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32장 본문입니다.  

 

唯天下至誠 爲能經綸 天下之大經 立天下之大本 知天地之化育. 夫焉有所倚. (月屯*)其仁 淵淵其淵 浩浩其天 苟不固聰明聖知達天德者 其孰能知之. (* 정성스러운 모양을 뜻하는 "준"이라는 글자로서 육달월(月)에 진칠 둔(屯)으로 된 것인데 인터넷 사전에서 찾지 못해 이렇게 해 놓았습니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스러움만이 천하의 큰일을 경륜할 수 있으며 천하의 큰 근본을 세울 수 있으며 천지의 화육을 주관한다. 대저 어디에 의지하는 바가 있겠는가. 정성스러워 어짐 그 자체이고 깊고 깊어 못 그 자체이며 넓고 넓어 하늘 그 자체로다. 진실로 본래 총명예지하여 하늘 덕(德)에 도달한 자 아니면 누가 그를 알 수 있겠는가.  

 

2. 이상적 차원에서 본 誠, 즉 중용의 실천은 온 세상의 흐름을 이끌어(經綸), 바르게 방향 짓고(立), 새롭게 빚어(化育) 갑니다. 따라서 그것은 치우침(倚)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확히 가운데란 뜻이 아닙니다. 본디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랑으로 가득차고(仁) 사려 깊으며(淵) 너그러운(浩) 삶이 바로 그런 실천이지요.   

 

이렇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투명하게 열려 있지(達天德) 않으면 중용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其孰能知之). 자기반성이 생략된 특정 이데올로기, 신조, 학문적 이론, 심지어 유아적 편견에 입각하여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강제하려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중용할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찌 해야 전체성을 향해 투명하게 열려 있을 수 있을까요? 답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중용>이 수도 없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평등한 쌍방향 소통" 그 하나입니다. 평등한 쌍방향 소통을 하려면 자기중심을 버려야 합니다. 중심을 버려 가장자리, 아니 자기 경계선 밖의 어둠과 혼란으로 걸어 나와야 비로소 또 그렇게 걸어 나온 생명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나도 너도 기존 문명이 제공해준 권력과 오만과 독선을 내려놓아야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심장, 그 붉고 뜨거운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권모술수도 위세도 손익계산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오직 서로를 버려 벌거숭이가 된 자연 생명, 그 단도직입의 마주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닌, 새로이 빚어지는(化育) 우. 리. 의 가치를 창조하는 영원한 실천, 동사(動詞)의 시공간이 바로 중용입니다. 그러므로 중용은 개인의 품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중용은 전제된 실체, 명사(名詞)의 시공간이 아닙니다. 중용은 온 생명의 집단적이고도 공동체적인 실천입니다. 그 집단, 그 공동체 또한 늘 이루어져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이 과정에 간절함으로 참여하는 것이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길입니다. "함께" "몸으로" 하는 명상/참선이 진정한 명상/참선입니다.   

 

3.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그 시간이 안타까운 목마름입니다. 누구에게는 그 시간이 빠져나갈 틈입니다. 누구는 애써 시간을 들여 희망을 만들어 갑니다. 누구는 굳이 시간을 벌어 절망으로 이끌어 가려 합니다. 앞의 '누구'가 헤게모니블록이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뒤의 '누구'가 헤게모니블록이니 이 아니 불행한가요?   

 

오늘도 여전히 진흙탕 같은 '지도층 사회'를 보며 문득 이런 말이 떠올랐습니다.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이치는 오직 단.도.직.입 한 마디 뿐이다(天地生萬物聖人應萬事惟一直字而已)."  

 

왜 '높으신 분들'은 한사코 돌아가는 술수를 뒤에서 궁리할까요? 그럴수록 고수가 되는  것이기라도 한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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