역사>는 그 무엇보다 초기 경전에 터 잡아 붓다의 철학의 성격과 내용을 명확히 드러내고, 붓다 이후 나타난 사상들의 흐름을 붓다 철학과 부합하느냐 여부에 따라 연속과 불연속으로 나누어 살피고 있어, 최근 불교 내부에서 일어나 번지고 있는 대승불교 비불설, 초기불교 소승 논쟁을 일정 정도 교통정리 해줄 근거 지식으로 삼을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른바 초기불교를 지지하면서 대승불교 전반에 적대적이기까지 한 비판적인 견해를 숨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필독의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대승불교 쪽 사람들도 초기경전에 입각하여 붓다의 철학이 대체 어떤 것인지, 자신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점은 없는지, 살피기 위해서, 이 책은 꼭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계도 있습니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으로 들어와 널리 자리 잡은 대승불교 전반에 대한 연구가  이 책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자 자신이 이 점은 솔직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선불교 가운데 임제종을 제외하고는 붓다의 철학과 부합하는 면모를 지닌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대표적인 대승경전으로 법화경, 능가경, 화엄경을 꼽고, 이에 터 잡아 일어난 불교 유파에 대해서는 논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화엄경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으니 제쳐두고, 이 책에서 행한 법화경과 능가경에 대한 그의 분석이 옳다면 구태여 이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움이 있다면 조동종과 임제종의 차이를 저자가 설명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동아시아 3국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일본 중심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로서는, 저자가 원효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그 또한 그의 삶의 맥락에서 오는 필연이라 생각하고, 그저 유익한 부분만 흔쾌히 받기로 했습니다.  

2. 제1부에서 저자는 궁극적 객관성의 탐구와 인도철학, 붓다의 생애, 인식과 이해, 경험과 이론, 언어와 의사소통, 인간의 주체성, 대상, 괴로움의 문제, 자유와 행복, 도덕생활, 대중의 종교 사상 등으로 주제를 설정하여 치밀하게 붓다의 사상을 돋을새김 하고 있습니다. 

우선 전체 서론, 또는 도론(導論) 격인 제1장, 궁극적 객관성의 탐구와 인도철학 부분에서, 저자는 브라흐만교에서 자이나교에 이르는 제 사상을 두루 살핀 후, 붓다의 사상을 이렇게 정향(定向)합니다. 

"철학적 담론을 통해 궁극이 객관성에 도달하려는 시도의 결과가 절대주의라면, 그리고 그러한 시도가 실패한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 극단적인 회의주의라고 한다면, 붓다가 인간의 경험에 관해 설명한 것은 그러한 객관성의 갈구 자체를 파기하고 중도를 통해서 절대주의와 극단적 회의주의 모두를 지양하려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26쪽)

붓다 사상은 중도사상이다, 그 중도는 인간의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내용이지요. 이 결론에 앞선 표현을 보면 조금 더 명확한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즉, 

".......붓다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여, 궁극적 객관성을 갈구하지 않으면서도 진리와 실재에 대해 타당한 설명을 제시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접근 태도로 말미암아 그는 존재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입장에 매이지 않고도 언어를 보다 더 의미 있는 방식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붓다는 인도의 철학자들을 수세기 동안 괴롭혀 온 궁극의 기원이나 운명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하거나 혹은 답변을 제시하는 것을 삼갔다......."(25쪽)  

사실 여기서 이미 붓다 사상의 근본 성격이 드러납니다. 그것을 도처에서 이런 두 용어로 반복 언급하면서 결을 잡아 나아갑니다.  

첫째, 근본적 경험주의(radical empricism) 

둘째, 실용주의(pragmatism) 

사실, 우리는 고등학생 수준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란 말에, 아니 그 말의 인플레이션에 따른 피상성에 일정 정도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응~, 붓다 사상, 뭐, 별 거 아니네, 이럴 가능성이 높지요. 그러나 이 말은 진실의 적인 양 극단을 부정하고, 또는 놓아버리고 중도를 취하는 데, 더 이상의 무게를 지니는 다른 태도가 없을 만큼 기품 있고 옹골찬  내용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상식을 비우고 그 내용을 붓다를 통해 다시 배워야 합니다. 

중도로서 근본적 경험주의와 실용주의를 철학적 지평에서 공시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나타납니다. 

