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 - 그들은 맥도날드만이 아니라 우울증도 팔았다
에단 와터스 지음, 김한영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1. 이 책을 발견하고 집어드는 순간 두 가지 상념이 송곳처럼 파고들었습니다. 아, 나를 피고로 소환하는 책이구나! 하는 섬찍함. 다른 하나는 이런 고발조차 그들이 하는구나! 하는 슬픔.   

2. 목하 지구 문명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전혀! 우리 모두 아다시피! 심지어 각각의 생태문화 공동체에서 '전통'으로 보존해 온 것조차 그렇습니다. 한의사인 저 역시 그들의 의학과 마주선 전선에서 수 없이 그런 상황을 맞습니다. 그나마 이것만은 그들한테서 지켜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야이지만 당최 싸움이 되지 않는 판입니다. 미국식 보건의료체계를 국민보건의료체계로 굳건히 세운 우리나라에서 한의학은 의학이라기보다 그나마 마지못해 인정해주는 대체의료 방식, 그것도 민간요법-비과학적인(!)-정도로 취급 당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어느 의학도 그 자체로 보편의학일 수 없는 만큼, 인간생명이 지니는 보편성에 터 잡으면 일정 정도의 보편성을 띠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미국 중심의 서양의학도 받아들여서 좋은 것은 받아들이는 게 맞습니다. 다만 권력과 자본의 역학관계가 작용하여 폭력적으로, 일방적으로 점령해 들어오는  현실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해악, 아니 재앙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문제 삼아야만 하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의학적 문제는 생명을 직접 다루는 문제이므로 그 어떤 분야보다 날카롭고 힘 있게 대응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오히려 더 둔하고 무기력하게 반응합니다. 아마 어쩌면 우리 무의식에까지 식민지적 삶의 틀이 배어 들어간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서양의학, 특히 미국의학이라면 무조건 보편성을 부여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번역과 흉내내기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현상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될 것입니다. 미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우리사회의 지배 엘리트이고 보면 당연한 일일 테지요.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참으로 답답하고 슬픈 세월을 살고 있는 겁니다, 우리, 시방! 

3. 저자는 서론에서 이렇게 자기고발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인들은 정신질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열심히 수출해 왔다. 우리의 정의와 치료법은 국제 표준이 되었다.....세계의 다른 지역에 우리의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우리는.....세계가 미쳐가는 방식을 균일화하고 말았다."(6-7쪽) 

저자의 이 말에서 주목할 단어는 두 개의 동사입니다. 하나는 "수출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가르치다"입니다. 바로 이 두 단어가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거식증,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정신분열병, 그리고 우울증을 어떻게 미국이 다른 나라에 "팔아서" 천문학적 이익을 챙겼는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말을 들을 때 미국인도 불쾌할 수 있고 해당 "수입" 국가 사람들도 불쾌할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정신질환을 팔고 사다니? 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생명, 특히 정신으로서 생명을 놓고 거래를 했다는 말이 아닌가? 하지만 미국인들이 어떻게 돈으로 관련 분야의 사람을 매수했는지, 어떻게 과학적 담론을 왜곡하여 돈과 연결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진실을 알고나면 참으로 허망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말이 "수출"이지 속여 파는사기요, 위협해 파는공갈이라 해야 합니다. 

"가르치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더욱 우리를 씁쓸하게 합니다. 그들은 무지하고 몽매한 미국 밖의 인류에게 자신들이 터득한 불변적이고 보편적인 과학을 계몽한다는 신념과 사명감으로 무장하고 각지로 퍼져나갔다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그야말로 '봉사'요 '공헌'이 아닐 수 없으니 이 무슨 웃지 못할 희극이란 말입니까. 이런 자아도취적 윤리의식이므로 아무런 반성도 없이, 거침 없이, 자본과 야합할 수 있었겠지요. 이 야합의 순간, 희극은 비극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들이야 그렇다 치고, 아! 하다 하다, 인제는 정신병까지 수입해다가, 그 것 치료한다는 화학품까지 수입해다가, 먹고, 일제히 미쳐가다니, 우리, 어쩌다, 이렇게까지....... 망연자실. 허탈무인지경. 