".......인식론적으로는 절대론과 회의론 사이.......존재론적으로는 영원론과 허무론 사이.......윤리학적으로는 의무론과 정의(情意)론 사이.......언어 철학적으로는 실재론과 유명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 사이의 중도......."(488-489쪽) 

이 것을 다시 통시적 논리 과정으로, 역자의 표현을 빌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해체와 재건이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와 공(空)은 변화하는 세계의 근저에 놓인 영원불변의 기초나 본질이나 실체를 부정하는 비토대주의, 비본질주의, 비실체주의라는 점에서, 항구적 절대자를 정점으로 축조된 형이상학적 건축물을 허물어뜨리는 반절대주의적 해체의 과정이다. 그러나 모든 구조물이 철거된 황량한 허무의 공터가 종착점은 아니다. 고정불변의 일방적 시각을 떠난 중도의 입장에서, 상호간의 맥락에 따라 모든 구성요소들의 관계성을 복원하는 연기(緣起)가 새로운 재건의 과정으로서 남아 있는 것이다......."(524쪽) 

그리고 보면 붓다의 이러한 사유와 실천은 세계 구조가 비대칭적 대칭성으로 되어 있으며, 실제 상황은 그 대칭구조를 자발적으로 깨뜨리는 운동으로 나타난다는 현대과학적 발견을 정확하게 선취한 것입니다. 대칭구조는 두 극단이 마주서 있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 극단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이론, 또는 관념의 존재이므로 그 어떤 극단의 옹호도 사실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허구는 무조건의 신념입니다. 무조건의 신념은 경험 밖의 이야기이며 결과적으로 실용성도 없습니다. 바로 이런 진실을 꿰뚫어 본 붓다는 그 미망을 흔들어 격정을 가라앉히고 잔잔한 자유, 저 닙바나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3. 이런 붓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후대 사상을 조명하는 제2부, 바로 여기가 실제로 불자들이 주의를 바짝 기울여야 할 부분입니다.  

붓다 사상과 연속을 이루는 경전과 사람들로는 금강경, 목갈리풋다 팃사, 나가르주나(용수), 바수반두(세친), 디그나가(진나), 혜능(임제선)이 있습니다. 불연속을 이루는 경전과 사람들로는 법화경, 능가경, 붓다고사, 찬드라키르티(나가르주나 주석자), 스티라마티(바수반두 주석자), 다르마키르티(디그나가 주석자), 신수(조동종)가 있습니다. 

이른바 초기불교 신봉자들 가운데 다수가 나가르주나, 바수반두, 디그나가, 혜능 모두가 비불설이라고 여깁니다. 저자는 세밀하게 이런 오해를 반박하고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반전은 바로 붓다고사입니다. 그가 쓴 청정도론은 대부분의 초기불교 신봉자들에게 존숭 대상이 되는 텍스트입니다. 비록 조화라는 부드러운 표현을 쓰고 있지만, 붓다고사는 전략적 절충주의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교묘하게 절대주의를 끼워넣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불교 상황에서 보면 매우 중대한 논쟁을 일으킬만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의 견해가 다 옳은 것은 아닐 테지요. 그러나 적어도 이런 정도의 학문적 치밀성과 정직성을 지닌 사람이 우리나라에 거의 없는 게 사실이라면 겸허하게 이 논점을 받아 자기성찰의 토대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제삼자의 처지에서 보면 목하 초기불교 신봉자들은 말로는 절대주의 초일극구조 종교집단을 비판하지만 실제로 초기불전이나 청정도론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런 종교인이 그들의 경전을 대하는 태도와 다를 바가 거의 전혀 없습니다. 매우 경직된 축자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기본적인 언어이론, 문헌비평도 안 된 상태에서 특정 연구자의 이론에 기대어 상대방을 몰아세우기 일쑤입니다. 이런 유아기적 태도 자체가 붓다의 가르침에 배치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모양입니다. 안타깝고 슬픈 일입니다. 물론 여기서 그냥 끝나지는 않겠지요. 이런 시기도 있기 마련일 테지요. 마음을 다한 기다림으로 지켜보겠습니다.  

4. 개인적으로 상담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만지는 일을 하는 자로서 주의 깊게 본 한 부분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붓다가 설법을 통해 사람과 소통하고, 그 생각과 삶을 바꾸어 내는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붓다가 설법을 시작하고 끝맺을 때 네 가지 단계를 거치고 있음을 자주 보게 된다. 첫 번째 단계는 '보여줌', 즉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그 사람의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자 하며.......그것을 실제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자 한다. 두 번째의 단계에서.......사물이나 현상이 지닌 비실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어떤 '동요'를 유발시키려고 한다.......세 번째의 단계에서는 문제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제시됨으로써 동요가 곧 가라앉게 된다.......마지막 단계에서 붓다는 설법을 듣는 사람을 굳이 자신의 사유방식으로 전환시키고자 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듣는 사람이 구태여 애쓰지 않아도 그의 설명을 받아들이기에 이르기 때문이다."(151-152쪽) 

매우 놀랍게도 붓다의 이런 방식은 제가 상담 치료를 8단계로 나누어 '한 요법'이라 이름 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물론 저는, 초기 불전에 나타난 붓다의 설법 방식을 전혀 모른 채, 원효 사상에 터 잡아 큰 얼개를 잡고 그것을 다시 세분화하여 나름대로 틀을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일치하는 것을 보면서, 원효 사상과 붓다 사상의 근본적 일치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당연한 거 아니냐, 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승불교 전승의 흐름 속에 있는 원효가 초기불전에 나타난 붓다의 '원음(原音)'을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테고, 오히려 초기불교 신봉자들이 백안시하는 대승경전에 의거해 사상을 펼쳤을 테니, 어떻게 두 분의 사상이 일치할 수 있느냐, 이렇게 물어야 더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그렇게 질문해 보지요. 자, 어떻게 두 분의 사상이 일치할 수 있었을까요? 둘로 나누어 생각하겠습니다. 우선 보편적 이치를 염두에 둘 때 한 사회의 패권을 쥐고 있는 이른바 헤게모니 블록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영속화하기 위해 실체, 본질, 토대 개념으로 구성된 절대주의를 구축하게 마련이고 문자 또한 거기에 복무하도록 구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붓다 당시 아리안 기원의 베다-우파니샤드에 기댄 브라흐만 사상, 그것을 기록한 고급 산스크리트어가 바로 그런 예이고, 원효 당시 흉노적 기원을 가진 김씨 신라와 대당 유학승 중심의 대승불교 사상, 그것을 기록한 의상 류의 시(詩)적 한문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이 절대주의에 정면 도전을 감행하며 비실체주의, 비본질주의, 비토대주의 사상을 펼친 것이 붓다이며 원효입니다. 붓다는 동북 인도 지방의 토속어로 설법했으며, 원효는 소(疎) 로써 민중지향의 글을 썼습니다. 이런 공통점 때문에 두 분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일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원효를 중심으로 한 이야깁니다. 원효 사상은 단순히 중국 계통의 불교 사상만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오랜 근원을 지닌 생태공동체의 토속적인 사상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오히려 후자의 영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토속 사상이란 다름 아닌 '한' 사상이지요. '한' 사상은 그 어떤 사상보다 절대주의를 거부합니다. 비실체주의, 비본질주의, 비토대주의가 생명감각 전반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이 '한'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었기 때문에 '대승경전'을 보면서도(!) 원효는 붓다 사상의 정수를 간취할 수 있었습니다. 붓다의 생태공동체도 우리와 유사한 생명감각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이는 제 능력 밖의 문제라 그냥 원효를 중심으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면 왜 원효를, 붓다를 이리도 공들여 붙잡은 것일까요? 오늘 우리의 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붓다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원효의 상황은 거의 정확히 오늘 우리의 그것과 같습니다. 통일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 대립, 통치집단의 행태, 지배 엘리트의 학문적 정체성과 그 어법, 바람직한 대안.......이 모든 문제에서 우리는 원효를, 그리고 붓다를 소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같은 무명의 의자(醫者)야 이렇게 큰 담론을 견딜 수 없고 다만 마음 아픈 사람 상담으로 치료하는 일이나마 원효의 길, 붓다의 길을 실천함으로써 나름의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종교로서 불교에 관심 없으신 분께 종조(宗祖)로서 붓다를 말씀드리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절대주의를 해체하고 경험과 실용으로 참된 삶의 결을 세운 큰 스승으로서 붓다를 우리 앞에 세우려는 것입니다. 누군가, 그럼, 예수는 어떠신가?, 물어 올 텐데,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의 통속 기독교인의 생각과 달리, 깊이 들어가 보면 예수 또한  붓다처럼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정도(正道)로서 중도(中道)를 산 스승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간절하게 찾는 스승은, 그 이름이 무엇인가와 상관 없이, 초일극집중구조로서 절대주의가 일으킨 인류 멸절의 위기에 당당히 맞설, 그런 분이어야 합니다. 이 문제의식을 벼리기 위해서라면 500쪽이 넘는 이 학문적인 책도 한 번 품어봄 직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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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3장 본문입니다.  