과학이든, 의학이든, 문화든, 종교든.....모든 것은 그 때 그 곳에서 일어나고 스러지는 무상(無常)한 사건일 뿐이거늘, 서양, 특히 미국 사람들은 자기 것이 항상불변 보편타당하다 굳게 믿으니 이는 아마도 자기문명의 우월성에 기댄 자기기만일 터인데, 그밖 사람들조차 덩달아 끌려가서 인류를 멸절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있습니다. 이게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인류의 운명이 아닐런지요. 자승자박으로 파멸해가는....... 

4. 저는 우울증을 한국적인 상담과 한약으로 치료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사람입니다. 두 달 전 쯤에 펴낸 책 <안녕, 우울증>에서 저는 미국식, 즉 DSM식 우울증 개념을 비판하고, 한국인에게는 화병(火病)이란 고유생태적 개념이 이미 있으며, 치료법 또한 고유생태적 방식이 있음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울증 역시 인간의 삶의 한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개인 차원, 특히 뇌신경 조절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저의 문제의식을 다시 소환하여 이 책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저자는 제4장 우울증을 팝니다, 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세계적으로 볼 때 문화적 특이성이 가장 높은 것이 서양의 우울증 개념, 특히 우울증의 미국적인 형태다.....미국인들은 고통스런 감정과 느낌들을 낯선 사람에게 기꺼이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성향과, 심리적인 고통을 의료문제로 보는 성향을 동시에 가진 유일한 국민이라......."(250쪽) 

이 말에는 매우  중요한  논점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정신적 고통을 개인이 지닌 병리적 속성으로 명사화하는 것과 다시 그것을 사물화하는 태도는, 미국인이 지닌 근본적인 세계관에 젖줄을 대고 있습니다. 인간을 독립적 개별자로 파악하는 관점이 병도 그렇게 보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라는 홀로주체 앞에 놓인 모든 객체는 사물로서 대상일 뿐이라는 싸늘한 관계 인식이 병도 그렇게 파악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요컨대 정신질환은 한 개인이 지닌 사물적 속성이므로 각자 자기계발이나 화학약품을 통해 제거하면 된다, 이런 태도입니다. 

서양, 특히 미국 이외 다른 전통을 지닌 사회에서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다릅니다. 대개 그런 전통 사회에서, 정신적 고통은 삶의 공동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정신이란 삶의 제 조건과 상호적으로 작용하는 과정 그 자체이므로 한 사람의 불변하는 속성이 아니고, 늘 달라지는 공동체적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삶을 나누지 않은 낯선 사람한테라도 아무 거리낌없이 드러낼 수 있는, 달리 말하면 내다 팔 수 있는 물건 같은 게 아니지요. 삶의 공동체 안에서, 그 연속성에 터 잡아, 해결해 나아가는 "이야기로서 고통"인 것입니다. 홀로 수행하는 자기계발로도, 더군다나 뇌신경 조절하는 화학약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은 정신질환에서 각각의 생태공동체 문화의 고유한 이야기를 깡그리 갈아엎고, 오직 DSM 기준 단일 대오로  재구성해버렸습니다. 더 나아가 이 기준에 맞춤한 환자를 양산해내고, 다시 그들이 의존해야 할 단일 내용의 자기 계발서를 양산해내고, 그들이 먹고 병을 제거해야 할 단일화한 화학약품을 양산해냄으로써 최고로 진화한 자기구성적 독점시장을 만들었습니다. 저자는 서론에서 이미 결론에 갈음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정신병 개념과 다양한 치료법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우리는 생물학적 다양성이 사라지는 현상을 대할 때처럼 심각하게 걱정해야 한다. 치유법들 그리고 정신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문화 고유의 믿음들은 멸종해가는 동식물처럼 한 번 사라지면 다시는 우리 곁에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 동식물처럼 정신에 대한 이해의 다양성도 우리가 그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기 전에 사라질 수 있다. 생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열대우림의 무성하고 다활기찬 생물의 다양성 안에는 언젠가 현대 전염병들을 치료할 수 있는 화합물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건강과 질환에 대한 문화적 이해의 다양성 안에는 우리가 절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지식이 존재할 수 있다. 이 다양성을 지우면 우리 자신이 위험해진다."(13쪽)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고발과 경고를 듣고자 하는 이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이미 뇌라는 장기(臟器)(!)를 다루는 내과의사가 되어버린 자신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땅의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아니면 말고' 식으로 화학약품 던지기에 바쁘고, 정신적 고통 안은 사람들조차 대부분 서양, 아니 미국의학을 진리처럼, 종교처럼 믿고 의지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5. 여기서, 문득! 한 생각을 돌이켜 봅니다. 저자의 투명한 자기고발, 청교도적 반성이 마냥 장점이지만은 않다는 진실에 귀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고발의 특성상 한 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는 면을  냉정하게 짚어내야 한다는 말이지요. 