 

詩曰衣錦尙絅 惡其文之著也. 故 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 君子之道 淡而不厭 簡而文 溫而理 知遠之近 知風之自 知微之顯 可與入德矣. 詩云潛雖伏矣 亦孔之昭. 故 君子內省不疚 無惡於志 君子之所不可及者 其唯人之所不可見乎. 詩云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 故 君子 不動而敬 不言而信. 詩曰奏假無言 時靡有爭. 是故 君子不賞而民勸 不怒而民威於鈇鉞. 詩曰不顯惟德 百辟其刑之. 是故 君子篤恭而天下平. 詩云予懷明德 不大聲而色. 子曰聲色之於以化民 末也. 詩云德유(車酋*)如毛 毛猶有倫 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 수레 거에 두목 추를 붙인 가볍다는 뜻의 '유' 자인데 인터넷 사전에서 찾지 못해 이렇게 올렸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비단옷을 입고 홑옷을 걸쳤다"고 했으니, 그 문채의 드러남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어두우나 날로 드러나고, 소인의 도는 확연하지만 날로 없어진다. 군자의 도는 담담하나 싫어지지 아니하고 간략하지만 세련되었으며 따뜻하면서도 조리가 있다. 심원한 이치가 가까운 데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임을 알고, 바람이 저절로 불고 있는 것임을 알며 은미한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임을 알면 더불어 덕(德)의 세계에 들어 갈수 있다. 시경에 이르기를 "잠겨 있어서 비록 숨어 있지만 또한 매우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속으로 돌이켜보아 없는 바의 것은 오직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로다. 시경에 이르기를 "너의 집에 있는 것을 보니 오히려 옥루에서도 부끄럽지 아니하다"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움직이지 아니하여도 공경 받으며 말을 하지 아니하여도 신용을 얻는다. 시경에 이르기를 "신의 강림을 빌 때에 말이 없었다. 그때 다툼이 있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군자가 (정치를 하면 백성에게) 상을 주지 아니하여도 백성은 힘쓰고, 화를 내지 아니하여도 백성은 도끼보다 두려워한다. 시경에 이르기를 "드러나지 아니하는가, 오직 이 덕(德)이여, 모든 제후들이 그것을 본받는도다."하였다. 이 때문에 군자는 독실하고 공경스러워서 천하가 화평하다. 시경에 이르기를 "나는 명덕(明德)을 그리워한다. 소리를 크게 하거나 안색으로써 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소리나 얼굴빛이 백성을 교화하는 수단에 있어서는 말단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덕(德)의 가벼움은 터럭과 같다"하였으나 터럭은 오히려 같은 종류가 있으니, 상천(上天)의 작용은 소리가 없고 냄새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다.  

 

2. 드디어 <중용>의 마지막 장입니다. 물론 제1장 공부를 맨 뒤로 돌렸으니 사실은 한 장이 더 남아 있는 것이지만 텍스트 상으로는 최종 결론인 셈입니다.  

 

"상천(上天)의 작용은 소리가 없고 냄새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지극한 것이다(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이 마지막 문장은 참으로 화룡점정의 값어치를 지녔습니다. 완전한 중용 실천은 지극히 평범하다고 나지막이 말함으로써 여백적 결론에 갈음하고 있습니다. '이게 중용이다'라고 위세 떨지 않으며(無聲) '이렇게 중용했다'라고 생색 내지 않아야(無臭) 제대로 된(至) 중용입니다. 그게 바로 중용의 본령(性)입니다. 거꾸로 생명의 본령이 중용입니다. 중용이 아니면 참 생명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묘사를 반복적으로 하고 있지만 앞에 있는 모든 내용은 마지막 이 한마디를 예비한 것입니다. 일일이 그 묘사를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내용을 크게 둘로 나누어 조망함으로써 간결한 결론에 도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전반부는 중용의 실천이 스스로 내세우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闇然而日章)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중용 실천은 한마디로 "평범한 선(善)"입니다. 그것은 특별하다고 자랑하지만 마침내 악(惡)이 되고 마는(的然而日亡) 소인배의 언행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후반부는 중용의 실천이  결국은 백성과 나누는 자유자재한 소통임을 강조합니다. 이러저러한 술수(聲)나 전략(色)을 동원하여 백성을 엎드리게 하는 것은 소인배의 짓입니다.  군자는 고요한(不動) 침묵으로(不言) 백성을 새롭게 빚어냅니다(化民). 백성은 공경(敬)과 신뢰(信)로 화답합니다. 이것이 소통입니다. 이것이 대동(大同)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것이 중용 실천의 영원 궤도입니다.  

 

3. 그 동안, 대개 원칙론의 차원에서 중용을 지금 우리 삶의 상황과 연결하여 읽는 일을 계속해 왔습니다. 함께 고민하신 분들도 이쯤이면 제33장 말미에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미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특별하다고 자랑하지만 마침내 악(惡)이 되고 마는(的然而日亡) 언행 때문에 백성에게 공경과 신뢰를 받지 못하는 소인배가 누구인지, 그래서 우리가 여태 많은 날 동안 무엇을 해 왔는지, 앞으로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침묵 속에서도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툼 없는 나날(時靡有爭)을 그리워합니다. 모두 함께 손뼉 치며 행복을 나누는 나날을 꿈꿉니다. 누군가와 맞서는 나날이 평범한 백성에게 얼마나 고단한 시간인 줄 안다면 저들은 하루라도 빨리 모진 마음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온 정성을 기울여 저들 영혼을 위해 두 손을 모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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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32장 본문입니다.  

 

唯天下至誠 爲能經綸 天下之大經 立天下之大本 知天地之化育. 夫焉有所倚. (月屯*)其仁 淵淵其淵 浩浩其天 苟不固聰明聖知達天德者 其孰能知之. (* 정성스러운 모양을 뜻하는 "준"이라는 글자로서 육달월(月)에 진칠 둔(屯)으로 된 것인데 인터넷 사전에서 찾지 못해 이렇게 해 놓았습니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스러움만이 천하의 큰일을 경륜할 수 있으며 천하의 큰 근본을 세울 수 있으며 천지의 화육을 주관한다. 대저 어디에 의지하는 바가 있겠는가. 정성스러워 어짐 그 자체이고 깊고 깊어 못 그 자체이며 넓고 넓어 하늘 그 자체로다. 진실로 본래 총명예지하여 하늘 덕(德)에 도달한 자 아니면 누가 그를 알 수 있겠는가.  

 

2. 이상적 차원에서 본 誠, 즉 중용의 실천은 온 세상의 흐름을 이끌어(經綸), 바르게 방향 짓고(立), 새롭게 빚어(化育) 갑니다. 따라서 그것은 치우침(倚)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확히 가운데란 뜻이 아닙니다. 본디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랑으로 가득차고(仁) 사려 깊으며(淵) 너그러운(浩) 삶이 바로 그런 실천이지요.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투명하게 열려 있지(達天德) 않으면 중용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其孰能知之). 자기반성이 생략된 특정 이데올로기, 신조, 학문적 이론, 심지어 유아적 편견에 입각하여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강제하려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중용할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찌 해야 전체성을 향해 투명하게 열려 있을 수 있을까요? 답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중용>이 수도 없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평등한 쌍방향 소통" 그 하나입니다. 평등한 쌍방향 소통을 하려면 자기중심을 버려야 합니다. 중심을 버려 가장자리, 아니 자기 경계선 밖의 어둠과 혼란으로 걸어 나와야 비로소 또 그렇게 걸어 나온 생명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나도 너도 기존 문명이 제공해준 권력과 오만과 독선을 내려놓아야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심장, 그 붉고 뜨거운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권모술수도 위세도 손익계산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오직 서로를 버려 벌거숭이가 된 자연 생명, 그 단도직입의 마주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닌, 새로이 빚어지는(化育) 우. 리. 의 가치를 창조하는 영원한 실천, 동사(動詞)의 시공간이 바로 중용입니다. 그러므로 중용은 개인의 품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중용은 전제된 실체, 명사(名詞)의 시공간이 아닙니다. 중용은 온 생명의 집단적이고도 공동체적인 실천입니다. 그 집단, 그 공동체 또한 늘 이루어져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이 과정에 간절함으로 참여하는 것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길입니다. "함께" "몸으로" 하는 명상/참선이 진정한 명상/참선입니다.   