서양, 특히 미국이 지나치게 "높은 감정표현" 사회이어서 생겨난 폐단이 정신질환과 그 치료에도 투영되고 있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지나치게 "낮은 감정표현" 사회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폐단 또한 있을 것입니다. 뭐, 멀리 갈 것도 없지요. 우리는 과거 수백 년 동안 유교 가부장적 사회에서 살았습니다. 이 문화는 감정 표현을 극도로 억제하는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억압적이었지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빚어진 한국형 우울증이 앞서 말씀드린 화병(火病)입니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높은 감정표현" 사회가 우울증을 개별화하고 사물화한 폐단이 있는 바로 그만큼, 지나치게 "낮은 감정표현" 사회가 우울증을 공동체 윤리 문제나 정신력 문제로 몰아붙여 치료와 돌봄의 대상에서 소외시킨 폐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무시하고 야단치는 대상에서 화학약품으로라도(!) 치료를 받는, 그나마라도 관심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윤리적으로 잘못되거나 나쁜 게 아니고, 아픈 것입니다, 그러니 치료를 받게 해주세요, 이런 논리거든요.  

이 정도라면 사실은 미국적 개념에 일종의 해방적 요소가 없지 않습니다. 공동체 윤리에 매몰되었던 개인 감정을 드러내어 말하고, 배려와 치료를 당당히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이른바 근대적 각성이라는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양의 근대가 종교적 억압으로 상징되는 중세에 대한 저항과 혁명이었듯, 그악한 송시열적, 마초적 성리학 체제에 대한 저항과 혁명으로서 우울증, 아니 화병을 개별적 화두로 드는 것은 필요성 백만 제곱 아니던가요. 말하자면 이것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부정(否正)이며 뒤집기입니다. 폴 리쾨르 식으로 말하자면 la 1ère naïvetè(제1 소박/긍정성)의 단계를 극복하기 위한 la critique(부정/비판)인 것이지요. 물론 여기가 답은 아닙니다. 미국은 바로 여기를 절대화했다는 점에서 실수한 것이지요. 

답은 la 2nde naïvetè(제2 소박/긍정성)입니다. 부정을 거친, 그것을 품은, 그래서 한 차원 높아진 naïvetè입니다. 개인적 각성이 공동체성과 다만 충돌-분리만 하는 게 아니고, 대립하면서도 순간 순간 결속하고, 결속하면서도 순간 순간 대립하는 역설 관계에 놓이는 것입니다. 부정(不定)입니다. 이것을 제 책에서는 원효 사상으로 드러내어 화쟁(和諍)-무애(無碍)라고 하였지요.  

우울증을 앓지 않는 개인이 있습니다. 우울증을 앓는 개인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 개인은 서로 다른, 경계가 분명히 지워지는 독립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울증을 앓는 개인의 내면 풍경에는 반드시 우울증을 앓지 않는 사람,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울증 치료는 궁극적으로 우울증을 앓는 사람만의 문제로 개별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학약품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참된 의미의 상담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상담은 결국 관계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 정치경제학의 문제, 문명의 문제를 소환합니다. 상담, 대화는 각성을 거친 개인이 빚어내는 새로운 공동체의 출발입니다. 미국과 미국 아닌 세계, 모두가 날카롭게 깨달아아야 할 문제입니다. 이 책의 저자가 아직 여기까지 오지는 못햇습니다.

6. 그러나, 이 책, 야무지고 맑은 자기고발만으로도 충분히 대견스럽습니다. 더 구체적이고 차원 높은 이야기와 대안은 우리 몫으로 남겨두어야 덜 부끄럽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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