 

3.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그 시간이 안타까운 목마름입니다. 누구에게는 그 시간이 빠져나갈 틈입니다. 누구는 애써 시간을 들여 희망을 만들어 갑니다. 누구는 굳이 시간을 벌어 절망으로 이끌어 가려 합니다. 앞의 '누구'가 헤게모니블록이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뒤의 '누구'가 헤게모니블록이니 이 아니 불행한가요?   

 

오늘도 여전히 진흙탕 같은 '지도층 사회'를 보며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습니다.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이치는 오직 단.도.직.입 한 마디 뿐이다(天地生萬物聖人應萬事惟一直字而已)."  

 

왜 '높으신 분들'은 한사코 돌아가는 술수를 뒤에서 궁리할까요? 그럴수록 고수가 되는  것이기라도 한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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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 - 그들은 맥도날드만이 아니라 우울증도 팔았다
에단 와터스 지음, 김한영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1. 이 책을 발견하고 집어드는 순간 두 가지 상념이 송곳처럼 파고들었습니다. 아, 나를 피고로 소환하는 책이구나! 하는 섬찍함. 다른 하나는 이런 고발조차 그들이 하는구나! 하는 슬픔.   

2. 목하 지구 문명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전혀! 우리 모두 아다시피! 심지어 각각의 생태문화 공동체에서 '전통'으로 보존해 온 것조차 그렇습니다. 한의사인 저 역시 그들의 의학과 마주선 전선에서 수 없이 그런 상황을 맞습니다. 그나마 이것만은 그들한테서 지켜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야이지만 당최 싸움이 되지 않는 판입니다. 미국식 보건의료체계를 국민보건의료체계로 굳건히 세운 우리나라에서 한의학은 의학이라기보다 그나마 마지못해 인정해주는 대체의료 방식, 그것도 민간요법-비과학적인(!)-정도로 취급 당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어느 의학도 그 자체로 보편의학일 수 없는 만큼, 인간생명이 지니는 보편성에 터 잡으면 일정 정도의 보편성을 띠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미국 중심의 서양의학도 받아들여서 좋은 것은 받아들이는 게 맞습니다. 다만 권력과 자본의 역학관계가 작용하여 폭력적으로, 일방적으로 점령해 들어오는  현실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해악, 아니 재앙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문제 삼아야만 하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의학적 문제는 생명을 직접 다루는 문제이므로 그 어떤 분야보다 날카롭고 힘 있게 대응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오히려 더 둔하고 무기력하게 반응합니다. 아마 어쩌면 우리 무의식에까지 식민지적 삶의 틀이 배어 들어간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서양의학, 특히 미국의학이라면 무조건 보편성을 부여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번역과 흉내내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현상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될 것입니다.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우리사회의 지배 엘리트이고 보면 당연한 일일 테지요.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참으로 답답하고 슬픈 세월을 살고 있는 겁니다, 우리, 시방! 

3. 저자는 서론에서 이렇게 자기고발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인들은 정신질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열심히 수출해 왔다. 우리의 정의와 치료법은 국제 표준이 되었다.....세계의 다른 지역에 우리의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우리는.....세계가 미쳐가는 방식을 균일화하고 말았다."(6-7쪽) 

저자의 이 말에서 주목할 단어는 두 개의 동사입니다. 하나는 "수출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가르치다"입니다. 바로 이 두 단어가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거식증,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정신분열병, 그리고 우울증을 어떻게 미국이 다른 나라에 "팔아서" 천문학적 이익을 챙겼는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말을 들을 때 미국인도 불쾌할 수 있고 해당 "수입" 국가 사람들도 불쾌할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정신질환을 팔고 사다니?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생명, 특히 정신으로서 생명을 놓고 거래를 했다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미국인들이 어떻게 돈으로 관련 분야의 사람을 매수했는지, 어떻게 과학적 담론을 왜곡하여 돈과 연결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진실을 알고나면 참으로 허망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말이 "수출"이지 속여 파는사기요, 위협해 파는공갈이라 해야 합니다. 

"가르치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더욱 우리를 씁쓸하게 합니다. 그들은 무지하고 몽매한 미국 밖의 인류에게 자신들이 터득한 불변적이고 보편적인 과학을 계몽한다는 신념과 사명감으로 무장하고 각지로 퍼져나갔다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그야말로 '봉사'요 '공헌'이 아닐 수 없으니 이 무슨 웃지 못할 희극이란 말입니까. 이런 자아도취적 윤리의식이므로 아무런 반성도 없이, 거침 없이, 자본과 야합할 수 있었겠지요. 이 야합의 순간, 희극은 비극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이야 그렇다 치고, 아! 하다 하다, 인제는 정신병까지 수입해다가, 그 것 치료한다는 화학품까지 수입해다가, 먹고, 일제히 미쳐가다니, 우리, 어쩌다, 이렇게까지....... 망연자실. 허탈무인지경. 

과학이든, 의학이든, 문화든, 종교든.....모든 것은 그 때 그 곳에서 일어나고 스러지는 무상(無常)한 사건일 뿐이거늘, 서양, 특히 미국 사람들은 자기 것이 항상불변 보편타당하다 굳게 믿으니 이는 아마도 자기문명의 우월성에 기댄 자기기만일 터인데, 그밖 사람들조차 덩달아 끌려가서 인류를 멸절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있습니다. 이게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인류의 운명이 아닐런지요. 자승자박으로 파멸해가는....... 

4. 저는 우울증을 한국적인 상담과 한약으로 치료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사람입니다. 두 달 전 쯤에 펴낸 책 <안녕, 우울증>에서 저는 미국식, 즉 DSM식 우울증 개념을 비판하고, 한국인에게는 화병(火病)이란 고유생태적 개념이 이미 있으며, 치료법 또한 고유생태적 방식이 있음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울증 역시 인간의 삶의 한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개인 차원, 특히 뇌신경 조절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저의 문제의식을 다시 소환하여 이 책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저자는 제4장 우울증을 팝니다,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세계적으로 볼 때 문화적 특이성이 가장 높은 것이 서양의 우울증 개념, 특히 우울증의 미국적인 형태다.....미국인들은 고통스런 감정과 느낌들을 낯선 사람에게 기꺼이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성향과, 심리적인 고통을 의료문제로 보는 성향을 동시에 가진 유일한 국민이라......."(250쪽) 

이 말에는 매우  중요한  논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정신적 고통을 개인이 지닌 병리적 속성으로 명사화하는 것과 다시 그것을 사물화하는 태도는, 미국인이 지닌 근본적인 세계관에 젖줄을 대고 있습니다. 인간을 독립적 개별자로 파악하는 관점이 병도 그렇게 보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라는 홀로주체 앞에 놓인 모든 객체는 사물로서 대상일 뿐이라는 싸늘한 관계 인식이 병도 그렇게 파악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요컨대 정신질환은 한 개인이 지닌 사물적 속성이므로 각자 자기계발이나 화학약품을 통해 제거하면 된다, 이런 태도입니다. 

서양, 특히 미국 이외 다른 전통을 지닌 사회에서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다릅니다. 대개 그런 전통 사회에서, 정신적 고통은 삶의 공동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정신이란 삶의 제 조건과 상호적으로 작용하는 과정 그 자체이므로 한 사람의 불변하는 속성이 아니고, 늘 달라지는 공동체적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삶을 나누지 않은 낯선 사람한테라도 아무 거리낌없이 드러낼 수 있는, 달리 말하면 내다 팔 수 있는 물건 같은 게 아니지요. 삶의 공동체 안에서, 그 연속성에 터 잡아, 해결해 나아가는 "이야기로서 고통"인 것입니다. 홀로 수행하는 자기계발로도, 더군다나 뇌신경 조절하는 화학약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정신질환에서 각각의 생태공동체 문화의 고유한 이야기를 깡그리 갈아엎고, 오직 DSM 기준 단일 대오로  재구성해버렸습니다. 더 나아가 이 기준에 맞춤한 환자를 양산해내고, 다시 그들이 의존해야 할 단일 내용의 자기 계발서를 양산해내고, 그들이 먹고 병을 제거해야 할 단일화한 화학약품을 양산해냄으로써 최고로 진화한 자기구성적 독점시장을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서론에서 이미 결론에 갈음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정신병 개념과 다양한 치료법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우리는 생물학적 다양성이 사라지는 현상을 대할 때처럼 심각하게 걱정해야 한다. 치유법들 그리고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문화 고유의 믿음들은 멸종해가는 동식물처럼 한 번 사라지면 다시는 우리 곁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동식물처럼 정신에 대한 이해의 다양성도 우리가 그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기 전에 사라질 수 있다. 생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열대우림의 무성하고 다활기찬 생물의 다양성 안에는 언젠가 현대 전염병들을 치료할 수 있는 화합물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건강과 질환에 대한 문화적 이해의 다양성 안에는 우리가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지식이 존재할 수 있다. 이 다양성을 지우면 우리 자신이 위험해진다."(13쪽)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고발과 경고를 듣고자 하는 이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미 뇌라는 장기(臟器)(!)를 다루는 내과의사가 되어버린 자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땅의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아니면 말고' 식으로 화학약품 던지기에 바쁘고, 정신적 고통 안은 사람들조차 대부분 서양, 아니 미국의학을 진리처럼, 종교처럼 믿고 의지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5. 여기서, 문득! 한 생각을 돌이켜 봅니다. 저자의 투명한 자기고발, 청교도적 반성이 마냥 장점이지만은 않다는 진실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고발의 특성상 한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는 면을  냉정하게 짚어내야 한다는 말이지요. 

서양, 특히 미국이 지나치게 "높은 감정표현" 사회이어서 생겨난 폐단이 정신질환과 그 치료에도 투영되고 있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지나치게 "낮은 감정표현" 사회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폐단 또한 있을 것입니다. 뭐, 멀리 갈 것도 없지요. 우리는 과거 수백 년 동안 유교 가부장적 사회에서 살았습니다. 이 문화는 감정 표현을 극도로 억제하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억압적이었지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빚어진 한국형 우울증이 앞서 말씀드린 화병(火病)입니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높은 감정표현" 사회가 우울증을 개별화하고 사물화한 폐단이 있는 바로 그만큼, 지나치게 "낮은 감정표현" 사회가 우울증을 공동체 윤리 문제나 정신력 문제로 몰아붙여 치료와 돌봄의 대상에서 소외시킨 폐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무시하고 야단치는 대상에서 화학약품으로라도(!) 치료를 받는, 그나마라도 관심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윤리적으로 잘못되거나 나쁜 게 아니고, 아픈 것입니다, 그러니 치료를 받게 해주세요, 이런 논리거든요.  

이 정도라면 사실은 미국적 개념에 일종의 해방적 요소가 없지 않습니다. 공동체 윤리에 매몰되었던 개인 감정을 드러내어 말하고, 배려와 치료를 당당히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이른바 근대적 각성이라는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양의 근대가 종교적 억압으로 상징되는 중세에 대한 저항과 혁명이었듯, 그악한 송시열적, 마초적 성리학 체제에 대한 저항과 혁명으로서 우울증, 아니 화병을 개별적 화두로 드는 것은 필요성 백만 제곱 아니던가요. 말하자면 이것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부정(否正)이며 뒤집기입니다. 폴 리쾨르 식으로 말하자면 la 1ère naïvetè(제1 소박/긍정성)의 단계를 극복하기 위한 la critique(부정/비판)인 것이지요. 물론 여기가 답은 아닙니다. 미국은 바로 여기를 절대화했다는 점에서 실수한 것이지요. 

답은 la 2nde naïvetè(제2 소박/긍정성)입니다. 부정을 거친, 그것을 품은, 그래서 한 차원 높아진 naïvetè입니다. 개인적 각성이 공동체성과 다만 충돌-분리만 하는 게 아니고, 대립하면서도 순간 순간 결속하고, 결속하면서도 순간 순간 대립하는 역설 관계에 놓이는 것입니다. 부정(不定)입니다. 이것을 제 책에서는 원효 사상으로 드러내어 화쟁(和諍)-무애(無碍)라고 하였지요.  

우울증을 앓지 않는 개인이 있습니다. 우울증을 앓는 개인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 개인은 서로 다른, 경계가 분명히 지워지는 독립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울증을 앓는 개인의 내면 풍경에는 반드시 우울증을 앓지 않는 사람,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울증 치료는 궁극적으로 우울증을 앓는 사람만의 문제로 개별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학약품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참된 의미의 상담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상담은 결국 관계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 정치경제학의 문제, 문명의 문제를 소환합니다. 상담, 대화는 각성을 거친 개인이 빚어내는 새로운 공동체의 출발입니다. 미국과 미국 아닌 세계, 모두가 날카롭게 깨달아아야 할 문제입니다. 이 책의 저자가 아직 여기까지 오지는 못햇습니다.

6. 그러나, 이 책, 야무지고 맑은 자기고발만으로도 충분히 대견스럽습니다. 더 구체적이고 차원 높은 이야기와 대안은 우리 몫으로 남겨두어야 덜 부끄럽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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